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전의 역사는 곧 한지의 역사이기도 하다. 1966년, 도굴 위기를 모면한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한지에 쓰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이 발견된다. 751년 조성된 석가탑 안에서 나온 것이니 적어도 1273년 전 만들어진 종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 19건 중 10건이 한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10건 가운데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물인 청주 흥덕사본의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인류 문명을 이끈 종이와 인쇄물이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경쟁력을 잃었음에도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한지 제작 현장에서 인쇄 매체의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거칠게 돌아가는 인쇄기와 잉크 냄새 속에서 현실을 절감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로 현장을 찾았다.
•본문 사진들은 종이 만들기와 인쇄 순서에 따라 배치했다.
•인쇄 부분의 글은 불광미디어의 제작 담당인 김명환 부장이 썼다.
종이 • 현재 한지를 제작하는 공방은 전국에 20곳이 넘는다. 그중 절반에 가까운 수가 전라북도에 있다. 닥나무 특성상 많은 공방이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한지 생산을 하는데, 전주 지역의 공방들은 1년 내내 꾸준히 종이를 생산한다. 그들은 종이를 팔아 살아간다. 땀방울은 잿물과 섞여 종이를 만든다. 전주 외에 원주, 안동, 문경, 청도, 청송, 가평, 괴산, 경주, 함양 등에서도 한지를 만든다.
후백제 견훤이 고려 왕건에게 부채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견훤의 주무대가 전주였던 점을 생각하면 전주 한지로 만든 부채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전주 일대에서 생산한 종이를 완지(完紙)라 불렀다.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이어서다. 조선 조정은 전주와 남원에서 생산한 종이를 상품으로 쳤다. 전주 종이가 상품인 데는 물이 좋아서라고도 하고, 나무는 얇은데 단단해서라고도 한다.
2022년 5월, 전주시는 전주 한지의 명맥을 잇고 한지 세계화의 원동력이 될 전주천년한지관을 한때 전주 한지의 메카였던 흑석골에 개관했다. 흑석골은 한국전쟁 이후 전주 한지를 대표하던 장소로 평화제지, 호남제지 등 굵직한 업체만 해도 20여 곳에 이르렀다. 전주천년한지관은 박신태·오성근 초지장이 화·수·목요일에는 종이를 뜨고, 금·토요일에는 종이뜨기 체험을 돕는 체험관, 종이를 이용해 작업하는 장인이나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관 등의 공간을 갖추고 있다. 전시와 체험 외에도 한지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젊고 활기 있는 인력들로 구성된 사무실이 눈에 띈다.
중국 종이의 수입과 한지 수요 감소로 소양, 상관 등 전주 일대에 산재해 있던 한지 공장들이 조합을 결성해 현재의 팔복동 공단 지역으로 이주했다. 당시 20개가 넘는 공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마저도 2002년경 떠나고 지금은, 용인한지·천일한지·성일한지 등 세 공방만 남았다. 전주시는 이들 중 가장 젊은 성일한지 대표를 한지장으로 등록했다. 성일한지 공장에는 어떠한 사진 촬영도 금지되는 한지 물질 기계가 있는데 이 기계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둔한 내 안목에는 그 기계보다 아들을 비롯한 세 명의 젊은이의 땀방울이 전주 한지의 귀한 미래로 보였다.
전주천년한지관의 박신태 초지장은 17세 때부터 고향인 구미에서 아버지·형과 더불어 한지 작업을 해왔다. 고향에서 30세까지 종이 일을 한 뒤 전주로 나왔다. 1991년부터 2014년까지 안덕제지 대표를 하며 평생 종이 만드는 일을 했다. 오성근 한지장은 현 전주교대 부근에서 아버지와 함께 종이 뜨는 일을 했다. 1965년 흑석골로 이사해 종이 일을 하다 입대를 하고, 군 전역하고 1년이 지나 친구의 권유로 고려특수한지 공장을 운영했다.
한지를 만드는 이들도 인쇄기를 돌리는 이들도 출판계에서 책을 만드는 이들도 모두 종이 산업의 위기를 예감한다. 산업의 규모가 작아지는 시류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 아날로그 산업이 줄어드는 것인지는 재고가 필요하다. 아날로그가 유효하다는 것은 장인은 건재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장인의 틈을 특허나 잔재주가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다. 성일한지와 전주천년한지관의 청년들에게 전주 한지의 장인을 기대한다.
활자 • 현대식 오프셋 인쇄(offset printing)는 인쇄판이 아닌(off) 종이 사이에 고무 블랭킷(앞 페이지 사진의 초록색 부분)을 중간에 두어(set) 간접적으로 인쇄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인쇄 품질을 높일 수 있다. 인쇄 과정에서 잉크의 재질과 얼마나 많은 색을 입히느냐도 중요하다. 종이의 질도 다양하지만, 잉크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컬러 인쇄는 여러 가지 색깔의 잉크가 혼합된다. 파랑(Cyan), 빨강(Magenta), 노랑(Yellow), 검정(Key plate) 네 가지 색을 사용하면 흔히 ‘4도 인쇄(CMYK)’라 부른다.
종이 한 면에 16쪽이 인쇄된다. 인쇄를 마친 인쇄물은 제본소에 전해진다. 제본소의 공정 대부분은 기계에 의해 진행된다. 16쪽 분량의 큰 종이가 1쪽씩 접히고 페이지를 나누는 기계에 들어가 내지가 묶인다. 책등에 풀이 칠해지고 표지를 입힌다. 이렇게 책 한 권이 만들어진다. 띠지는 하나하나 손으로 작업한다. 원고에서 최종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절차와 과정을 거친다. 숨 막히는 인쇄소와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제본소를 경험한 독자라면 쓸모없는 책이라 해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