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은 대답했다.
“한 찰제리가 있으니 본래부터 대중들이 추앙해 받들어 모셨고 세세(世世)로 전륜성왕의 씨족이요(…중략…)감자씨의 후손으로서 자손들이 대대로 저 가비라성에 머무릅니다. 석가종(釋迦種) 출생으로 그 왕의 이름은 사자협이요, 왕의 아들은 수두단왕(輸頭檀王, 淨飯)으로서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 가운데 크게 이름이 났습니다. 존자여, 그 왕의 아들이 됨이 좋을까 생각합니다.”
호명보살은 대답했다.
“좋다, 좋아. 금단 천자여, 그대는 모든 왕가를 잘 관찰하였다. 나도 그 집에 나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깊은 마음으로 그대가 말한 대로 하리라. 금단이여, 알아 두라. 나는 결정코 그 집에 가 아들이 되리라.”
(…중략…)
호명보살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삼계에 생을 받으려 함은 세간의 일체 돈과 재물과 5욕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계에 내려가 이 한 생을 받음은 오직 모든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자 함이며, 모든 고뇌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까닭이니라.”
(…중략…)
호명보살이 생각을 올바로 하여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정반왕의 첫째 대비인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머물렀는데, 그때 대비가 잠자는 동안 꿈에 여섯 이빨을 가진 코끼리 한 마리를 보았다. 머리는 붉은 빛이며 일곱 지절[支]로 땅을 버티며 금으로 이빨을 단장하고 허공을 날아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왔다. (『불본행집경』 「상탁도솔품」, 「부강왕궁품」)
마스크 속 갇힌 목소리에 담긴 우울
오늘날 세상을 뒤덮고 있는 원초적인 바이러스만큼이나, 우리의 가슴에 가득 들어선 원초적인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은 끓어오르는 기침만큼이나 힘겹게 토해진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재미도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일해도 부모 찬스 없이 성공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애초에 취업도 어렵고, 그러한 저한테 또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많고, 평생 걸려도 제가 집 하나 살 수 없는, 제 편이 아닌 이 사회를 위해 저는 또 살아야 한다며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것만 같고, 뭔가 좀 억울하고 부당해요. 그런데 또 이런 말을 하면 철없고 생각 짧은 사람으로 찍힐까 봐 눈치만 보여요. 다 같이 힘들지만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손잡고 버텨 나가는 건데, 너만 뭐 대단한 존재인 양 유난을 떠느냐고 욕먹을 것 같아 말도 조심스러워요. 정말로 이럴 거면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제가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이런 시대에는 안 태어났을 것 같아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는커녕, 저는 지금 사람도 아닌 것 같아요.”
이것은 이 시대에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시에, 가슴 밖으로 쉬이 나가지 못하도록 봉쇄되고 있는 목소리다. 마스크가 채워진 목소리다. 즉, 억압된 목소리다. 그래서 자조 섞인 한숨처럼만 힘겹게 토해지는 목소리다.
이 상태를 우울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단지 코로나19로 생긴 우울만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상황을 드러내는 단편적인 하나의 징후일 뿐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우울의 전모는, 이 우울함이 바로 존재론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존재할 수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우울하게 경험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우울 속에서 우리는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만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인간 실격의 주인공이 된다. 무엇을 해도 다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만 같다. 모든 것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게 모든 문제의 책임은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귀결한다. 자신이 잘못한 줄만 알고, 그렇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혼자 다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책임의 무게로 스스로를 짓누른다. 이것이 존재론적 우울의 상태다.
이 존재론적 우울의 상태는 사실 화가 아주 많이 나 있는 상태다. 화가 억압되면 우울이 된다. 억압이라는 것은 외부로 향하는 힘의 화살표가 내부로 반전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치게 되는 것이 억압이며, 그 결과가 우울이다.
오늘날 우울한 우리는 화가 많이 나 있다. 그러나 그 화를 조심스럽게 숨기고 눌러야 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은 감히 화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화를 내면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이 행여나 노출될까 더욱 조심스러워한다.
그렇게 화를 감추며 더 우울해진 우리는 이제나저제나 기다린다. 우리가 정당하게 화를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대상을 찾아 기다린다. 그 기다림 끝에, 대다수의 판정에 따라 악으로 심판됨이 마땅하다고 인정된 사회적 부조리와 같은 대상이 성립되면, 거기에 우리 자신의 분노를 유감없이 쏟아붓는다. 영혼까지 끌어올린 분노다.
“늘 적이 있어야 한다”라는 슬로건은 이 분노의 해방장치로서 유용하게 기능한다. 우울의 시대는 결국 분열과 혐오의 시대가 된다. 서로가 희생양으로 혼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눈치를 더욱 예민하게 살핀다. 처벌을 위한 상호 감시가 이뤄지고, 상대를 바라볼 때 그가 얼마나 똑바로 못 살고 있는지 먼저 주목한다. 그러던 중 문득, 그렇게 사는 자신이 더 못나게 느껴진다. 정말로 살기 싫어지는 시대가 된다.
존재한다는 사실을 왜 미안해하나요?
정말로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겠다는 사태는, 정말로 왜 태어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존재론적 우울에 빠져서 삶을 회의하게 된 이들에게, 스즈키 선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은 왜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안해하나요?”
이 물음에는 핵심적인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 우리가 자신을 죄인처럼 느끼며 모든 것이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 깊은 우울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작용한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보잘것없는 그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우울해진다.
스스로가 대체 어떠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망각이라고도 부르며, 무명(無明)이라고도 말한다. 왜 태어났는지를 모를 때, 즉 우리가 대체 어떠한 존재인지를 모를 때, 화가 난다. 아주 단순하다. 가까이에 있던 어떤 사물에 대해, 그 사물의 이름이 정작 기억나지 않을 때,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사물의 존재가 당연한 만큼 그 짜증의 강도는 더욱 강해진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에 대해 잊어버린 만큼, 우리는 더 많이 화가 난다. 그 화의 강도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당연한지 느끼는 그 실감의 강도와 같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하는 당연한 사실을 잊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하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이다.
세상에서 결코 부정될 수 없는 당연함이다. 당연해서 당당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의 당연함을 잊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당당함도 함께 잃게 됐다. 부족한 죄인이 됐다. 그래서 부족하게 경험되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많은 것을 탐하게 됐다. 이런저런 것들로 채워보면 존재의 결핍이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채우면 채울수록 오히려 더해가는 공허감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더욱 막막한 현실 속에 놓였다. 막막해서 화가 나고, 화를 참으며 우울해지고, 결국 살기 싫어졌다.
망각이 화를, 화가 우울을, 우울이 삶의 부정을 낳은 연쇄 반응인 셈이다. 그렇다면 역으로도 거슬러 갈 수 있다. 살기 싫어진 느낌은 현재 우리가 분명 우울하다는 신호다. 우울은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화는 우리 스스로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중요한 그것을 다시 찾고 싶어서 화가 난 것이다. 우리는 다시 당연하게, 또 당당하게 존재하고 싶어서 화가 났다.
그래서 화는 존재의 표현이기도 하다. 강한 억압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터져 나오는 존재의 가장 숭고한 표현이 화다.
그대가, 전부입니다
호명보살은 스스로 태어날 몸을 택했다. 중생 제도라는 커다란 원력으로 세속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 열 달의 기다림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의 결과로만 치부한다면, 존재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모두 불성을 간직한 붓다다. 어딘가에 감춰진 불성은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그 무엇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삶을 영위할 자격을 가진 존재다. 곧, 우리가 붓다라는 사실을 망각했을 때, 그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것이 화라고 볼 수 있다. 그 화를 누르며, 어떻게든 우리가 붓다라는 사실을 더욱 잊고자 할 때 생기는 게 우울이다.
붓다는 존재의 이름이다. 존재는 스스로 가장 귀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가장 귀한 존재의 이름이 바로 붓다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자체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가 부정할 수 없이 붓다라는 점이다. 태어난 모든 이, 존재하는 모든 이는, 그렇게 붓다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래서 스즈키 선사의 물음은 다시 한번 변주한다.
“당신은 왜 당신이 붓다인 것을 미안해하나요?”
일견 미소와 함께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생각만큼 다 아껴주지 못해서, 지켜주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해서, 자신의 존재가 미안했다. 우리는 아주 어렴풋이 스스로 붓다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붓다의 임무로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스스로 미안해졌다. 붓다를 마치 호스피스와 같은 봉사자의 역할로만 오해함으로써 스스로 미안해졌다. 그러나 붓다는 미안함의 소재가 아니다.
붓다는 이 세상을 다시 찾은 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어여삐 여기기에, 그것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다시 찾은 이다. 즉,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시 찾아온 존재다. 우리가 사랑하는 인연들의 부름으로 이 모든 것을 다시 찾아온 존재다. 수많은 인연이 우리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마음은 정말로 간절했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그렇게 우리만을 기다렸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 존재하게 된 것만으로, 웃음이 하나 더 피어난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의 감동으로 이 세상에 피어난다. “넌 감동이었어”라는 노랫말은 세상에 다시 찾아온 우리에게 전하는 감사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래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마음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됐다. 사람이 이처럼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이해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싶지 않다고 경험하는 이 아픔은, 사실 우리 아픔이 아니다. 사람의 아픔이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다시 찾기까지 하게 된, 이 사람의 아픔이다. 이 사람이 외롭지 않고 안심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있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이 사람 자신이 된다. 붓다가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아닌 이유다.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 脫同一視, 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이를 관찰하는 자기를 구분)는 진정으로 함께하기 위함이다. 붓다의 뜻은 그래서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이 되어 있는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고 또 증명하고자 이 자리에 있다. 스스로 존귀함을 향기처럼 전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스스로와 함께하고 있다.
이것이 붓다임을 기억한 우리가 해야 할 전부다. 지금 가장 근접거리에 있는, 우리 자신이 되어 있는 이 사람에게만 가장 상냥하면 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돌을 던져도, 우리는 지금 이 사람만을 위해 이 세상을 다시 찾은 사실을 이해하면 된다.
이 세상에 둘도 없을 유일한 전부인 바로 이 사람이다. 지금 이 몸을 유지하는 이 사람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어서 우리는 이 시대에 왔다. 이 사람이 힘들고 아플 이러한 시대이기에 더욱더 이 사람과 함께하고자 이 사람에게 왔다.
“네가 전부야.”
붓다는, 그대는 그렇게 이 시대에 태어났다.
글.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상담자, 실존상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