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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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10
  • 광덕 스님
  • 승인 2007.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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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聖典) 강의실

  3, 연각(緣覺)과 성문(聲聞)

  연각(緣覺)은 범어(梵語)의 Pratyeke­buddha. 독각(獨覺)의 뜻이다. 벽지불이라고도 적는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수도하여 12인연 법을 깨친 성자로서 고독과 적정을 즐기고 설법교화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다. 이와 같이 대비 행을 하지 않으므로 성불하지 못하는 성자라고 한다.

  성문(聲聞)은 Śrãvaka(소리를 듣는다.)의 역인데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친 제자다.
  아난 사리불이 대성문이라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행하되 주로 자기 해탈에 치우친 출가성자다. 4성제를 수행하여 4사문과(沙聞果)를 얻는다.

  연각과 성문을 이승(二乘)이라 하지만 이 둘의 수오상(修悟上)의 차이는 무엇일까? 연각은 홀로 수행하여 12연기를 관(觀)하고 마침내 번뇌를 벗어난 성자이고, 성문은 4성제를 수행하여 번뇌를 벗어난 성자이다.
  연각은 번뇌를 멸각한 자요, 성문은 수행과정에 있는 자다. 다만 성문 중 제4 과 위에 이른 아라한은 연각과 같이 번뇌를 벗어난 성자이지만 수행과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부행(部行)독각은 성문출신이다.)

  한데 경에 보이는 12연기법도 없다하심은 연각승을 위한 가르침이요, 또한 고집멸도도 없다함은 성문승을 위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 2승의 교법은 반야법문에 이르기 이전의 교학으로서 그 가치는 강한 현실성이 있기는 하나 대승의 기초과정에 속하는 법문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를 소승(小乘)이라 한다.

  (9) 바라밀다와 <지(智)와 득(得>
  <경 문(經文)>
  지(智)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1. 바라밀다와 자기인식(認識)

  바라밀다인 청정실상은 궁극의 실지이므로 이는 인식이라는 상대적 관계성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보았다고 하면 이미 못 본 것이요, 얻었다하면 이미 딴 것을 얻는 것이다. 그는 전일적(全一的)인 독권(獨權)이며 절대적인 주체성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기 바라밀 자체에서는 달리 찾을 대상도 없고 대상을 인식할 주지(主智)도 없다. 있다면 망상분별이다. <지(智)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하심은 이와 같이 전일(全一), 전성(全性), 독존(獨存), 절대적인 바라밀자체의 인식방법에 대한 말씀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어디까지나 바라밀지(地)를 모르고 현상에만 국집하는 입장을 파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바라밀자체가 없다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공허하다는 것도 아니며 반야 적인 실상이해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현상에 국집하여 관계적 상대적 능소(能所)적 입장에서는 알거나 얻을 것이 아님을 명언(明言)할 뿐이다.

  실로는 이 바라밀 경계는 처처에 현전하고 있다. 만인 면전에 전면 전개되고 일찍이 가렸거나 숨은 적이 없는 것이다. 「개개면전명월백(個開面前明月白)」이니 「산하대지현진광(山河大地現眞光)」이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이러하므로 이 바라밀다를 대평등(大平等)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능소(能所) 지득(智得)으로는 알 수 없고 얻을 수 없다. 오직 사람 개개의 본분면목인 반야실상 눈만이 이를 요지한다. 여기서 증지(證知)한 지(智)도 없고 증(證)하는 바 법도 없음을 명료히 하여 바라밀 광명의 대용방식(大用方式)을 선시하신 관자재보살의 자비를 알아야 하겠다.

  2. 지득(知得)과 바라밀

  종래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의 대목에 있어 혹자는 여기의 지(智)를 지혜(智慧)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지(智)를 Projña가 아닌 Jñãnam(아는 것)임을 강조하여 이 설을 취하지 아니한다.
  저 설에 따르면 지(智)는 6바라밀을 대표한 수행이고 득(得)은 그로부터 얻는 성불이라 한다.

  (10) 거두는 말

  이상 파사분(破邪分)에서 바라밀 광명을 종횡으로 조사하여 범부의 일체 그릇된 소견을 하나하나 척파하고 내지 이제까지 설하신 부처님 교법까지도 이 반야법문 앞에는 요의의 법이 아닌 교의임을 노정(露呈)하였다. 즉 오온(五蘊), 18계(界), 12처(處)등 3과(科)의 공무(空無)를 보이셨고 다시 12연기(緣起), 4체법(諦法)도 찾을 길 없음을 말씀하시고 끝으로 마침내 일체 법을 요별 수행할 지(智)도 증오할 득(得)도 없음을 설하시어 중천에 낭연독존(朗然獨存)하여 무량광명을 거침없이 부어대는 태양과 같은 바라밀의 본령을 드러내었다.

  특히 파사분에서 주목하는 바는 바라밀 자체에 대한 설명이다. 바라밀의 자체성은 이른바 제1의 dharma로서 언설불도처(言說不到處)이다. 그런데도 관자재보살은 자비곡진하시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어 우리의 본분과 지표를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이 자비곡진한 교법에 깊이 믿고 의지하여 사견을 멀리하고 천흥(天興)의 무량공덕을 헛되이 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4. 공능분(功能分)

  심경은 처음 관세음보살이 마하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일체 정신적 물질적 현상은 없는 것임을 사무쳐 보였다. 그래서 일체 고난에서 해탈했다는 선시(宣示)로 시작되었다.

  즉 관세음보살이 자재 해탈을 이룩한 원인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한 데 있음을 말함으로써 반야바라밀다의 위력이 어떤 것인가를 관세음보살의 위덕을 실증으로 내세움으로써 lfwmd적으로 말해주고 있다.(立義分)

  그리고 다음에 반야바라밀다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반야바라밀다를 배우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반야바라밀다가 어떤 것이었던가. 오온, 육근, 십팔계를 비춰봄으로서 이 모두는 없는 것임을 갈파하고 다시 오온, 육근, 십팔계의 존재성을 근거로 해서 건립된 4제, 12인연의 교법체계도 없으며 마침내 근본적으로 앎도, 얻음도 도무지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파사분(破邪分)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은 이것이 조건이며 자체가 공함을 보이고는 다음에 반야바라밀다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차례가 이 공능분(功能分)이 된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반야바라밀다 자체에 대하여는 말을 할래도 이에 대한 말이 없다. 이론으로 어루대거나 생각으로 짐작할 수 없는 경계다. 그것은 마치 장대로 허공을 찌르는 것 같아서 아예 생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제1dharma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그에 대하여 할 말 못하고 다만 바라밀다가 갖는 공능이 우리 현상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경 문>
  얻을 바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게 되는 고로 마음이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으며,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을 얻느니라.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뇩多羅三藐三菩提)

  (1) 무엇이 소득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한계성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일체 존재가 근본적으로 시간 공간의 제약하의 것이며 그것은 인식과정에서 우리의 인식범주 내재로 제약된다. 일체존재란 일단 우리의 인식과 이론적 사유 내재이므로 근본적인 가정성과 한계성을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의 기초가 되는 인식의 차원이 변동될 때 우리의 세계는 한꺼번에 그 존재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위에서 살펴 온 바와 같이 우리의 모두 현상적 존재는 오온의 복합이거나 분석이며 그를 기초한 논리적 전개의 성격을 지닌 것이므로 이제 반야에 의하여 오온의 허가성(虛假性)이 드러난 마당에 한 물건도 안중에 남는 것이란 없다. 오온적 현상을 인식할 지혜도 없고 고난을 극복할 지혜도 없으며 고난을 극복하고 평화 안락을 얻을 건더기가 없는 것이다. 가히 버리거나 얻을 것이란 터럭 끝만큼도 없다. 아예 이름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일체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구름 한 점 없고 먼지 하나 없는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인 하늘을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유(有)아니면 무(無)밖에 볼 수 없는 우리의 인식 상에서는 명백히 이마져도 없다고 할 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공은 차라리 허공 아닌 대지가 있고 천체가 있고 다시 허공을 인식하는 「나」라는 인식 주체가 있지만 이곳에는 그런 것이 없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히 제거할 오온도 번뇌도 없지만 다시 얻을 지혜도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필의공(畢意空) 또는 무소득공(無所得空)이라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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