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 개론] ‘바르게 보는 것’의 어려움과 화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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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 개론] ‘바르게 보는 것’의 어려움과 화두의 역할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09.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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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을 하신적 있습니까? 일의 진상이 드러나기 전까지 본인은 이것이야말로 천하없어도 진실이라고 판단했는데, 그것이 틀렸다고 판명되었을때의 허탈감.하지만아무리다시생각해 보아도,판명되기전까지는그것을바르게판단할수있을가능성이 본인에게전혀없었다는것을스스로확인하면서느꼈던난감함. 뒤이어앞으로사물을어떤자세로보아야진실을알수있을까하는 의문이고개를드는그런경험말입니다.

왜 이렇게도 진실을 보기가 힘들까?

왜우리는 이렇게도 진실을 보기 힘들까? 왜이다지도 지혜의 눈을 갖기 가어려울까? 심리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우리 마음은 진실을 볼수없 게만드는 여러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인지 부조 화(CognitiveDissonance)’와‘확증편향(ConfirmationBias)’이다. ‘인지 부조화’란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행동이 서로 일치되도록 애를 쓰는데, 둘사이의 일관성이 깨지면 심리적 불편을 겪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시 그일관성을 회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 종말을 예언 하는 종교를 믿고 그에 맞추어 열렬하게 행동한 사람들은 실제 종말이 일 어나지 않았어도 더강한믿음을 가지고 더열정적으로 그종교에 빠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믿음에 반하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났지만,그믿음을 고쳐 심리적 조화를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그증거를 부인함으로써 부조 화를없애려고하는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말 예언의 어긋남이 자신의 신앙을 신이 시험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더강한신념으로 더공격적으로 전도하기도 한다. 오히려 더강한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마음의 갈등을 해결해 버리는 것이다. 이예가사회심리학 교과서에도 실릴 만 큼, 우리는 스스로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히 놀라운 정신적 활동 을한다. ‘확증 편향’은보이는 것들 중에서 보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며, 새 로운 문제들까지도 그것에 근거하여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특히 전문가 들이 확증 편향에 사로잡히기 쉽다.

예컨대 학자들은 우선 당장 논문 실 적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가설을 확증해 줄정보만을 찾기에 바쁘 다. 특정 논객과 지지자들의 관계에서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찬동하는 논 객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내다가도 그논객이 자신들이 애초에 갖고 있었 던구도나 틀을 넘어서는 발언을 하게 되면 일시에 과격한 적으로 돌변해 버릴 수있다. 그들이 원한 건자신들이 갖고 있는 견해에 대한 ‘확증’이지 새로운사고나관점은아니라는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사례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오히려 문제가 있는 그믿음을 더욱 강화시켜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꾀하려고 하는 경향(=인지 부조화)이있다.또한사물을‘있는그대로’보는것이아니라자신 이보고싶은것만을 봄으로써 기존의 견해를 철통같이 지키며 이에 집착 하는경향(=확증편향)도강하다. 연구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측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계에서도 기존 의이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한 객관적 관측은 힘들다고 한다.

이 것을 ‘관측의 이론 적재성’이라고 부른다. 선박이나 화물차가 물건을 적 재하고 다니듯이, 관측은 이론을 항상 싣고 다닌다는 뜻이다. 과학에서도 기존의 견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맨눈으로 관측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 렵다는것을보여주는예이다. 기존의믿음과 견해와 이론에 갇혀 그것만을 파고 들어갈 때의 위험 성을잘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닭한마리가 있었는데 주인이 매일 모 이를 가져다주었다.모이를 줄때마다 닭의 믿음은 다음과 같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 ‘인간은 친구이며, 인간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모이를 가져 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생의 보편적 규칙이다.’ 그런데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이 닭에게닥친다.주인인 인간의 손에 도살당하고 마 는것이다. 열린마음을 견지하지 않고 과거의 경험과 기존의 앎에만 매달릴 때 이와 같은 일은 언제라도 불쑥 나타날 수있다. 닭의 안심이 최고점에 도 달한순간이생명의위험이최고조에달한순간임을상기해보자.

일체의 상(相)을 여읜 이가 부처다

『금강경』에“일체의상(相)을여읜이를부처라 한다(離一切諸相,卽名諸佛)” 는구절이 나온다.여기서 상(相)이란 ‘내가 나와사물에 대해파악한 모습’ 이다.이상(相)에서자유로운이,즉이상의집착에서벗어난이가부처인 것이다.위에서언급한기존의믿음과견해와이론도일종의상이다. 불교에따르면 모든 것은 어느 무엇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 뭐라 고단정적으로 말할 수없다.

이것을 ‘모든 것은 공(空)이다(一切皆空)’라고 한다.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건(=인연)에따라생했다가 멸하는변 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생겨났다가 조 건이 다하면 멸하는 것을 불교 용어로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결국 공과 연기는 동의어이다. 같은 것을 두고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었으냐에 따라 표현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가 공에 해당한다면, ‘그 렇기때문에조건에따라생멸·변화한다’가연기에해당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멸하면서 변해가므로, 미리 내려진 어떠한 결론 도갖지않고생전처음대면한 것처럼 현순간의 이것을 만날 때그진실 을볼수있다. 세상이 늘그대로이면 그에 맞는 고정된 하나의 결론이 언 제나 유효하겠지만,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잣대로만 보게 되면 판판이 어긋난다. 이러한 이유로 일체의 상(相)에서 자유로운 부처는 매 순간진실을본다.

구체적으로 진실은 언제 보일까에 대해 살펴보자. 당나라 때의 마조 (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평상심(平常心)이도(道)”라고 했다. 평상심으로 살아가는것이도(道),즉진실이라고한것이다.이말은평상심일때진실 이보인다고도 이해할 수있다. 어떤 것이 평상심일까? 마조 선사는 조작 이없고(無造作),미리예단한 옳고 그름이 없으며(無是非),목적이나 의도에 따라취하고버림이없는것(無取捨)을평상심이라했다. 마조 선사의 평상심에 대한 정의에서도 나타났듯이, 어떤 것의 진실 은순수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외의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 없이, 그래서 어떠한 조작도 없이 볼때드러난다. 따라서 본인의 성공과 성취가 블랙 홀이 되어 여기로 모든 관심이 쏠린다면, 결코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어 떤것에대해비난하거나 정당화해도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어떤 것에서 도망가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그것과 싸우거나 억누르려고 해도 보이지않는다. 예를들어‘슬픔을진실그대로보는것’이란슬픔에서벗어나고자하 는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슬픔을 억누르거나 조작하려 들지 않고, 슬픔 에대해어떤생각과 말도 끼워 넣지 않은 채이름도 모르는 뭔가를 처음 만난 듯, 그래서 ‘슬픔’이라는 이름도 없이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 속에 있는 것이다.그때진실그대로의 그것이 보인다. 행동의 지침 을얻기위해서라든가 심신 안정 등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보려 해서 는안된다.‘그냥’보는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진실을 보는 것이란 ‘내’가 없이 보는 것이요, ‘관찰자’ 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다만 진실을 알고 싶다 는순수한열정은강렬해야한다.이열정은이기적성취욕과는다르다.

화두, 진실 그대로 보게 만드는 장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진실그대로 본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자 신도 모르게 본인의 이해관계가 끼어들기 일쑤이고,이전의 방식으로만 보려는 습성이 끈질기게따라붙어어느새 자기식대로 보고 말기가 십상 이다. 진실 그대로 보려고 해도 볼수없는이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 진 실그대로보게만드는장치가바로화두라고할수있다. 1,700여개의화두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중 ‘구지수지(俱胝竪指)’ 라고불리는화두를소개한다.

구지선사(?~?,9세기경당나라 때)는대중의질문을받으면 단지손가락하나를세웠다.그절에는동자하나가있었다. 외지손님이“구지선사는어떤법을설하십니까?”하고물으면 동자역시손가락하나를세웠다.구지선사는이말을듣고 칼로동자의손가락을잘라버렸다.동자가비명을지르며달아나자, 구지선사가다시동자를불다.동자가고개를돌리는순간, 구지선사가손가락하나를세웠다.동자는홀연히깨달았다. 임종에이르러구지선사가대중에게말했다.“스승인천룡선사의 ‘한손가락선(一指頭禪)’을얻어평생썼거늘다쓰지못하구나.” 말을마치자입적했다.

당나라 때의 구지 선사는 어떤 질문을 받아도 대답 대신 그냥 손가락 하나만 세웠다. 이를테면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도, “어떻게 하 면진실을 볼수있습니까?”라고 물어도 그저 손가락 하나만 세울 뿐이었 다.‘이손가락하나는무엇인가?’이것이여기서실제로참구해야할화두 다. 이손가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불교 경전은 없다. 어느 누구도 설명 한적이없다. 수수께끼를 알아맞히듯이 불교 교리를 이용하여 답을 찾았 다가는지도자에게호되게죽비만맞는다.

이와 같이 화두는 기존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알수없는일종 의시험문제다. 따라서 화두에 대해 비난하거나정당화할 수없다. 모르 는데 어떤 점을 비난하고 정당화할 수있겠는가.알수없는문제이기때 문에 화두는 억누르거나 조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어떤 생각과 말 도끼워넣지못하게 만든다. 화두는 그야말로 이름도 모르는 뭔가를 처 음만난듯‘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고 그것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그런문제이다. 위에 열거한 비난과 정당화 등의 사항은 앞서 살펴본 대로 진실을 보 기위한필요조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화두는 처음부터 진실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문제로 우리 앞에 선다. 시뻘겋게 불에 단쇠붙이가몸에닿 는순간“앗, 뜨거!” 이외에는 다른 무엇도 없듯이, 일체의 잡생각 없이 오 직‘이손가락 하나는 무엇인가?(=화두)’하는의문에만몰입하는 것을 ‘화 두를 든다’라고한다.

화두를 드는 동안 기존의 고착된 사고방식과 자기 중심적관점은불식된다. 화두 참구가 깊어지면 나와 화두 사이에 간격이 없어진다. 둘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나에 의한 조작이라든가 해석·채색(=분별)이가능하다. 둘 사이에간격이없어질때그야말로조작·해석·채색은종식을고하고,‘나 와화두’, ‘주관과 객관’은 서로 녹아들어 완전히 한덩어리가 된다. ‘내’가 없이보는경지다. 이러한 경지를 선(禪)의전문용어로는 ‘타성일편(打成一 片)’이라 부른다. ‘한 덩어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타성일편의 경지가 이어 지다가 어느 순간 문득, 마치 등불의 심지에 살짝 불만 갖다 대어도 금방 불이 붙듯이 마침내 의문의 화두는 뚫린다. 화두가 뚫리는 순간이 진실을 보는순간이다. 이때의 상태를 송나라 때의 무문(無門慧開, 1183~1260)선사는 이렇게 표 현하고 있다. “불현듯 화두가 터지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진동시킨 다. …생사의 벼랑 끝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유자재하고, 어디에(六道) 무 엇으로(四生) 태어나건해탈무애한삶을산다.” 땔감을더이상넣지않으면불은꺼진다.누가자신에게바보라고했 다. 이“바보야”에 대해 분을 참지 못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이 바로 화를 돋우는 땔감들이다.

하지만 중생의 마음은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이, 아편 중독자가 아편을 갈구하듯이 화를 돋우는 땔감들을 찾고 갈 구한다. 자신을 향해 날아온 비난의 부당함과 그말을한사람이 대가를 치러 야할이유에 대해 우리는 나름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과 정에서자신의목적에맞는증거와사례만을찾을가능성이매우크며(=확 증편향),보복의 정당성에대한믿음을 배가시켜 보복 행위를 합리화할 가 능성도 매우 크다(=인지 부조화).때문에 비난에대해자신이 만든이야기는 모래 위에 지은 환상의 성과 같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능성을 무시하며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이야기를 더정교하게 만든다. 이야기가정교할수록 상대에 대한 증오의 장치는 견고해지며 증오는 더 깊어져장기화된다. 우리의정신은 이와 같이 본인이 만든 거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 고우리는 그속에산다고 할수있다. 이이야기들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 나면 우리는 불편해하고 그일을자신의 이야기에 맞추려고 애쓴다.

게다 가노벨상 수상자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지적한 대로 ‘우리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는 기계이다’.우리는 얼른 믿고 급하게 확정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편협한이야기로성급하게결론짓고행동한다. 화두를 들면 쓸데없는 이야기 만들기와 거기에서 어정대는 일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무문 선사는 말했다. “쓸데없는일에마음이 걸리지 않 으면, 그야말로 인간 세상은 호시절.” 쓸데없는 이야기가 멈추면 진실 그 대로 볼수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화두를 지속적으로 들어내공이 쌓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도 진실 그대로 잘직시할 수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진실 그대로 보는 것이니화두를 드는 마음 으로생활하면눈앞의하나하나가진실그대로보이기시작한다. 이제 ‘밉다’라는 생각이일어나면, ‘밉다’에대해이야기를 만들지 않 는것이좋다. 그대신, ‘밉다’에서벗어나려는 어떠한움직임도 없이,‘밉 다’를 억누르거나 조작하려고도 하지 않고, ‘밉다’에 대해 어떤 생각과 말 도끼워넣지않은채이름도모르는뭔가를처음만난듯,그래서‘밉다’라 는이름도 없이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 속에 있는 것이 바람직 하다.

이것은‘밉다’라는화두를드는것과같으며,‘밉다’의진실을그대로 만나는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천재는 묻고 또어리석게 물어 더이상물을 기력도 없는 막장에 존재한다. 천재는 막장까지 고 가는 수정처럼 순수한 혼 과대책없는뱃심의 소유자이다.’구지선사의 화두, 이손가락 하나는 무 엇인가?

 

장휘옥

부산대학교사범대학화학과졸업.동국대불교학과로학사편입하여석사과정 졸업.이후일본도쿄대학(東京大學)대학원에서화엄사상으로석사・박사학위를받고 동국대사회교육원교수로재직.『불교학개론강의실1,2』,『무문관참구』(공저),『새처럼 자유롭게사자처럼거침없이』등10여권의책을썼으며,『중국불교사』등을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문학과졸업.동국대불교학과로학사편입한뒤,유식사상을전공으로 석사・박사학위취득.일본에유학하여교토대학(京都大學)대학원에서불교학박사 과정을수료하고,동국대사회교육원교수로재직.『인문학을좋아하는사람들을위한 불교수업』,『길을걷는자,너는누구냐』(공저),『무문관참구』(공저) 등이있다.
 

장휘옥ㆍ김사업 두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오곡도로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수행했으며,2003년부터는간화선 수행에만전념하여일본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1,000여회에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있다.

글. 장휘옥 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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