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백제와의 일대결전을 앞두고 상감 이하 유신 장군과 오만 대군이 서라벌을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상감은 출정에 앞서 만조백관을 모아 놓고 조칙을 내린다.
"우리 신라 사직의 사활을 좌우할 이번의 대결전을 치루기 위해 우리는 이미 당나라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음은 경들이 익히 아는 바이니라. 이 결전을 독려하기 위하여 과인이 진두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느라. 경들은 과인 대신 원효 태사를 모시고 전쟁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수행하여 주기 바라노라. 국정에 대한 모든 권한은 원효 태사에게 일임하고 태자를 태사의 보좌관으로 삼노니 경들은 충성을 다하여 기어코 승전고를 울리도록 하기 바라노라."
상감은 옥새를 내오라 하여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원효에게 내어주고 이어 상감이 친히 차던 보검을 원효에게 건네어 주었다.
"이 옥새는 과인을 대신하는 표증이고 이 보검은 후방군 총수의 대임을 위임하는 상징이다. 만일 태사의 뜻에 거역하는 자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곧 참형에 처하시오."
이어 태자 법민(法敏)을 향하여 말했다.
"너는 장차 대업을 이을 태자임을 명심하여 태사의 명에 따르고 태사를 도와 서라벌를 지키기 바란다."
"예, 분골쇄신 하오리다."
나이 젊은 태자는 상감의 명을 받고 머리를 조아린다. 조회가 파한 뒤 유신장군은 원효를 따로 만났다.
"백제와 탐라국(耽羅國)은 오래 전부터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은 나라인만큼 백제가 공격을 받으면 필시 원병을 보내어 서라벌을 노릴 것이요. 또 왜국도 우리 신라와는 이웃이면서 적대시하는 처지이지만 백제에는 스승의 예로서 대하는 사이이니만큼 이들도 반드시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니 왜국의 내침을 예방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요."
"예, 각별 유의하겠습니다."
"서라벌에 겨우 3천의 군사를 남기고 더나려니 마음이 안 놓이는군요. 곧 각 사찰의 젊은 스님들을 총동원하여 군무에 임하도록 조처를 취하시오. 이는 상감께서도 승낙하셨으니 지체 마시고 결행하시오."
"예, 곧 조처하지요."
"태사께서 무슨 분부는 없으시오?"
"분부라기보다는 부탁이 하나 있소."
"말씀하시오."
"백성들에게는 적은 피해도 되도록 입히지 말기를 전군에게 엄히 명령을 하달하시오."
"명심하겠고."
"혹 기회가 있으시면 고대산 보덕 화상에게 문안을 전하여 주시오."
"예, 잊지 않겠소이다."
상감을 에워싼 오만 대군이 서라벌을 떠난 뒤, 원효는 신라의 제사찰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전 승려는 호국의 대임에 임하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황룡사와 분황사, 흥륜사 등 서라벌의 십대 사찰에 총집합하도록 하였다.
원효가 태사가 되자 서라벌 근방의 승려들은 모두들 기뻐하던 차라, 원효의 동원령에 17세부터 45세의 승려들은 일주일 안에 3만 명이나 모여들었다. 원효는 승려들을 승군(僧軍)이라 하여 따로 조직을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어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려 17세부터 45세까지의 남자들을 서라벌로 모아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창검술과 궁술, 말타기 등의 군사훈련을 가르치고 나머지는 일선부대로 군수물자를 나르도록 하였다. 승군 중에서 출중한 승려는 후방군의 각 부대에 배속하여 지휘관들인 화랑(花郞)의 윗자리에 앉히고 군사들의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게 하였다.
이들의 승려낭도(僧侶郎徒)는 멀리 진흥왕(眞興王) 시대부터 있어온 제도이다. 또 화랑제도(花郞制度)도 진흥왕이 창시하였으며 화랑도(花郞道)의 단체에 승려낭도를 두어 낭도들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게 한 것이었다.
진흥왕은 재위 36년 동안에 많은 일을 하여서 신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이다. 한수(漢水) 이북의 고구려 땅을 공략하여 임진강 이남까지 진출하였고 동쪽으로는 함경도까지 그 세력을 뻗쳤으며 백제의 위덕왕(威德王)도 진흥와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아무튼 진흥왕이 국위를 떨치게 된 원동력은 불교를 신봉한 데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만년에 왕위를 내어 놓고 출가하여 삭발위승(削髮爲僧)하였음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신심이 두터웠는가를 가히 짐작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흥왕 이후의 역대 왕들도 모두 신앙심이 두터웠고 진흥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영토를 넓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진흥왕이 창설한 화랑제도는 전국에 확대되었고, 원광 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과 추항( 項)에게 일러준 세속오계(世俗五戒)는 곧 화랑도의 계명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화랑도는 나라의 주축을 이루는 단체로 성장·발전하였던 것이다. 원효가 승려낭도를 각군에 배치한 것은 새삼스러운 제도가 아니었으므로 어던 애로점이 일지도 않았다.
원효는 후방 병력을 5만 명 선으로 확보하여 그 중에 2만 명은 서라벌 주위에 배치하고 나머지 4만 명은 왜국과 탐라국의 침입 요로에 주둔시켰다. 백제를 공략 중인 신라군은 왕과 유신 장군이 인솔한 5만 대군의 증원을 받자 승승장구하여 황산벌에까지 진격 중이라는 소식이 왔다. 이 무렵, 남해안의 금관성(金官城) 앞바다에 왜적이 상륙하였다는 급보가 날아왔따.
태사 원효는 태자 법민을 불렀다.
"왜적이 침노하리라는 것은 유신 장군도 예견하였던 바였는데 기어이 상륙하여 서라벌을 향해 북상하고 있다 하니 불가불 내가 나서야겠으니 태자는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지키라."
이렇게 분부하고 장락전으로 향하였다. 장락전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갑옷과 말을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그는 요석 공주에게도 간단히 설명한 다음 곧 갑옷을 입었다.
요석 공주는 원효가 화랑시절에 무예에 뛰어났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출정하는 데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갑옷을 입은 늠름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든든해지기조차 하였다.
"저만한 대장부시니…."
혼자 중얼거리듯 말끝을 흐리니 원효가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소."
"옛날을 회상해 보는 거예요."
"나의 옛날을 알기라도 하오?"
"예, 귀동냥하여 약간 알고 있지요."
"…."
"무산 싸움에서 친구 분의 부자와 종복을 적진에 들어가 안아 오신 의리의 사내였다는 것을…."
"내 그때 친구와 더불어 목숨을 나라에 바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지금도 뉘우치고 있거니와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기억해 주는거요?"
"아녜요. 승만대왕마마께오서도 그 당시의 무용담을 여러 차례 말씀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이 몸도 그때의 원효 화랑을 은인으로 모셔왔구요…."
원효도 거진랑(擧眞郞)과의 교우관계를 새삼스러이 추억하며 감회에 젖는다.
"인간은 모두가 인연법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거지요. 지금 내가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두 옛 친구와의 인연에서 싹텄던 게 아니겠소? 우리는 세세생생을 한 수레바퀴에 몸을 담고 만났다 헤어졌다 하여온 거요."
"저는 이후로 원효 대사와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헤어지지 않는 것두 역시 인연이구…."
원효와 공주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어떠셔요? 산문에 계시는 거와 여기 왕궁에 계시는 거가요?"
"마음이 열린 이는 가는 곳마다가 자기에 맞는 도량이 되는 거고, 마음이 미혹한 이는 비록 산문에 앉았더라도 세속이지요."
"아- 예…."
"그럼 다녀오리다."
원효는 하룻만에 3천의 군졸과 함께 금광성에 닿았다. 왜군은 금광성 서쪽산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타고온 배와 연결하여 일대 장사진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태사 원효를 맞은 신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당장 적군을 섬멸하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금관성주 들어보시오."
"예."
"왜군이 저 산에 포진한 지가 며칠이나 되오?"
"예. 오늘이 닷새째 되나 봅니다."
"음-."
왜적이 만여 명이나 되면서 진을 치고 동병하지 않는 점이 수상쩍었다.
"저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필시 후속부대를 기다리는 모양이오."
원효는 즉시 영을 내린다.
"금관성에 일만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각 해안선에 배치하시오."
그는휘하 지휘관들에게 일일이 계책을 일러 주어 보냈다.
원효는 왜병의 중원군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도 탐라국 병사들과 합동작전을 펼 가능성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탐라국에서 가까운 해안선에 주로 병력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군사들을 떠나보낸 다음, 그는 곧 왜적을 물리칠 계략을 세웠다. 바다에서 산의 주둔지까지는 십여 리는실히 되었는데 원효는 이 장사진을 시찰하고는 각 지휘관을 한 자리에 모았다.
"누가 저 왜군을 깨뜨릴 계략을 말하겠소."
지휘관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은 육전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해전을 겸한 싸움은 치러보지 않았으므로 선뜻 나설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왜군과 해전을 하여야 하니 좀 두려운 모양이요만 해전을 하기에 앞서 저 장사진을 깨뜨리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는 법이오."
본시 뱀처럼 길제 진을 친 것을 깨자면 먼저 수미가 상응하지 못하도록 허리부분을 쳐야 하는 법이오."
금관성의 성주가 말한다.
"수미(首尾)와 허리를 치자면 군사를 삼분해야 하는데 일만의 병력을 나누면 힘이 약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의 병력도 일만이니 그리 염려할 것은 없을 줄 아오. 해전을 맡을 군사는 내 이미 따로이 마련해 놓았으니 조만간 소식이 올 것이오.
여기 군사를 둘로 나누어 허리를 치는 것과 함께 성을 공략하시오."
금관성에는 천 명의 군사만 남겨두고 구천 명의 군사를 둘로 나누어 곧 출동하였다. 원효는 탐라병이 오기 전에 왜적을 무찌를 것을 목표로 삼고 대공세를 취했다.
- 계속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