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불자란 말이 이제는 스스럼없이 쓰이게 되었다. 몇 해전만 하더라도 이 말을 쓰려면 상당한 부담감이 왔다고 선배들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자랑스럽게 떳떳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안 된다는 사실은 아직도 완전한 신앙으로서의 불교에 젖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의 소치만은 아닐 것이다.
어려서부터 물질문명의 효율적인 지배하에서 돛대도, 삿대도, 방향타도 없이 지구 저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따라 힘없는 노를 저어왔던 것이다. 배금주의, 금권만능주의, 기회주의의 대해를 표류하는 중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불교라는 항구에 닻을 내린 우리 대학생 불자들이다.
그들이 맞닥뜨리는 첫 번째 난관은 자기자신들의 의식구조와의 싸움이다. 너무나도 서구화, 물질화 된 우리들의 사고 패턴으로서는 이해하기에 어느 정도 깊은 저항감이 들기가 일쑤다. 얄팍한 세간의 알음알이로 따져 이해가 맞지 않으면 배척하는 젊음의 혈기 때문이요, 체험할 수 없을 때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경험적 합리주의의 병통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苦. 集. 滅. 道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간을 버린 채 피상적인 죽은 앎보다는 그렇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한 근본적이고도 심층적인 산 앎이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그러하듯이 체험을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여기서 맞닥뜨리는 두 번째 난관이 신심에 대한 태도이다. 각 개인 개인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개개인의 획일적인 신심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8만 4천 법문을 설하시지 않으셨던가? 다만 한 가지 깊은 마음을 기울여서 살펴볼 것이 있다. 그것은 열반경에서 말씀하신 일체중생 개유불성설이다. 모든 중생이 노력만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완전한 진리의 상태, 부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을 통한 철저한 종교적 수행으로 진리를 체험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하나 종교적 수행을 통한 진리의 체험이 다만 체험을 위한 체험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사상에 2대 문제, 내지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인간들은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요, 우리 인간들이 살고있는 이사회가 이루어야할 이상적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일러 경전에서는 전자를 중생성불 후자를 정불국토(淨佛國土)라 표현하고 있다. 불성의 중생이 종교적 수행을 통하여 본래 있는 불성을 개현하는 것이 전술한 진리의 체험이리라.
한 사회의 전 구성원이 성불할 수 있다면 맑은 불국토의 건설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도 분화된 사회에서 사회의 전 성원이 성불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종교의 사회에 대한 기능이 중요시되며 또한 종교인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대자대비에 의한 중생구제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중생구제를 통한 맑은 불국토의 건설 또한 종교적 수행을 통한 진리의 체험 못지 않게 중요시되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크나큰 목적일진데 양자를 구별할 수 없으며 상호 보충적인 차원에서 조화, 융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교인들의 진리체험에의 안주만을 향유하는 현실을 볼 때 우리 학생불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안타까운 발걸음을 무작정 내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2500여년을 통해 면면히 뻗어 내려오는 부처님 법 가운데는 생명을 키울 감로가 분명히 있다는 신념으로 산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착실히 희망찬 일보 일보를 내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