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카플로는 지유 케넷이나 로버트 아잇켄처럼 선을 배우러 본고장 일본으로 유학을 간 제 1세대 서양인이다. 카플로는 하라다-야스타니 법맥의 산보교단에 조금의 흠이나 빠진 과정 없이 완벽하게 입문을 했다. 10여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야스타니 선사에게 다르마를 가르칠 수 있다는 인가를 받았다.
미국에 온 그는 뉴욕 주에 로체스터 선원을 설립하고 불교를 가르치며 꿈을 펴나갔다. 그러다가 독경을 일본어 대신 영어로 하는 등의 변화를 두고 은사 야스타니 노사와 이견이 벌어졌다. 이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카플로는 결국 스승으로부터 전법을 받지 못했다. 물론 카플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제자를 가르치고 전법도 해주었지만 일본 선불교의 법대로라면 그는 전법을 할 자격도 ‘노사’라는 호칭을 쓸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카플로는 서구에서 존경받는 스승이고 불교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그의 정신적 품격과 수행의 진전이 높은 평가를 받는 까닭이다.
카플로는 불교계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전법이라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스승될 자격이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잣대가 도덕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사가 전법을 받았느냐는 사실보다는 윤리적인 사람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며, 자신은 진실하게 선불교를 가르쳐왔기 때문에 당연히 제자에게 전법을 해줄 자격이 있는 스승이라는 주장이다.
“진정한 선불교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부처님까지 이어지는 모든 가르침의 계보를 물려받은 것이다.”
1912년 유태인 어머니와 러시아정교를 믿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일찍이 불가지론자가 된 그는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무신론자 클럽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 날 이후로 유신론에 무언가 결점이 있다는 그의 입장은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가 된 이후 그는 크리스천 선(禪)에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법정 출입기자로 일하며 야간대학을 다닌 그는 이차대전이 끝난 후에 일본으로 가 연합군이 주재하는 전범재판을 취재했다. 그 곳에서 선불교에 관심을 가지자 친구들이 스즈키 다이세츠 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스즈키의 해박한 지식과 사원의 고요함에 카플로는 점점 빠져들었다.
“그 소박한 집으로 늘 나를 끌어당긴 것은 갈망이었다. 마당에 자라는 고목과 유서 깊은 법당과 뜨락의 흙에 깃든 고요함, 스님과 신도의 얼굴에서 풍겨나오던 깊은 고요함을 다시 한 번 체험하고 싶은 갈망.”
1953년 41세의 필립 카플로는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다시 한 번 일본을 찾았다. 처음 3년 이상을 현지 적응을 하느라 건강이 나빠졌던 그는 야스타니 노사에게 가게 되었다. 야스타니 노사는 제자들이 다 재가자였고 절이 없는 사람이었다. 1958년 야스타니 노사와의 인터뷰에서 ‘우주는 하나이다’로 시작한 노사의 말을 들으며 그는 견성을 했다.
“스승의 말씀 하나하나가 마치 총알처럼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 ‘진리의 달’, 갑자기 노사도, 그 방도,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찬란한 빛줄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너무나 황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잠겼다. 그 잠시 느꼈던 영원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그러다 노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서로의 눈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61년 카플로는 비구계를 받았고, 1965년에 법사 인가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전법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곧 전법을 해줄 작정이었던 듯했다.
“오늘날 일본에 진정한 선사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 가르침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불교는 서구로 전해져야만 한다. 선불교를 서구로 가져가는 것은 너의 운명이다.”
로체스터 시에 선원을 설립한 카플로가 저술한 『선의 세 기둥(Three Pillars of Zen)』은 불교 수행의 3가지 요소가 ‘참선, 법문, 스승과의 인터뷰’라고 말한 것으로, 원리가 아닌 구체적인 수행을 담은 최초의 영어 불교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30년이 지난 현재 이 책은 12개 국어로 번역되어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버나드 글래스맨도 20대 후반에 이 책으로 불교를 처음 알았고, 카플로의 유명한 제자인 토니 패커 역시 이 책을 통해 불교에 마음이 기울었다.
동양문화를 전혀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동양의 선불교를 가르치며 카플로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흔히 겪는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많이 느꼈다. 또한 그가 본보기로 삼을 만한 서구인 스승이나 선원도 아직은 없었다. 그는 불교수행에는 참선 말고도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불교의식도 나름대로의 힘이 있었고 염불도 ‘마음의 심층에 가 닿을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염불은 지성의 고삐를 잠시 늦추어 가르침이 자연히 스며들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엘리트 불교층이 명상만을 중시하고 다른 불교의식이나 염불을 낮추어보거나 아예 없애려는 경향에 대해 그는 일침을 가한 것이다.
서구인들이 우상숭배라고 거부감을 보이는 불상에도 그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불상 곁에서 참선을 많이 하면 그 참선의 힘이 불상에게로 가고, 그 불상은 깊은 고요함과 빛을 습득하고, 그렇게 된 불상은 또 사람에게 자비와 지혜를 준다는 것, 그것이 나의 불성과 상호작용을 하여 나를 강하게 하고 나에게 영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환경에 맞는 변화는 역시 필요하다고 그는 믿었다. “선불교를 서구인의 사고방식과 감성에 맞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본 불경을 영어로 바꾸어 독경할 수 있게 하는 것, 참선 시 가부좌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구형 법복을 만드는 것, 사미계를 받거나 보살계를 받는 사람에게 내리는 법명을 서구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 서구의 전통에 조화되는 형식과 의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카플로는 다섯 명의 제자를 길러 전법을 했다. 그 제자들은 또 제자를 키웠다. 현재 카플로의 제자들이 곳곳에 이룬 선원을 다 묶어 ‘운수 승가[雲水僧伽 Cloud-Wate r Sangha]’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 속한 선원은 모체 격인 로체스터 선원, 시카고 선원, 1974년 설립한 위스컨신 주의 메디슨 선원, 스웨덴의 스톡홀름 선원, 멕시코의 카사 선원이다. ‘운수’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수행을 새로 시작한 스님처럼 초심으로 하겠다는 것, 그리고 구름과 물은 아(我)가 없다는 것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