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세 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문: 마음이란 도처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무상(無常)한 속성을 지닌 조건지어진 것(行, sankhara)이라는데, 어제 아짠께서는 마음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관해 좀 더 설명해 주십시오.
답: 일반적으로, 범인(凡人)들의 마음은 무상하며, 세속적 관습들에 물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 만물은 세속적이기에 당연히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범인들의 마음은 재생(再生)으로 이끄는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에 의해 변하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마음이란 아라한(Arahant)의 경지에 도달한 청정한 마음으로, 더 이상 무상, 고, 무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유념할 것은, 마음에 관한 이런 저런 설명들은 단지 이론적 지식에 머물 뿐이므로, 수행을 통해 직접 체득하지 않으면 그저 끝없는 논의에 끌려 다니게만 된다는 점입니다. 그 같은 설명이나 논의들은 보탬이 안 됩니다.
수행을 해야 불법(佛法)의 진리를 스스로 깨칠 수 있습니다. 불법에는 거친 단계, 중간 단계, 미세한 단계가 있는데, 수행을 통해 이 중요한 단계들을 체득해가면서 그 수행체험들에 관해 거론하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할 것입니다.
지식의 축적은 수행을 통해 체득된 진리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설혹 다른 사람들의 수행성과들을 귀동냥한다 해도, 수행의 열매를 몸소 땀 흘려 거두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수행의 성과를 직접 체득하게 될 때, 그간의 온갖 의문들은 저절로 풀리게 될 것입니다.
문: 화(anger)를 근절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아비담마[Abhidhamma: 남방불교의 논장(論藏)─역자]에서는 화를 ‘진심(嗔心)의 뿌리’*라고 이릅니다.
화를 근절시키는 방법에 관해 설명하면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잘되겠지만, 실제로 진심의 뿌리를 뽑아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번뇌는 ‘이론적 무장(武裝)’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번뇌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인지하고 있을지라도, 번뇌는 여전히 세상 만물의 마음을 장악한 채 결코 물러나지 않습니다. 번뇌의 제거는 배워서 습득한 지적 능력이 아니라, 진정한 수행을 통해 체득한 진리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뇌를 뿌리 뽑는 최선의 방법은 오직 수행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마음수련을 통해 마음챙김(mindfulness)과 지혜를 번뇌를 퇴치할 수 있을 만큼 강력히 계발시켜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붓다와 그 제자들처럼) 번뇌가 근절되어 마음에 한 점 의혹도 남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 이 같은 붓다의 수행법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전수되고 있습니다.
(그 수행법인) 좌선수행에 관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붓다께서는 좌선 시, 왜 가부좌 자세를 취하셨을까요? 얼핏 보기에, 좌선에 있어서 자세는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으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자세를 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랜 시간 동안 좌선에 들려면, 반드시 가부좌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몸의 하중으로 인한 압력이 고르게 분산되어, 통증이 일어도 어느 한 부위에 과도하게 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진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용맹정진을 결행하는 이들에게 좌선수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 수행법은 일반적으로 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만일 (통증 때문에) 자신의 몸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면, 마음은 허약해져 신체적 고통에 예속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목표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그 목표를 위해 진력하도록 하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방황하지 않도록 마음챙김으로 확고하게 다스리십시오. 결코 마음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챙김으로 마음을 관할할 수 있게 될 때, 마음은 비로소 평온하고 명징해집니다.
문: 알라까말라(Alakamala)라는 명상 마스터에 의하면, 마음을 어떤 사물에 고정시키면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답: 사물은 단지 사물일 뿐 해탈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물을 주시해서 관찰하는 까닭은 그들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관해 제대로 알아서 ‘놓아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단지 마음챙김만 활용하고 지혜는 활용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수행성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챙김과 지혜를 도구처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 번뇌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도(中道)에 관해 배운 이라면, 매사(每事)에 있어서 중도 즉 법(法)에 부합되는지를 항시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문: 마음이란 정작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 마음은 ‘아는 이’입니다.
참마음은 오직 ‘알아차림(knowing)’이라는 한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을 따름입니다.
붓다께서는 마음은 본래 맑고 밝고 빛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번뇌에 오염되어 혼탁해진다고 항시 설하셨습니다. 때문에 마음챙김과 지혜와 인내력에 의지해 끊임없이 마음을 정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명확함과 밝음의 상태를 넘어서게 되면, 비로소 청정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같은 청정한 마음은 해탈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밝음(brightness)’이란, 아직 ‘윤회에 예속된 마음(vatta citta)’ 상태로, ‘윤회에서 벗어난 마음(vivatta citta)’ 상태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같은 마음 상태는 명확하고 밝긴 하지만, 아직 청정한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입니다. 이 ‘밝음’은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것이지만, 어떤 한 지점에 깊이 집중할 때 야기되는 번뇌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장 미세한 번뇌’인 ‘밝음’마저 대념(大念)과 대혜(大慧)로써 정화시켜 극복할 수 있어야, 비로소 청정한 마음(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유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