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촬요연의] 전심법요(傳心法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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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촬요연의] 전심법요(傳心法要) (4)
  • 석주 스님
  • 승인 2007.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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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촬요연의(禪典撮要演義) 8

〔이 마음은 실로 한 물건도 얻을 바가 없으므로 청정이라 하고 일체 분별을 여의었으므로 본원이라 한다. 삼세제불의 입각처가 이곳이며 일체 현성이 근원한 곳이 이곳이다. 제불 국토의 무량공덕 장엄도 이곳에서 연유된다.〕이 본원청정심은 일체중생이나 삼세제불이나 일체세계 산하대지나 그 위의 일체 형상 있는 것 혹 형상 없는 것 그 모두와 시방(十方) 계에 두루 가득하고 평등하여 원래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이곳에는 저와 나의 대립을 찾을 길이 없다. 이것은 원래로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본원청정이 항상 스스로 두렷이 밝고 두루 비취고 있는 것이다. 〔일체 제불에서 빛나고 있으며 일체 중생에서 빛나고 일체 산하대지에서 빛난다. 그러므로 빛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이 빛 아님이 없다. 이 빛 밖에 다른 것도 없으니 이 빛을 덮거나 가리울 것도 없다. 오직 본원청정 대 광명이 혁혁히 빛나고 있으며 일체가 온전히 대 광명덩어리인 것이다.〕
<즉비본원청정심卽此本源淸淨心 여중생제불與衆生諸佛 세계산하世界山河 유상무상有相無相 편십방계徧十方界 일체평등一切平等 무피아상無彼我相 차본원청정심此本源淸淨心 상자원명편조常自圓明徧照>

  세상사람들은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가져 마음으로 삼나니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바에 덮이는 바가 되는 것이다. 〔보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아는 것들은 그것은 청정한 본마음은 아닌 것이다. 본마음 자체는 아니다. 본마음의 작용이 보는 것, 듣는 것, 아는 것이니 이것을 비유하면 마치 푸른 하늘의 구름과 같다. 구름이 하늘에 떠있지만 하늘에 있다하여 구름이 하늘이 아니다. 보고 듣고 아는 것도 마음자체가 아니고 구름처럼 마음 위에 덮인 작용이니 이것을 가지고 마음이라 한다면 마음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고 듣는 구름 같은 것을 하늘로 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정명(精明)한 본체를 보지 못한다. 〔정명한 본체라 함은 무엇일까? 위의 비유로 말한다면 본체라 함은 태양과 같고 정명이라 함은 궁겁을 두고 변치 않는 밝음과 같다. 구름에 덮이면 밝음을 볼 수 없고 이 땅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에 가리면 해가 저물어서 밤이 되었다 한다. 실로는 구름은 마침내 실이 아니어서 흩어지는 것이며 설사 흩어지지 않고 하늘에 걸쳤다하여도 하늘의 태양의 밝음이 없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밤이 되었다하여 태양이 어두워졌거나 없어진 것도 아니다. 태양은 태양대로 영원히 변함없이 찬란하게 광명을 뿌리고 있지만 다만 구름에 가리우거나 지구의 가림을 보는 자만이 찬란한 태양을 보지 못할 뿐이다.   

  이것은 근자에 인공위성이나 우주여행이 보여준 사실이 아닌가. 정명한 본체, 즉 우리의 본성이며 본심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서 이 정명한 본체를 볼 수 있을까?]  다만 직하에 무심하면 본체가 스스로 나타난다. 〔직하에 무심하다 함은 무슨 말일까? 아무런 지음도 함도 없는 즉시가 곧 직하요,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하는 마음의 걸림이 없음을 무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심에는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이 있으나 보고 듣고 깨닫는 것에 물들음이 없다. 그렇다면 결코 보고 듣고 느낌이 없는 한 물건이 무심이라고 알아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무심을 하나로 두는 것이며 아무 것도 없다하는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같은 마음 작용의 일면을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일체의 걸림 없이 마음이 마치 허공과 같음을 알았을 때 여기에는 정명한 본체가 궁겁으로 변치 않는 모습을 알게되니 그러므로 직하에 무심하면 본체가 스스로 나타난다하는 까닭이 있다.

  여기에서 볼 때 직하에 무심하다는 많은 범부들이 둘러싸여 있는 일체 경계와 현상에서 경계를 여의고 상을 여윔을 의미한다. 본체가 스스로 나타난다 함은 일찍이 변함없이 바로 이 자리에 영원히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나 일체세계 상황에 관계없이 이대로 있는 본원 청정심을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정명한 본체를 범부들의 중생성에서 곧바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태양이 허공에 솟아 올랐을 때 시방세계에 두루 비춰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명한 본체에는 일체의 경계가 경계가 아니며, 장애가 장애가 아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가 견문각지가 아니다. 확통 시방하여 걸림이 없다. 왜냐? 일체가 대립된 존재가 아니며 본체가 또한 유무에 상관없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또한 무한한 시간의 과거 ·현재 ·미래동안에 끝없는 우주를 전개하며 세계가 벌어졌다 없어지고 다시 일체시간, 일체세계가 허물어져 없어졌다 하더라도 이 본체는 조금도 동요 · 증감· 변멸이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명한 본체의 자유스러움과 무한함과 헤아릴 수 없는 큰 공덕의 대 활동 상을 무엇이라 말하여야 될까? 여기에는 말과 생각을 잃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다만 견문각지를 인정해서 거기서 그에 의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또는 견문각지를 없이하여 마음끼리 끊어진다면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리라.

〔왜 그러냐? 그것은 견문각지에 걸려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본원청정심을 모르기 때문이며 또한 견문각지를 없이하여 마음끼리 끊어졌다 하여도 이것은 없는 것에 빠졌기 때문이다. 견문각지를 인정하거나 견문각지를 없이 하였다는 것이나 그 모두는 필경 견문각지의 유변(有邊)에 빠진 것을 면치 못한다. 다시 견문각지도 그 견문각지를 끊음도 생각도 일체를 끊었다하더라도 이것은 정명한 본체와는 십만 팔 천 리다. 그는 필경 무(無)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유무에 걸림이 없어야하며, 유무를 여윈 상도 없어야 한다. 직하에 무심이라 하면 이 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다만 견문각지처에서 본심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본심은 견문각지에 속하지 않았으며 또한 견문각지를 여의지 않았느니라.  다만 견문각지 위에서견해를 일으키지 말며 또한 견문각지 위에서 생각을 동하지 말며 견문각지를 여의고 마음을 찾지 말며 견문각지를 버리고 법을 취하지 말지니 즉(卽)하지 않으며 여의지 않으며 머물지 않으며 저(著)하지 아니하면 종횡으로 자재 하여 도량 아님이 없다.

  <세인불오世人不悟 저인견문각지위심衹認見聞覺知爲心 위견문각지소복爲見聞覺知所覆 소이所以 불도정명본체不睹精明本體 단직하무심但直下無心 본체자현本體自現 여대일륜如大日輪 승어허공昇於虛空 편조십방徧照十方 경무장애更無障 고학도인故學道人 유인견문각지唯認見聞覺知 시위동작施爲動作 공각견문각지空却見聞覺知 즉심로절무입처卽心路絶無入處 단어견문각지처但於見聞覺인본심認本心 연然 본심불견문각지本心不屬見聞覺知 역불이견문각지亦不離見聞覺知 단막어견문각지但莫於見聞覺知 기견해起見解 역막어견문각지상亦莫於見聞覺知上 동념動念 역막이견문각지亦莫離見聞覺知 각심覺心 역막사견문각지亦莫捨見聞覺知 취법取法 부즉불이不卽不離 부주부저不住不著 종횡자재縱橫自在 무비도장無非道場>

  세간 사람들은 제불이 모두 마음 법을 전한다고 이름을 듣고 생각하기를 마음 위에 별다른 한 법이 있어 그것을 증득하고 또한 잡을 것이라 하여 드디어 마음을 가져 법을 찾나니 이것은 마음이 곧 법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법은 바로 이 마음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라. 〔도가 마음에 있는 법이라고 하여 마음에서 다시 어떤 법을 찾고자 한다면 이것은 마음과 도가 둘인 것이며 도와 도를 얻는 마음으로 둘인 것이며 가히 증득할 도와 증오하는 마음과 둘인 것이다.

마음을 전한다고 하여 마음밖에 따로 법을 두는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법은 마음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가히 증득하고 잡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마땅히 마음이 즉시 법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법이다. 법이 마음이다. 그렇다면 다시 무엇을 찾고 무엇을 다시 얻으려고 서두르랴.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는 것이니 다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필경] 천만억겁을 지내더라도 마침내 얻을 날은 없을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얻을 것이냐? 백 천만억겁을 부질없이 헤맬 뿐이다.〕모름지기 당장 직하에 무심함만 같지 못하니 이것이 곧 본법이다. 〔본법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헤매는 생각,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견, 수행하고 노력해서 얻겠다는 생각, 성인의 경계에 도달하여 법을 안다는 생각 등 부질없는 생각들을 당장에 쉬어야 한다. 이들 눈 위에 어른거리는 환몽을 당장에 놓아버릴 때, 이것이 무심이니 무심인 때 본원청정심이 정명본체가 명랑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본법이다.〕

  비유하면 〔열반 경에 보이는 바와 같이 여기에 한 역사(力士)가 있다고 하자. 그가 다른 사람과 씨름을 하다가 그의 이마에 솟아있던 구슬이 살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그가 자기 이마에 구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구슬이 빠져 없어진 줄 알고 사방으로 찾아 헤맸다.〕 이 역사와 같이 자기 이마 안에 구슬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하여 찾아 헤매며 시방세계를 두루두루 찾아 헤매더라도 그는 마침내 구슬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이 그에게 가르쳐〔구슬은 네 이마 안에 있다고 하여 역사는 자기 이마에 있는 구슬이 예전과 다름이 없음을 알았으니〕이때에 역사는 가르침을 받자 스스로 구슬이 옛 과 다름이 없음을 당장에 보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이마구슬은 원래로 어디로 간 바 없었다. 스스로 보지 못하고 헤매었다고 하여 그 구슬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며,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하여 새로 생긴 것도 아니다. 역사 자신이 알든 모르든, 많이 헤맸든 주저앉아 있었든 구슬은 조금도  변동은 없는 것이다.

경에는 이 역사의 구슬을 사람의 본성인 불성을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다. 불성은 본원청정심이며 정명한 본체다. 제불보살과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본체며 참으로 있는 진리의 실상이다.〕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본심을 미하여 본심이 곧 불임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하여 찾아 헤매며 가지가지 공덕을 짓고 수행을 일으키며 이와 같이 하여 차차 도를 증득하여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몇 겁 동안을 힘써 구한다 하더라도 여기 역사가 구슬을 찾아 헤맨 것과 같이 영영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몇 겁을 두고 공덕을 짓고 수행을 쌓은 것이 이것이 헛되게 닦은 것이니 저 역사가 구슬을 얻었을 때 다만 본래부터 이마에 있던 구슬을 얻었을 뿐이요, 밖으로 힘들여 찾아 헤맨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그런고로 부처님 말씀하시되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 실로 얻은바가 없다.』하시고 사람들이 믿지 아니할까 하여 오안(五眼)이 보는 바와 오어(五語)의 말씀을 끌어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제일의제(第一義諸)다.

  세인(世人) 문도개전심법(聞道諸佛皆傳心法) 장위심상(將謂心上) 별유일법(別有一法) 가증가취(可證可取) 수장심멱법(遂將心覓法) 부지심즉시법(不知心卽是法) 법즉시심(法卽是心) 불가장심(不可將心) 경구어심(更求於心) 력천만겁(歷千萬劫) 종무득일(終無得日) 불여당하무심(不如當下無心) 편시본법(便是本法) 여력사(如力士) 미 내주(迷 內珠) 향외구멱(向外求覓) 주행십방(周行十方) 종불능득(終不能得) 지자지지(智者指之) 당시자견본주(當時自見本珠) 여고고하고인(如故故學道人) 미자본심(迷自本心) 불인위불(不認爲佛) 수향외구멱(遂向外求覓) 기공용행(起功用行) 의차제증(依次第證) 역겁근구(歷劫勤求) 영불성도(永不成道) 불여당하무심(不如當下無心) 결정지(決定知) 일체법(一切法) 본무소유(本無所有) 역무소득(亦無所得) 무의무주(無依無住) 무능무소(無能無所) 부동망념(不動妄念) 편증보제(便證菩提) 급증도시(及證道時) 저증본심불(柢證本心佛) 력겁공용(歷劫功用) 병시허수(並是虛修) 여력사(如力士) 득주시(得珠時) 저득본 주(柢得本 珠) 불관향외구멱지력(不關向外求覓之力) 고불어(故佛言) 아어아뇩보제(我於阿뇩菩提) 실무소득(實無所得) 공인불신고(恐人不信故) 인오안소견(引五眼所見) 오어소언진실불허(五語所言眞實不虛) 시제일의제(是第一義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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