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의 주인은 하늘, 하늘은 사람을 찾는다
한 지역이나 국가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이름을 날린다거나 떨친다고 한다. 무리 중에 특별하다는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 특별한가에 따라 다르지만, 사업수단이 좋아서 물건을 만들거나 판매해 돈을 많이 번 유명 사업가,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아 나라의 동량이 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등 정치가, 그리고 개인의 지적 역량이 뛰어나 공부를 잘해서 한 분야에 우뚝한 교수·정부 관료 등 재계, 정계, 학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인간의 일이고, 모든 일은 하늘이 주관하는 믿음이고,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땅을 한치도 벗어나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명당은 하늘이 주인이지만, 하늘은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는 명당의 주인을 찾아 줄 수 없고, 사람은 하늘이 도와야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하늘은 땅이 없으면 변화를 펼칠 수 없고, 땅은 하늘이 없으면 힘을 써도 이룰 수 없다. 하늘은 사람이 아니면 의지할 곳이 없고, 사람은 하늘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天無地, 化無布於其下, 地無天, 功無成於其上。夫天不人不因, 人不天不成].”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거부(巨富)가 된 재벌기업에는 삼성, LG, GS, SK, 현대, 한화, 신세계, 효성 등이 있다. 그중에서 삼성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우뚝 선 독보적인 재벌기업으로서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한국 재벌기업의 창업자들은 전통사상 속에서 성장했고, 그들은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땅의 기운을 믿고 미래의 불확실한 사업세계에 대한 심리적 자신감을 풍수에서 찾았다. 근대 이후 전래한 종교로 인해 드러내 놓고 풍수를 찾지 못하고 은밀히 풍수전문가를 초청하여 구산(求山, 산소 자리를 구함)을 하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재벌기업은 회사가 어려울 때, 사옥·공장 부지를 선정할 때, 그리고 선영의 천장(遷葬, 현재의 묘지를 새로운 땅을 선택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나 장지를 선정할 때는 땅의 기운을 믿는 한국의 전통사상처럼 풍수전문가들을 초청해 의견을 듣고 결정한다.
특히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李秉哲, 1910~1987)은 땅의 기운으로 운명을 바꾼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그가 유년 시절 조부 밑에서 한국의 전통사상을 공부하고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병철은 경남 의령 중교리 경주 이씨 판전공 사정공파 집성촌에서 아버지 이찬우(李儹雨, 1874~1957)와 어머니 안동 권씨 재림(1872~1941)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병철의 집안은 의령에서 할아버지 이홍석(李洪錫, 1838~1897) 대에는 1,000석지기, 아버지 이찬우 대에는 2,000석지기를 하고 머슴만도 50여 명을 둘만큼 부유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홍석은 성균관 유생으로 경남 의령 중교리 생가 옆에 문산정(文山亭)이라는 서당을 세워 『천자문』,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가르치며 후학을 기르던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이다. 이병철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유년 시절 한국의 전통사상과 유교 경전을 배우면서 예절과 도덕을 배웠고, 흔히 말하는 뼈대 있는 집안에서 유복하게 태어나고 자랐다. 특히 서당에서 배운 『논어』는 인생의 길라잡이가 될 정도로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경남 의령 중교리 생가는 안산에 부자 봉우리가 있는 양택 명당으로서 지금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좋은 땅의 기운은 좋은 인연을 연결한다
이병철의 경남 의령 중교리 생가터와 마두리(馬頭里)의 증조묘소는 오늘날 삼성의 추동력을 있게 한 풍수적 대명당에 해당한다. 명당은 좋은 인연을 연결하고 흉지는 고통을 준다. 그가 본가를 떠나 삼성그룹을 만들게 되는 가장 큰 첫 발자국은, 훗날 사업을 시작할 때 도움을 받게 되는 김해(金海) 허씨 가문과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현재 지수초등학교)로 입학하면서 알게 되는 초등학교 동창들과의 만남이다.
이병철의 둘째 누나 이병윤(이분시, 1908~1991)은 경남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김해 허씨의 허만정(1897~1952)과 결혼해 진주 승산마을로 시집 가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병철은 경남 의령 중교리 마을을 떠나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김해 허씨 집안의 승산리 둘째 누이 집에서 6개월간 지수보통학교를 다닌다.
지수보통학교는 김해 허씨 집성촌이고 그 집안에서 학교에 부지를 내놓아 승산리에 지수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한국의 재벌로 발돋움한 금성 창업자 구인회(1907~1969) 회장, 효성 창업자 조홍제(1906~1984) 회장을 모두 지수보통학교에서 만났다. 그런 측면에서 금성, 삼성, 효성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재벌들은 김해 허씨의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는 구인회보다 1살이 많았고, 이병철보다는 4살이 많아서 형 이병각(李秉珏, 1906~1971)과 친구였다. 이병철은 조홍제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 갈 정도 막역했고, 훗날 조홍제는 삼성물산에 투자해서 15년 동안 함께했다. 구인회는 이병철보다 3살 많았지만, 지수보통학교 시절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훗날 구인회의 삼남 구자학(1930~)과 이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1935~)가 결혼하면서 사돈 관계를 맺었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넷째 딸 박두을(1907~2000,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조카이다)과 결혼한 이병철은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됐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36년 26살 때 부친이 준 쌀 300석분의 토지가 기반이었다. 매형과 누이가 있는 경남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축으로 운수업을 시작했다. 한때 은행대출금을 안고 경남 일대의 많은 부동산을 매입해서 대지주가 되었지만, 일제의 패망으로 은행에서 빌린 돈을 청산하고 진주의 매형 허순구의 도움으로 대구에서 다시 시작한 사업이 삼성상회이다. 광복 후인 1947년 5월 이병철은 가족과 함께 서울 혜화동 125번지로 상경했다. 혜화동 인근 명륜동에는 지수보통학교 동창이면서 일본 유학을 함께 했던 조홍제 회장이 살고 있었기에 낯설지 않은 동네였다.
이병철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부산으로 내려가 삼성물산을 세우고 전쟁으로 사방에 널려진 고철을 수입해서 일본에 판 자금으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가져와 국내에 판매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삼성물산으로 사업을 재개할 때 매형 허순구가 사업자금을 댔다. 매형의 손자 허정구는 이병철보다 1살 아래인데, 이병철과 사업을 함께했다. 이병철은 삼성물산공사에서 모은 자금으로 조카 허정구와 1953년 제일제당(CJ그룹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함께 창업했다. 조홍제는 1948년에 삼성물산공사(현재 삼성물산)에 투자해서 약 15년 동안 함께하다가 삼성물산이 한국의 최대기업이 되자 결별하고, 1962년 효성물산을 창업했다. 허정구도 1961년 삼양통상을 창업해 삼성물산을 떠났다. 이같이 삼성물산의 경제적 성장은 지수면 승산리 인연의 도움이 컸다.
풍수로 극복한 삼성의 위기
이병철 회장이 혼자서 이끄는 삼성물산은 승승장구하다 기업의 존폐 기로에선 풍전등화의 시절을 겪는다. 일명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차 경제개발 5개년(1962~1966)계획이 한창인 1964년 농민들을 위해 비료값을 저렴하게 공급하겠다며,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비료공장을 짓도록 이병철에게 제안한다. 이병철은 일본의 미쓰이 물산에서 비료공장용 기계를 많이 사고 리베이트 받은 돈으로 사카린을 저렴하게 밀수해 한국에 팔려고 시도했다. 1966년 5월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은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던 수입 건설자재와 함께 사카린 원료 2,259포대(약 55t), 일본제 양변기·전화기·냉장고 등을 밀수해 판매하려다 적발됐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그해 6월 사카린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만 원을 부과했고, 삼성은 국민적 공분을 사게 됐다.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정권의 부담이 되어 이병철은 중대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병철은 이 사건으로 삼성이 완전히 망할 수도 있는 기로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한국비료공업 이사로 있던 둘째 아들 이창희(1933~1991)는 사카린 밀수사건의 책임을 지고 1966년 9월 27일 구속됐다. 이병철은 그해 10월 22일 고육지책으로 한국비료와 경주 최부자집에서 기증받은 대구대(현재 영남대)를 국가에 헌납하고, 자신은 삼성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장남 이맹희(1931~2015)를 삼성 총수로 발표했다.
경제계에서 퇴진을 선언한 이병철은 재기를 모색했다. 위기에 처한 삼성의 앞서 일어난 일들의 원인을 조상 묘소의 풍수에서 찾고자 했다. 그래서 많은 풍수사(風水師)를 초청해 부모, 조부모, 윗대 선영들의 풍수를 살폈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관장하고 산은 인정(人丁, 대를 이을 남자 후손)을 주관하는데, 특히 어머니의 묘소는 물이 직거(直去, 곧바로 흘러나감)해서 나가기를 수 킬로 진행하여 매우 불길했다. “부모 묘소의 풍수가 불길하면 자손의 삶도 불길하고, 부모의 묘소가 편안하면 자손도 편안하다.” 아버지가 구천십장(九遷十葬, 길지를 찾아 묘소를 여러 번 옮김)했지만 끝내 혈을 구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묘소는 서울 근교 도농산에 있었다. 이병철은 여러 풍수사를 초청해 이 묘소의 풍수를 살펴보고 그동안 일련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단한 하남(河南) 선생을 지목했다. 부모와 조부모 묘소들은 풍수적으로 땅이 불길하다는 풍수적 의견을 참고, 새로운 길지를 구하고자 하남 선생에게 모든 일을 위임했다.
하남 선생은 산의 행지(行止, 용맥이 진행하고 멈추는 것)를 중요시하고 혈장(穴場, 혈을 이루고 있는 둥근 범위)의 모양을 살피는 형세풍수(形勢風水, 산의 방위보다 형세를 중시 여김)를 위주로 하는 경북 영주 태생의 명풍수사(名風水師)이자 나의 윗 스승이시다.
새롭게 구산한 길지는 정조가 수원화성을 출행할 때 지나가는 노송밭 옆이었다. 밭 옆에 있던 옛 향교 인근의 이지명선형(梨枝鳴蟬形, 매미가 배나무에 앉아서 소리를 내는 형상)의 풍수물형을 갖춘 명당이다. 이목리(梨木里)란 지명은 산줄기의 형상이 마치 배나무와 같이 길쭉하게 명당이 생겨서 붙여놓는 풍수적 지명이다. 우리 땅의 대부분의 예전 지명은 그 마을에 풍수적 명당이 어떻게 생긴 것인가를 풍수적인 물형을 취해서 그에 부합되는 풍수적 지명을 붙였다. 그래서 한자로 된 지명을 알면 그 마을의 땅의 지기를 알 수 있고, 그러한 땅의 지기를 받는 사람들의 역량도 알 수 있는 한국인 소중한 전통문화 유산이다. 일본은 이런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명가의 지맥을 절단하고, 땅의 지명도 풍수와 무관한 한자를 교묘하게 다른 글자로 바꾸는가 하면 남면, 북면, 서면, 동면 등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병철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집안의 실무적인 모든 일은 형 이병각이 주관했다. 하남 선생은 1967년 4월 5일 경기도 도농산에서 이병철의 조부를, 경남 의령 고향 생가 뒷산에서 조모를, 수원 이목리로 옮겨 합봉했다. 경남 의령 마두산의 모친도 같은 날 수원 이목리로 옮겨 부친과 합장했다. 이병철의 조부 이홍석의 비석에는 이날의 기쁨을 이렇게 적었다. “부친이 조부의 체백(體魄, 유골)을 7, 8차례 천장했지만 득지(得地)하지 못하여 애석하다고 하였다. 불초들이(이병철, 이병각)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조부를 안장하니 감격스럽다.”
조부와 조모 그리고 부모를 천장한 이병철은 1년 뒤인 1968년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5년형을 받고 구속된 차남 이창희는 6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병철은 땅의 지기를 믿고 자신만만했다. 1969년에는 수원에 142만 1,487㎡(약 43만 평)의 대규모 삼성전자 터를 구입해 본격적인 수원 시대를 여는 초석을 다졌다.
이병철은 땅의 기운으로 어려운 운명을 바꾼 사람이다. 이는 아들 이건희 회장 시대에도 계속됐다. 수원선영에는 봉분이 4개 있는데, 맨 위쪽에는 이병철의 조부모 합묘, 중간에는 부모 합묘, 그 아래는 보모 회산황씨(保母 檜山黃氏, 1896~1974)를 안장했다. 이건희 회장(1942~2020)도 이목리 선영에 안치됐다.
2014년 5월 10일 오후 이건희 회장이 자택에서 심정지로 입원하자, 삼성에서는 더 분주하게 풍수가들을 초청해 여러 곳을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장지는 이목리 선영으로 확정됐다. 이목리 선영은 풍수적으로 훌륭하고 이건희 회장에게는 어린 시절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와 보모가 묻혀 있는 친밀한 공간이다. 장례의식은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의 종교인 불교식으로 엄수됐다. 사실 삼성이 오늘날 반도체 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에는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며 정신적 스승격인 홍라희 여사의 아버지 홍진기 법무부 전 장관의 역할도 지대했다.
한국의 재벌들은 땅의 기운을 믿고 한국 전통사상의 지령인걸(地靈人傑, 산천이 수려하고 지세가 빼어나면 그 땅의 지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도 뛰어남)을 존중한다. 기업의 총수는 많은 종업원을 거느린다. 그들은 땅의 기운의 영험함을 믿고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갖도록 지금도 풍수전문가를 초청해 중요한 결정에 앞서 의견을 듣는다. 풍수는 천지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한국의 명가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이다.
사진. 유동영
민병삼
공주대 동양학과 교수.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공주대 동양학과에서 석·박사생을 지도하며, 별자리천문명리·관상학·풍수지리 관련 강의와 상담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도선국사 물형풍수』, 『유가의 풍수원리』, 『별자리천문』 등, 연구논문으로는 『도선국사 풍수사상과 풍수담론』, 「광양 옥룡사 도선국사 탑비전지의 풍수연구」, 「도선국사 옥룡사 탑비의 설립지연과 풍수정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