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시인(詩人)들은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으로 인하여 장시(長詩)를 쓰는데도 단숨에 써내는 예가 있다. 「마이클 머클루어」는 한번 시를 쓰면 전혀 수정을 하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으며 「알렌긴스버그」도 이와 같은 고백에서 인쇄로 16페이지가 되는 시를 하루 오후에 타자해 냈고 인쇄로 3페이지가 되는 「해바라기 경문(經文)」을 불과 20분 걸려 썼다는 것이다.
예술 없는 예술, 시 없는 시는 바로 선의 예술이요 선의 시다. 또한 가장 표현력이 강한 선시는 언어가 없을 때이다. 선시(禪詩)는 말을 하지도 않고 않지도 않는 상태에서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선화(禪畵)나 선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생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17세기에 일본에서 완성한 언어 없는 시「하이구」는 선시의 한 형태로서 좋은 예가 된다. 17음절의 「하이구 」배구(俳句) 어떻게 보면 시제 같기도 하고 혹은 시의 시초 같기도 한 짧은 시로서 잘된 「하이구 」는 독자의 마음의 호수에 순간적으로 던져지는 돌과 같이 독자의 모든 기억과 사념을 완전히 떠난 순간적인 생의 소리가 된다. 송(宋)대의 선화는 주로 자연 풍경을 테마로 하고 있다. 산수, 안개, 바위, 소나무, 새, 대나무 그리고 공간, 이 자연에 사람이 속해 있고 사람은 이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공간은 선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고 있다. 어느 선화에는 정신이상자 같이 헌 누더기를 걸치고 바보스럽게 웃고 있는 은둔 인이 있기도 하다. 이는 선적인 생활의 「공」을 그린 것이다. 뜻 없는 세월, 뜻 없는 생, 목적의식이 전무한 생활, 행복스럽게 보이는 정신이상자의 아무의미 없는 중얼거림,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선사의 모습 등은 다 이런 것들이 선화에 선택된 주제들이다.
「나르는 기러기는 자기의 그림자를 떨어뜨릴 뜻이 없고 장장히 흐르는 강물은 그 기러기의 그림자를 받아드릴 생각이 없네.」하는 선구가 있다. 그러나 선 예술의 형태가 완전히 우연에 맡겨지는 것은 아니다. 선화나 선시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자연의 일부분 같이 보이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원적인 사고방식이 없음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대립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정신의 창조적인 힘은 식물이나 기타 생물들의 자체형성과 같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적인 테크닉이란 자연발생적인 속에서의 수련이고 수련 안에서의 자연발생성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미의 소위 개방 시도 선시나 선예술과 흡사한 동기에서 이루어진다. 아무 목적의식이 없이 떠도는 히피들의 생활, 생각이 가는 데로 말이 흐르는 데로 기록하는 그들의 시는 분명 시가 아닌 시다. 「알렌긴스버그」의 「아메리카」는 그 좋은 예의 하나다.
「아메리카 내가 하는 바를 내가 안다고 다구치질 말어.
아메리카 오얏 꽃이 지고 있어
난 여러 달 신문을 읽지 않았어 날마다 누가 살인했다고
재판을 받는군,
아메리카 난 노동자들에게 센티메탈해
아메리카 난 어렸을 때 공산주의자였지만 후횐 안 해
나는 얻어걸리면 언제나 마리화나를 피지
나는 며칠이고 집에 앉아 골방의 장미를 응시하지
차이나타운에 가면 취하고 하지만 자진 않어
내 마음은 무슨 변이 나리라고 작정이 되 있어
(김 종길 미국의 개방시론 문학사상 1973년 4월 호 P284)
이 시는 보통 시에서 발견되는 합리적인 사고에서 이루어진 논리가 정연한 시도 아니요, 언어의 세련도 없고 깊은 명상에서 이루어진 시도 아니다. 이 시는 그야말로 자유 방종한 히피 생활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즉 생활 자체가 어떤 목적성에 의하여 지배되고 행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메리카」는 아주 자연스러운 시 같으면서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여기에는 의식된 자연적인 것의 추구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도적인 선정신의 추구는 선의 초기 단계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현상으로 미국 히피시인들의 선행각도 정도를 찾기 위한 초기단계의 미치광이 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히피시인들의 초기 선 열병 증세가 잘 나타나있는 것이「잭 케루악」의 자서전적인 저서「Dharma Bums:오도에의 길」이다. 그는 숲 속의 방황에서 개오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달빛 아래에서 나는 진리를 보았노라. 오! 여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세계는 열반과 같고 하늘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나는 밖에서 하늘을 잊었네.....」그러나 선사들의 오도송은 「잭 케루악」식의 직선적인 진리의 발견의 고백과는 전연 다르다. 사실상 「잭 케루악」의 이 체험담은 도의 객관적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도에 관한 서술은 도 자체와는 전연 다른 것이다. 그런데 「잭 케루악」은 이런 자기들의 히피시인들의 시를 선시 이 태백 혹은 「하이구」에 비교하고 있다.
「긴스버그, 요 렉스로스, 훼르링케터」.......등으로 구성된 「센프란시스코오우 르네상스」에 의해 특징 지워진 미국의 신시는 생각이 나는 대로 쓰는 원천에로의 복귀를 꾀하는 시이며 「훼르링케티」가 말하듯이 아카데믹하며 싫증나는, 세련됨이 없는, 뇌리에 떠오르는 그대로 된 구두시로 신구의 미치광이 선시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 새로운 순수시인들은 고백한다는 단순한 즐거움에서 고백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 노래의 리듬에 몸을 내맡기는 청년들이다. 이런 류의 행동이야말로 자유롭게 노래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필요성을 제시하는 「T.S 엘리어트」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는 또한 추상적 장광한 해설이 없는 구체적이고 순수하게 사물에 직접 접근하는 「하이구」에 의해 특징 지워진 정신적 훈련과 같은 것이다. (문학사상 1973년 4월 호 P296)
여하튼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에 속하는 이들 비트 시인들의 시는 선시로 간주하는데는 당시 구미의 선객 선(禪)평론가들간에 많은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의 맹목적인 모방도 역시 도에 이르는 하나의 길임은 사실인 것 같다. 오늘 성숙해 있는 당시 미치광이 비트시인들을 볼 때에는 반소설과 선, 훌리오.데.꼬르따살(Julio de Cortazar)의 경우 ― 아르헨티나의 현존 작가 꼬르따살의 대표작이며 서중남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은 <원반놀이>(Rayuela)라 불려지는 반 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의 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선과의 연관성을 피력하고 있다. 「나는 여러 의미에서 선을 찬양한다. 특히 대선사들에게 엄숙성의 결여가 맘에 든다. 사물의 가장 심각한 근본이 때로는 이들의 농담이나 뺨을 후려치는데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 같으나 이들은 사물의 본질을 이런 방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나의 <원반놀이>에서 선의 이런 태도와 이 기교가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원반놀이>는 그 서문에서부터 우리의 상식을 어지럽게 한다. 저자 꼬르따살에 의하면 이 소설은 한 권의 소설인 동시에 여러 권의 소설이고 동시에 두 권의 소설이란 것이다. 두 권의 소설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제 1권은 56장에서 끝나고 제 2권은 57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73장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수의 논리는 소설의 순서와는 아무 관계없는 것이다. 즉 제 2권의 순서는 73 12 116 84장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원반놀이>의 구조는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런데 이 소설의 언어도 또한 충격적이다. 유모어 웃음 폭소 사리에 맞지 않는 대화가 전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가장 엄숙한 것은 가장 유모어스런 것에 의하여 개발 이용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중에서 유모어스러움이야 말로 가장 심각한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꼬르따살은 자기 소설에 나타나는 폭소의 목적은 순간적으로 독자의 정신을 포착하여 그를 혼비백산하게 하며 불안케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꼬르따살은 「크르노꼬삐오와 명상의 역사」라 불리는 재담 집을 썼는데 그 내용이란 계단을 어떻게 오르내리고 시계태엽은 어떻게 감아야하는 등의 시시한 충고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이 출판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일부 고명한 평론가들은 그를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꼬르따살과 같은 진지한 작가가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라고 공격을 가했다. 상기와 같은 평에 대한 꼬르따살의 말은 「바로 이것이 내 나라의 가장 못된 점이다. 못된 점이란 중요한 것에 대한 바보스런 개념이다. 이 바보스런 개념을 나는 때려 부셔야 한다. 이 개념이 파괴될 때 인간이 자유로와 진다는 것이 바로 나의 신념이다.」
<원반놀이>에서 꼬르따살은 작중인물들의 입을 빌려 현대 서구문학의 고전인 마이스터 에카르트, 칼융 비트겐스타인 미국의 비트세대 잭.캐루악 스즈키 등을 계속적으로 등장 시킨다. 동시에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콕토 쟈리등의 사상을 선과 비교하기로 한다. 원반놀이 489페이지에서 꼬르따살은 선에 관한 자신의 이해와 자기의 반 소설이 선과 어떠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상세히 고백하고 있다.
「모델리의 수첩에는 선적인 내적 체험에서 직접적으로 분출하는 고함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선사와 제자들간의 다양스런 대화방법이 있는데 그 대화란 이원적인 사고방식에 습관된 귀에는 전연 불가사의한 것들로서 예를 들면 질문하는 제자의 머리를 죽비로 후려친다든지 주전자 세례를 한다든지 혹은 힘으로 제자를 문밖으로 내던진다든지 하는 것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제자와 얼굴을 맞대고 제자의 질문을 반복하는 선사의 태도이다. 모델리는 외적으로 보아 정신착란증 같은 이런 선의 세계에 아주 흡족해 있는 것 같았는데 이런 류의 교육적인 방법이야말로 제자의 정신적인 눈을 뜨게 하며 진리를 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으로 확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선의 이와 같은 비합리성도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바 그 이유인즉 이 방법만이 서구의 사고구조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뜻에서이다. 내적 갈등이 격렬하면 할수록 이런 선의 기교는 더욱더 좋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중의 머리를 죽비로 후려치는 것과 동일한 이치로 나는 완벽한 스캔들을 독자들에게 던져 그들 마음속에 심적 격돌과 충격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철저한 반 소설을 쓰는 것이다.」
「꼬르따살」은 이 소설에서 선의 교육방법을 응용하고 선을 많이 논하면서도 선의 최후 목적인 견성해탈(見性解脫)에는 비관적이다.
「깨우침(梧)이란 순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깨우침은 만사를 해결한다. 그러나 개오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내외의 역사를 뒷걸음 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이탈리아식으로 폭발을 하고 서구식 생활방식 이것만이 내게 남은 것이다. 아침의 조그만 크림커피는 그렇게도 즐겁건만.......」
선은 논하지만 선의 본질에로의 도달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이 비관은 결코 늦은 일이 없는데도 늦었다고 체념하는 「꼬르따살」의 이 비관적인 태도를 우리는 「이오네스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