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부인은 땅에 서서 손으로 바라차나무를 잡자마자 보살을 낳았으니, 이것은 이 보살의 희귀한 일이요 미증유한 법이다. (…중략…) 보살이 출생하고 나서 땅에 서서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우러러보면서 입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내 이 몸은 오늘부터 다시 받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들어가서 태에 눕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 마지막 몸이니, 나는 마침내 성불하리라.” (…중략…) 보살이 탄생하자마자 부축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사방으로 걸었다. 각 방면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고, 걸음마다 발을 들면 큰 연꽃이 솟아났다. 일곱 걸음씩 걷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고 눈을 깜짝이지도 않으며 입에서 절로 말이 나왔다. 먼저 동쪽을 바라보며 갓난아기의 말답지 않게 스스로 글귀에 맞게 바른 말로 게송을 읊었다.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구나.
나는 오늘부터
목숨 받는 일이 끝났네.
이것은 보살의 희귀한 일이요 미증유한 법이며, 다른 방위를 향해서도 다 그렇게 하였다. 처음 탄생했을 때 사람의 부축 없이 사방으로 각각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__ 『불본행집경』 「수하탄생품」
우리 속에서 선언한 해방
“제발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누가 좀 알려주세요. 저는 정말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도 잘 들으며, 책임감 있게 제가 해야 할 일 하며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왜 아무도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제 이기적인 욕망을 자제하며 늘 제가 속한 집단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헌신하고,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제 한 몸 바쳐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개념 없이 사는 이들이 저보다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는 건 무슨 영문 때문일까요. 세상이 정당하지 못한 것 같아요. 개인적인 마음을 다스리며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산 사람이 오히려 더 지치고 외로워지는 일은 이상한 일 아닌가요.”
이러한 탄식의 말이 무수히 반복된다. 끝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담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너와 나, 관계 속에 형성되는 집단)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곧 ‘우리(감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우리라고 하는 ‘우리’ 속 고통의 목소리다. 붓다는 태어나서 이 우리라고 하는 경계를 가장 먼저 확인한다. 생물학적 부모에게서 태어나, 사회적 구조에 편입돼 이루어지는 이 사방의 경계를 직접 밟은 뒤,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구나.”
그렇게 붓다는 우리 속에서 나를 선언한다. 그 어떤 우리보다도 나를 우위에 둔다. 바야흐로 우리라는 ‘우리’로부터 나를 해방해낸다. 나아가서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내 이 몸은 오늘부터 다시 받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들어가서 태에 눕지 않을 것이다.”
더는 ‘생물학적-사회학적 우리’에 갇히지 않겠다는 말이다. 생물학적-사회학적 우리의 다른 이름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개인 안에 들어와 있는 집단적 산물이다. 비유하자면, 내면의 감옥이다. 외적 감옥의 문이 열리게 됐다 하더라도, 그 안에 갇혀 있던 개인이 쉽사리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발적 죄수’의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이 내면의 감옥 때문이다.
우리라고 하는 감옥의 경계는 이처럼 개인의 안과 밖 동시에 위치한다. 이 감옥 속 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면 추방당하거나 처벌당할 것 같은 두려움도 조장한다. 즉, 우리에 충실해야만 우리를 구성하는 집단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연명의 현실이다. 우리라는 이름의 생물학적-사회학적 집단이 마치 내 생명의 권리를 전적으로 관장한다는 착각이 만들어낸 비루한 죄수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는 사랑도 철저하게 굴절된다. 형이 집행되지 않은 채 감옥 속에서 그저 달력을 넘길 수 있게 됨을 자신이 사랑받은 경험이라고 착각한다. 이처럼 자신의 생명을 저당 잡힌 죄수의 사랑도 죄수의 정체성만큼이나 비루해진다.
붓다는 이 착각을 끊는다.
“나는 오늘부터 목숨 받는 일이 끝났네.”
더는 이 목숨이 남에게서, 우리를 구성하는 그 모든 집단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생명은 자존이다. 내 생명은 다만 생명 스스로에게서 온 것이다. 생명은 다른 존재의 명령이 아닌 생명 그 자체가 살라고 스스로 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인위적인 우리, 즉 장벽에도 구속될 수 없는 게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은 곧 자유다. 생명의 역사는 언제나 한계에 직면할 때마다 그 벽을 뛰어넘어 스스로 길을 밝혀온 해방의 역사다. 스스로가 자유로운 이 생명임을 안 자리에서 인간은 더는 감옥의 죄수가 아니다. 생명의 제일 앞선에 서서 당당하게 달려가는 해방의 기수다.
자유, 사랑, 붓다 그리고 고양이
붓다는 인간의 대표로서 생명의 자존성을 밝혔고, 자유를 노래했다. 나 그리고 당신은 우리에서 풀려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우리에서 풀려난 나로 인해 우리도 더는 그 무엇을 가둘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감옥이 아니라 사람이 그 안에서 안전하게 놀 수 있는 울타리가 된다. 자유의 현신인 나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자유가 바로 사랑의 열쇠다. 대개 우리를 우선하면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거의 예외 없이 그렇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에서 풀려난 자리, 내가 나로 드러난 자리에 있다.
“어떻게 사랑받는지 모르겠어요”라는 이 질문에 가장 잘 답하는 생명의 모습을 고양이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고양이들은 분명 그 대답을 아는 것처럼, 남의 말을 따르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산다. 아무리 숙식을 제공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이라 할지라도 고양이들은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주인인 것처럼 당당하다. 역설적으로 고양이들이 마음대로 살고 있기에, 그들의 귀여움은 증대된다. 가슴 설레게 하며,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귀여움은 사랑스러움의 원형이다. 마음대로 사는 모습에서 이 사랑스러움이 알려진다.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그 말에 따라 자기의 마음을 맡기는 게 아니다. 자기에게 알려지는 마음을 듣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응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그 온전한 모습대로 사랑스럽게 피우는 것이다.
꽃은 자기의 모습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바로 그 꽃 하나만으로 존재한다. 즉, 꽃은 복종하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이다. 이와 같다. 마음대로 사는 존재는 복종하지 않는 존재다. 복종하지 않아서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그렇다면 이렇게 선언하는 이는 대체 얼마만큼의 사랑스러움을 그 모습으로 드러낸 것일까? 붓다는 가장 남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마음대로 살았다. 왕위를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말도, 떠나지 말라는 아내의 말도, 자신의 지혜에 탄복하며 함께 수행공동체를 이끌자는 어떤 수행자의 말도 따르지 않았다.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왕의 유혹도 따르지 않았다. 끝없이 한계를 넘어서면서 지혜의 길을 향해 마음대로 살았다. 그 자유로운 생명의 길에 주저함도 없었다. 그렇게 인간인 그 자신을 ‘우리’에서 해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간인 우리 또한 감옥의 고통에서 함께 해방하는 지혜를 얻었다. 붓다는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너무나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고 있다. 인류 최고의 연인인 셈이다.
이처럼 역대급으로 큰 사랑의 역사를 끌어낸 붓다의 귀여움이란 분명 고양이와 같은 발칙한 귀여움이며, 반칙 같은 귀여움이다. ‘귀엽다’의 어원을 ‘귀하다’로 보는 관점은 유력한 설 중 하나다. 귀여운 것은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귀함을 드러낸다. 자신의 귀함을 눈치챈 이는 이제 귀한 것이 귀한대로 사랑받는 장대한 사랑의 역사를 시작할 채비를 마친 것이다.
자존감과 자존심
사람들 사이의 관계양식을 연구한 심리학자인 에릭 번은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개인의 본성이 ‘자유로운 아이(free child)’의 상태라고 말한다. 마음을 잘 느끼는 섬세한 감수성과 마음에 아름답게 응답하는 창의성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상태다. 번은 이 ‘자유로운 아이’의 본성이야말로 지혜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모와 사회가 제공하는 올바른 규칙의 영향에 의해 ‘자유로운 아이’는 점점 ‘복종하는 아이(adapted child)’로 변해간다. 이 ‘복종하는 아이’의 특성은 남의 말을 잘 듣고, 규칙을 잘 따르며, 관계에서 곧잘 순응하는 태도를 취한다. 착한 아이의 모습이다. 반면 착한 아이처럼 보이는 ‘복종하는 아이’는 고집스럽고, 적대적인 반항심을 내재하며, 인정을 갈망한다. 목마른 아이의 모습이다.
‘복종하는 아이’는 자신이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착한 아이가 되면 사랑이라고 하는 물을 얻어 마심으로써 스스로 소중한 존재로 경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실상 그가 얻게 되는 것은 채울 수 없는 갈증이다. 물을 조금 얻어 마신 것 같아도 금방 결핍을 느낀다. 그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물의 원천인 것만 같은 남을 더욱 중요하게 붙잡고 매달리게 된다. 그렇게 남의 규칙에 순응할수록 가슴은 더욱 메말라가는 악순환이 생겨난다. 불은 메마른 땅에서 더 잘 붙는다. 타인을 향한 분노나 자신을 향한 우울의 모습으로 화는 만성적인 징후가 된다. 타오르는 화 속에서, 자신을 중요하게 봐주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원망의 대상이 된다.
이로써 분명해진다.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이가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고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는 다만 누군가에게 잘 사용될 뿐이다. 돌려받지 못하며 무수히 사용된 결과로 지쳐가고 외로워진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이는 사랑받는다. 복종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이미 존귀한 자신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조건적 행위로 물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지 않는 무조건적 태도 자체가 이미 물이다. 무조건적 태도가 그 태도를 취하는 존재의 무조건적 귀함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까닭이다.
자신을 무조건 소중하게 대하니 어디에서나 스스로가 귀하게 대해지는 이 심리작용을, 잘 알려진 심리학적 용어로 자존감이라고 한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다르다. 자존심은 단지 복종심의 반대편에서 작용하는 또 하나의 의존 기제다. 반면 자존감은 대상에 대한 상대적 의존의 태도를 벗어나, 스스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조건적이며 상대적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만을 향하는 것이다. 바로 마음만을 향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추구에서(남의 말에서 벗어나), 상대에서 절대로, 조건에서 무조건으로 변한 시선이 마음을 향할 때, 구속이 풀린다. 마음은 그 모든 우리의 좁은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큰길[大路]로 향하게 된다. 표현 그대로, 마음대로는 마음‘대로(大路)’가 된다.
마음대로, 곧 좁게 쏠리지 않은 큰길의 한복판[中道]을 스스로 리듬으로 거침없이 그러나 유연하게 걷고 있는 이를, 모두가 다 주인공으로 알아본다. 가장 중요한 관심의 시선을 받는 이, 곧 사랑받고 있는 이의 이름이다.
그렇게 붓다는 나를 알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유롭게 살며 그만큼 가장 사랑받을 이가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상담자, 실존삼당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