어느 날 싯다르타 태자는 동문에서 늙은 사람을, 남문에서 병든 사람을, 서문에서 죽은 사람의 관을,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났다. 이후 태자 자신이 가야할 길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동문에서) 태자는 노인이 쇠약한 모습으로 괴롭게 가는 것을 보고 말몰이꾼에게 어떤 사람인지 물었고, 말몰이꾼은 이렇게 답했다.
“늙었다 함은 사람에게 쇠하고 혼미함이 닥쳐와 자기도 모르는 결에 모든 기관이 점점 쇠퇴하여 기력이 줄어들고 몸이 수척하여 이미 괴로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으며, 이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침 아니면 저녁에는 그 목숨을 마치게 됩니다. 귀천은 다르나 태어난 일이 있으면 다 이런 늙는 법을 면치 못합니다. 사람의 몸에는 처음부터 이런 늙고 쇠퇴하는 상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문에서) 태자는 고통스러워하는 병자를 만났다. 붙들어 앉혀 달라고 겨우 말하는 병자를 보고 태자는 말몰이꾼에게 “어떤 사람인데 배가 저렇게 큰 솥같이 부풀었는가”라고 물었다. 말몰이꾼은 “죽을 때가 되어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며, 부모도 모두 죽고 없어 호소할 곳도 없다”며 “이미 돌아가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기에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이 다할 것”이라고 병자를 설명했다. 그리고 “한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하늘과 인간과 중생도 다 이런 법을 면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서문에서는) 죽은 사람의 관과 그 옆에서 흐느끼는 친지들을 목격했다. 갖가지 흐느끼는 소리를 내거나 눈물을 비오듯 쏟거나, 크게 부르짖고 통곡하는데, 애처로운 흐느낌은 듣기 어려웠다. 태자는 이것을 보고 비참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말몰이꾼에게 “이는 누구이길래 여러 사람이 두루 에워싸고 원통하다고 부르짖으며 통곡하는가”라며 “이 죽는 법을 내가 초월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태자의 높으신 몸도 역시 죽는 법에서는 면하거나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간의 일체 천상이나 인간은 모든 친족이나 권속이나 아는 이들과 각각 이별하는 일이 있어서 그는 이를 보지 못하고 이도 그를 보지 못합니다.”
북문에 이른 태자는 출가수행자와 마주했다. 그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승가리(僧伽梨, 스님의 법의)를 입고 오른쪽 어깨를 내려 드러내고 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바닥에 발우를 받쳐 들고 길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수레를 끌어 그의 곁으로 간 태자는 그에게 물었다.
“어진 이여, 무엇 때문에 출가한 사람이라 합니까?”
“제가 일체 세간의 모든 것을 보니 다 무상합니다. 이런 것을 관하고 나서 세속의 모든 일을 버리고 친족을 멀리 여의고 해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출가하여 어떤 방편을 행하여 모든 목숨을 살릴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은 족함을 알고 법다운 행을 잘 행하며 (…중략…) 일체의 모든 생명을 살해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태자여, 이런 까닭에 저는 출가라 이름합니다.”
태자는 법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레에서 내려 출가인 앞에 걸어가서 머리와 얼굴을 숙여 그에게 정례하고 세 번 돌고서 도로 수레 위에 앉았다. 그리고 말몰이꾼에게 명하여 도로 궁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저 열반을 취할 것이요, 나는 이제 저 열반을 증득할 것이요, 나는 이제 저 열반을 행할 것이요, 나는 이제 저 열반에 머물 것이다.’
- 『불본행집경』 「출봉노인품」, 「도견병인품」, 「노봉사시품」, 「야수다라몽품」 각색
우울한 세계
가장 우울한 이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침묵으로 말한다. 그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응답 없는 그로 인해 많이 외로워진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인 줄을 알게 된다. 홀로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는 탑 위에 서 있는 듯한 황망함이다.
외롭다. 아주 많이 외롭다. 밑도 보이지 않는 아주 깊은 소외의 구덩이 속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그때서야 우리는 알게 된다. 그가 바로 이토록 외로운 이 세계에 홀로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이 고립이 그의 상태임을.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세상에 아무도 그의 편이 없이 외로운지 그 이유를 묻는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대답한다.
“제가 병신이라서 그래요. 뭔가 정상이 아닌 잘못된 존재 같아요. 뭘 해도 다 안 되고, 이제는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다 싫어요. 더럽고 추한 세상도 싫고, 이런 제 자신도 너무 싫어요. 다 무의미해요.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것에 제일 화가 나느냐고 우리는 그에게 묻는다. 그가 말한다.
“제가 태어난 거요. 이렇게 병신으로 살 거면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질문을 바꾸어 어떤 것이 제일 두렵냐고 다시 묻는다. 그가 울먹인다.
“이대로 살다 제가 이 모습으로 끝나는 거요.”
죽고 싶다고 말하던 그는,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정확할 것이다.
그는 정말로 살고 싶었다.
이 우울한 세계를 벗어나 정말로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삶을 앙망하고 있었다. 붓다가 되기 전 싯다르타와 같았다.
싯다르타의 사춘기와 실존의식
인간의 사춘기는 세계를 조우하면서 시작한다. 근친적 동질성으로 구성된 가족의 경계를 나옴으로써 낯선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전까지 알지 못하던 그 낯선 세계와 함께 동시에 발견되는 것은 바로 자기다. 당황스럽도록 낯선 자신의 모습이다. 그 낯선 세계(자기의 면모), 곧 내 존재로서의 면모로 인해 개인은 혼란스러워진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서다.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그 현실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
싯다르타는 이러한 사춘기를 맞아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눈앞에는 그 자신이 연명하다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현실이 던져졌다. 아니 그 반대다. 싯다르타가 바로 그 현실로 던져졌다.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네 성문을 가진 울타리로 둘러싸인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분명한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실존의식이라고 부른다. 자기로서 각성하게 되는 그 출발점이다.
사춘기는 이 실존의식이 깨어나는 시기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다시 잠들기를 바라는 시기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호해주던 가정이라는 가상의 낙원에서 더는 지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실존의식이 개화된 순간부터 기존의 낙원은 더는 낙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목격한 세계의 모습처럼 가정이라고 하는 낙원 또한 늙고, 추하고, 병들어가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그 색채를 달리한다. 환상이 깨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춘기를 경험하는 이들은 부모와의 갈등을 자주 빚는다. 부모들이 이제는 자신을 너무나 불쾌하게 만드는 그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이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보호해주었으나, 이제는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경험되는 그 양가성의 불편함 속에서, 개인은 정말로 다시 잠들기를 바란다. 잠들 때는 언제나 혼자다. 실존의식으로부터 후퇴하여 잠드는 방식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혼자 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세계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언제나 자신의 노력만큼이나 같은 크기로 거대해진 세계 앞에서 패퇴한다. 세계를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필연적 결과다.
한편 그렇게 세계에서 도망쳐 들어와도 더는 가정이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다. 이제는 안팎으로 가득한 죽음의 냄새 속에서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을 홀로 위로하며 안고 있다 보니 문득 자기 몸에서 냄새가 풍겨온다. 죽음의 냄새가 자기에게도 가득하다. 너무 싫다. 혐오스럽다. 자신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이 가장 멀리하고 싶었던 그것이 바로 가장 가까운 자기 몸이 되어 있다. 절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것(세계)을 부정하며 싸워온 끝에 결국에는 자기까지 부정하게 된 이 상태가 바로 우울이다. 실존의식을 억지로 잠재우려고 한 의도가 빚은 결과다. 사춘기가 완수되지 못하고 끝없이 유예되어 있는 상태와 같다. 표현 그대로, 미생(未生)이다.
세계 밖으로, 자기 밖으로
삶의 속성은 흐르는 것이다. 삶이 완수되지 못한 미생은 고통이다. 삶의 흐름이 정체된 이 상태가 우울이다. 그래서 우울에는 항상 경계가 있다. 사방을 막아서 흐름이 고이게 만든 경계가 존재한다.
세계가 바로 그 경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리화된 특정한 세계가 우울의 경계를 만들어 삶을 정체시킨다. 이를테면, 가정도 분명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그 하나의 세계를 낙원과 같은 가장 좋은 진리처럼 고정시켜 놓고 있을 때, 다른 세계는 자신이 고집하는 세계의 대립물이자 투쟁대상이 된다.
그런데 세계라는 것은 끝없이 그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작은 경계를 넘어 더 큰 경계를 얻게 되는 것이 세계의 확장이다. 그래서 우울이란 작은 세계를 고집하며 그 밖에 펼쳐지는 더 큰 세계와 싸우다가 지친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동시에 세계는 자기와 상응하는 것이다. 세계의 크기는 자기의 크기다. 세계가 커지면 자기도 커지고, 자기가 커지면 세계도 커진다. 때문에 세계의 확장을 막으며 투쟁하는 일은 자신과 투쟁하는 일과 같다. 커지지 않기 위해 압박붕대로 자신을 칭칭 동여매는 일이다. 괴로운 일이며, 늘 화나는 일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만성적으로 화가 나있는 상태가 우울이다.
분명한 것은, 실존의식으로 인하여 우울이 생기는 게 결코 아니다. 실존의식을 은폐한 결과로 우울이 찾아온다. 실존주의적 경향성을 가진 미국의 정신분석가인 어빈 얄롬(Irvin Yalom)은 실존의식이 촉발하는 주요한 주제를 크게 자유, 고립, 무의미, 죽음 등 네 가지로 설명한다. 이 실존적 주제들의 망각 및 억압이 곧 삶의 활력을 앗아가고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자유, 고립, 무의미성, 죽음의 이 주제들은 그대로 싯다르타가 네 곳의 성문에서 만난 생로병사의 주제와 일치한다. 자유는 삶에, 고립은 늙음에, 무의미성은 병듦에, 죽음은 그대로 죽음에 대응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혼자라는 외로움을 실감하며, 철학자 니체가 말한 것처럼 병의 괴로움은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더욱 괴롭게 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절망 속에서 죽게 된다. 이것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확하게는 하나의 고착된 세계에서, 곧 하나의 닫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실존의식은 세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인간이 이렇게 비극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며, 자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닫힌 하나의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실존의식의 절규다. 정말로 살고 싶다는 절규다.
정말로 산다는 것은, 삶의 흐름을 회복하여 산다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더 큰 것을 향해 흐른다. 자기(세계)가 항상 그 밖의 더 큰 자기를 향하는 이 움직임이 바로 삶이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를 스스로 해체하고 재생하면서 끝없이 그 밖을 향하는 운동이다. 표현 그대로, ‘깨서 그 밖에 닿는’ 깨달음의 운동이다. 세계 밖으로, 자기 밖으로 계속 빠져나와야 바로 깨달음의 삶이다.
고이지 않고 흐르는 이 삶을 자유라고 말한다. 삶은 진정 자유다. 그래서 삶은 세계의 문 앞에서, 자신이 그 문을 자유롭게 나갈 것[出家, 出門]임을, 그것이 깨달음의 길임을 알린다. 그렇게 삶은 세계 밖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세계 밖을 향하는 것이다. 세계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문 앞에서 만난 출가자가 알린 것처럼 모든 생명을 살리는 길인 까닭에, 모든 삶은 여기에서 전부 살아난다.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며 하나의 작은 세계를 끝맺을 때, 그 세계 안에서만 작동하던 우울도 함께 끝난다. 우리가 앙망하던 그 순간이며, 붓다가 살아낸 그 영원이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상담자, 실존삼당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