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열한 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문 _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는 어떻게 계발해야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 _ 위빠사나의 통찰은 삼법인(三法印), 즉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자아(自我)가 없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하는 지혜입니다.
이 통찰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존재가 어떻게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며, 그 본성을 실제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생멸(生滅)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과 그 변화들을 현미경으로 보듯 세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상태 중 하나를 관찰대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마음챙김(sati)해야 하며, 만일 관찰대상을 놓치게 되면 되찾아오고, 아예 잃어버리게 되면 다시 새로운 대상을 택해 수련을 이어가면 됩니다.
수행 시에는 지혜 계발을 염원하거나 어떤 특정한 상태를 원하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현재’의 몸과 마음상태를 각기 분리해서 개별적으로 관찰하십시오.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등의 인위적 통제는 통찰력을 저하시키므로 자연스럽게 수련해야 하며, 어떤 행위이든 행동하기 전에 그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여 고통이 모든 행위의 원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통찰 지혜는 진리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正見]하여 깊이 숙고[正念]한 다음, 삼법인을 사념처(四念處: 身곢�心곚� 수행을 통해 실제로 체득함으로써 구현됩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삼법인의 통찰을 방해하는 장애요인들도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상(無常)의 통찰을 방해하는 것은 현상의 급속(急速)한 연속성입니다.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생멸하는 오온(五蘊: 色곢�想괋펯識)의 연속과정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생멸현상은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지므로 미처 알아차리기 어려워, 몸과 마음이 확고하게 상주(常住)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마음챙김 수련을 통해 매 순간 오온의 한 집합이 일어나 사라지면, 곧바로 새로운 집합이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생멸함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알아차림을 통해 정신작용에서 야기된 육체적 운동인 파동(波動)의 진행과정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일례로, ‘일어서려는’ 의도가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일으킨 파동의 과정이 일어서는 육체적 동작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일어서는 동안에도 매 순간 급속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들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무상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일어서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기실 정신적 작용에서 비롯된 파동의 진행이 만들어낸, 일어서는 동작의 정신적, 물질적 집합에 불과하다는 ‘무아(無我)’의 지혜 또한 깨우칠 수 있게 됩니다.
이 같은 무아의 통찰을 방해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더없이 소중한 불변의 일체(一體)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불변하는 인격적 실체나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의 본성은 비어 있으며, ‘나’나 ‘나의 것’도 실재하지 않기에 사물이나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거나 지배할 수 없음을 통찰수행을 통해 깨우쳐야 합니다.
고통의 통찰을 방해하는 것은 오온의 본성인 고통이 항시 우리를 옭아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無智)입니다. 일례로, 좌선 시에 통증이 일어나 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통증에 집중한다면, 고통을 싫어해 소멸시키려는 욕구를 일으켜 마음의 균형[中道]이 깨져버립니다. 때문에 고통이 일어나도 제거하려 들지 말고 단지 고통의 알아차림에만 마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몸의 자세나 동작을 바꿀 때마다 그 변동의 내재적 원인이 고통임을 인식하게 되면, 어째서 고통이 모든 존재의 근본 특성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원인을 인식하여 현재의 대상을 알아차리면 존재의 본래 특성이 드러남을 유념하십시오.
원인을 인식한 ‘현재’의 알아차림만이 진리를 드러낸다
통찰수행(위빠사나)의 핵심은, ‘현재’ 몸의 자세겣오方�마음상태의 특성들을 면밀히 관찰해 그 개별적 특성들을 명확히 구별함으로써 어떤 형태의 몸이고 마음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떤 형태를 관찰하는 즉시, 그것이 몸의 양상인지 마음상태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좌선수행 시의 가부좌 자세를 관찰할 때도, 앉은 자세가 마음챙김 대상이고 그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의 상태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앉아 있는 몸’은 한 덩이의 상주(常住)하는 ‘나의 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의 한 형태에 불과함을 체득할 수 없다면 올바른 수행이 아닙니다. 매 순간 변화 생멸하는 오온의 독특한 특성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단어도 익히지 못한 채 문장을 읽으려드는 격이므로 수행은 단지 시간낭비가 될 따름입니다. 올바른 알아차림을 체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용맹정진하고 깊은 선정에 이른다 해도 지혜는 발현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 상태의 각각의 특성들을 명확히 통찰하려면 먼저 관찰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거부감부터 뿌리 뽑아야 합니다-객관적 시각으로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집착이나 거부감이 관찰대상을 슬며시 밀어내게 되면 ‘현재’의 관찰대상에 더 이상 마음을 집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만이 마음의 오염을 막아 진리를 드러낼 수 있음을 늘 명심하십시오. 하지만 실제로 현재의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그것에 마음챙김을 유지하기는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앉은 자세를 관찰하다 어느 순간 마음의 평화를 맛보게 되면 어느새 앉은 자세의 본질에 대한 마음챙김에서 빠져나와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한 대상에 마음집중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욕망에 의해 가공된 대상은 실제 체험이 결여되어 진리에 닿을 수 없으므로 통찰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듣거나 보는 것도 단순히 마음의 상태나 과정일 뿐,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보고, 듣고, 앉아 있거나 고통을 받는 것이 ‘나’라는 미망에서 벗어나 통찰수행 시에 몸과 마음 상태 외에 다른 것이 섞여 있는지를 예리하게 점검하면서, 오온이 매 순간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관념이 아닌 직접 체험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다름 아닌 붓다의 진리(眞理)입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의 현상에서 끊임없는 생멸(生滅)을 보게 되면, 그 연속적 생멸을 야기하는 업(業)의 본성이 고통임을 알아차리게 되므로 두려움과 환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진저리나는 생멸의 굴레를 벗어난 완벽한 평화의 자리인 열반(涅槃)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일게 마련이므로, 점점 더 깊은 통찰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열반의 문으로 인도하는 3개의 길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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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양 _ 한국외국어대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문학과 예술사를,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오랜 기간 저널리즘에 종사하면서 전문지 및 출판사 편집데스크 등을 역임했으며, 수행에 관심을 돌려 불교·명상서를 번역 출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