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나귀타고 시어머니는 고삐를 끄네 Ⅱ
지난 호에ㅅ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무심(無心)한 선적(禪的)경계에 대해서만 언급했으나 정말로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진심으로 극진히 봉양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데에는 역시 아들의 진지한 노력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즉, 아들이 '처가와 변소간은 멀수록 좋다!'라고 하는 옛말을 과거의 잘못된 전근대적인 관습으로 돌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고이 길러 시집보내신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친부모님처럼 보시고자 하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평소에 살아간다면 아내는 남편의 그 진심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더욱 극진히 시부모님을 모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즈음은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하나나 둘을 낳아 기르는 것이 젊은 부부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신부기려아가견(新婦騎驢阿家牽)의 정신이 더욱 절실해져가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정신을 잘 살린다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대립의 관계가 아닌 상호 협력의 관계를 통해 보다 원만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조계종 총무원과 선학원
한편 요즈음 뜻있는 불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 조계종 총무원(總務院)과 선학원(禪學院)과의 분쟁도 이런 차원에서 화합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만 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보기에 개혁에 뜻을 둔 총무원 스님들이 우선은 종단 내에 더 시급한 일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데도 일제 시대때 불교의 항일운동의 보루였고 해방 후에는 정화운동의 산실이었으며 근대한국불교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사단법인 선학원과 정관 개정을 둘러싸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기사를 접하면서 그저 한심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도 앞의 화두처럼 총무원이니 선학원이니를 떠나 서로 기꺼운 마음으로 화합할 때 매듭은 저절로 풀리리라 확신한다. 요즈음 정부를 보라. 세계화니 어떠니 하면서도 정부기관은 안 썩은 데가 없으니 이러고도 세계화가 제대로 추진될 수 있겠는가! 내 견해로는 아직은 총무원 내부의 개혁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되며 이렇게 할 때 오히려 선학원과의 문제도 더 빨리 그리고 보다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로 조계종 사찰의 경영합리와 차원에서 평소에 내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스님들의 노후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 보기로 십여 년 전에 알게된 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기로 하겠다.
그 당시 이 스님은 50대 후반이셨는데 젊어서 선방생활을 십수 년 하시다가 이 절 저 절 주지로 다니셨는데 그러다보니 제자들도 별로 길러내지 못하셨고 이제는 지금 계신 절의 주지직을 물러나면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주지를 맡고 있는 현재의 사찰과 가까운 시내에 (신도들이 시주한 돈으로) 개인 명의의 포교당을 하나 지어서 은퇴한 후 그곳에서 소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한편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시의 총무원의 상황으로 보아 주지직을 그만두면 정말 오갈 때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측은한 생각이 들면서 하루 빨리 제도 개혁을 하여 제자리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신부님들이 정년이 되셔서 본당 신부직(불교에서는 주지직)을 은퇴하시게 되어도 소속 교구나 수도회를 통해 노후가 철저히 보장돼 있다고 한다. 은퇴 후 세상을 뜨시는 날까지도 신부로서의 신분은 계속 유지하면서 신자와 후배 신부들로부터 꾸준히 존경받으면서 기도와 봉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체계가 잘 잡혀있는 것이다.
이번 호부터는 수행일지(修行日誌)는 생략하고 내가 종달 노사께 입실해 점검받았던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계속해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찬찬히 살펴 날아가는 새 발자국을 그린다(縱觀寫出飛禽跡)
종관사출! 비금적!을 우주가 떠나갈 듯한 기분을 가지고 마음 속으로 크게 외치며 한동안 앉아보라. 문득 모든 것이 스스로 자명해지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요즈음은 첨단과학시대라 망원경과 소리를 모으는 장치를 이용해 산이나 강가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서도 멀리서 생생하게 관찰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하늘을 날아가는 새 발자국을 그리기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결국은 꾸준한 수행을 통해 상대를 떠난 절대의 견해(見解)가 열려야만 가능하다.
천천히 걸으면서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는다(徐行踏斷流水聲)
서행! 답단유수성!을 외치며 한동안 앉아 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가까운 계곡을 몸소 가 보라. 모든 것은 자명해지리라. (부디 언구에 걸리지 마라.) 1987년 9월 연구차 미국에 일년간 갔었는데 마침 연구결과도 잘 마무리 짓고 하여 1988년 봄 잠시 휴가를 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간 적이 있었다. 배를 타고 폭포 한가운데로 가는 동안 십수년 전에 투과했었던 '서행답단유수성'의 경계가 더욱 확연히 열리면서 어느새 나와 폭포 아니 전 우주가 하나가 되어 버렸던 체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고로 이 화두와 관련되어 최근(1995년 2월 1일) 출간된 고은 선생의 시집 『독도』 가운데 '폭포'라는 제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폭포 앞에서
나는 폭포 소리를 잊어 먹었다 하
폭포 소리 복판에서
나는 폭포 소리를 잊어 먹었다 하
언제 내가 이토록 열심히
혼자인 적이 었었더냐
오늘 폭포 앞에서
몇십 년만에 나 혼자였다 하
나는 평소에 고은 선생의 글을 좋아해 선생의 책들을 거의 다 읽었으나 늘 아쉽게 느끼는 점은 이 시에도 나타나 있지만 '나'가 너무 강조돼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만일 선생께서 승려 생활을 하시면서 겪으셨던 소중한 체험들을 단지 글 재료로만 활용하실 것이 아니라 다시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매일 꾸준히 참선수행을 하시면서 글을 쓰신다면 쓰시는 글자 한자한자가 다 살아서 꿈틀거릴 것이라 확신하다. 그리고 이렇게 도리 때 이 '나'를 철저히 놓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때 비로소 서행답단유수성의 경계는 뚜렷이 서게 될 것이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날 때 다리는 흐르는데 물은 흐르지 않는구나(人從橋上過橋流水不流)
다리를 틀고 앉아 인종교상과! 교류! 수불류! 를 크게 외쳐라. 한동안 진땀을 흘리노라면 모든 것은 자명해진다. 그래도 경계가 서지 않으면 물이 흐르는 다리 위를 무심(無心)히 지나가 보라.(부디 언구에 걸리지마라.)
보통 선문답은 상식은 세계를 초월하여 분별심과 망사에 의한 상대적 견해에서 벗어나 절대적 인식으로의 지향을 중요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통은 고정되어 흐를 수 없는 다리는 흐르고, 흘러가고 있어야 할 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다리는 흐르는데 물은 흐르지 않는구나' 라고 하는 양무제 때의 부대사가 읊었던 게의 한 구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모순된 표현을 뒷날 화두로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자! 어떻게 하면 상대적 견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남산꼭대기(南山絶頂)의 외짝손(隻手)
남산꼭대기의! 외짝손! 을 외치며 한동안 앉아 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남산까지 갈 필요도 없이 동네의 가까운 동산이라도 올라가 보라. 누구나 단박에 경계가 뚜렷해지리라 확신한다.
참고로 남산은 서울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예로부터 서울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왔으나 이제는 주먹구구식의 개발로 인해 주위 경관이 너무 훼손되어 버렸다.
그런데 서울시에서 이제 정신을 차려 다시 가능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니 반가운 일이나 제대로 실천에 옮겨질지 우리 서울 시미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잘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 화두는 비단 남산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끔 산을 올라간다. 요즈음은 등산객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들로 뒤덮여 정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내 경우 산을 좋아해 가끔 등산을 하는데 산을 올라가는 동안 힘들어 쉬면서 뒤를 돌아볼 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산 아래의 광경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 마음이 보이는 광경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 맨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두루 사방이 확 트이며 사방의 정경이 내 눈에 들어올 때의 그 기분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즉 온 몸이 통째로 보고 있는 눈 자체〔通身是眼〕인 무심의 경계를 늘 새롭게 체득하곤 한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