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 오신 미륵부처님
상태바
해남에 오신 미륵부처님
  • 정윤섭
  • 승인 2024.08.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남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 마을 곳곳 미륵부처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만일암 터 천년수. 북미륵암 용화전에 모셔진 마애여래좌상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균형미 있게 잘 조성된 미륵불이다.

 

해남의 미륵부처

길을 가다 보면 마을 어귀의 길가나 들판에 서 있는 돌부처(미륵부처)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륵부처의 모습은 그렇게 풀뿌리 같은 민중들 곁에서 가장 친숙하게 남아 있다. 불교신앙에서 미륵부처는 미래에 오실 당래불(當來佛)을 말한다.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하생(下生)할 메시아라고 할 수 있다.

미륵신앙은 불교의 내세구원사상으로 여러 종교에 나타나는 기복신앙의 한 형태다. 민중들 속에서 민간신앙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지어져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 또는 나라를 위해 행해지는 기원과 같은 이야기들이 간직돼 있다.

미륵신앙은 전국적으로 넓게 분포돼 있다. 우리나라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해남지역 역시 미륵불이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미륵부처가 폭넓게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해남에 남아 있는 미륵불은 10여 기 정도다. 두륜산 대흥사 북미륵암 거대한 암벽에 조성된 마애여래좌상처럼 사찰에 있기도 하고, 마을로 내려와 민중 속에 나타난 마을 미륵불도 있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해남의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 마을 미륵은 정확한 방위에서 약간 빗겨나 있으나 해남의 동서남북에 각각 위치한다. 동에는 계곡면 성진리 말삼정 미륵불, 서에는 황산면 연당리 미륵불, 남에는 해남읍 신안리 미륵불, 북에는 산이면 송천리 미륵불이 있다.

성진리 말삼정(井)에 있는 미륵불과 송천리 미륵사에 있는 미륵불은 독립된 커다란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졌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토속적인 모습이다. 이에 반해 신안리 미륵불과 연당리 미륵불은 평평한 바위에 서 있는 입상의 모습인데 비교적 불상의 모습에 가깝게 조성됐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세 분의 미륵불이 조선시대 교통로를 연결하는 역(驛) 근처에 있다는 점이다. 성진리 말삼정 미륵부처는 별진역이 있는 곳이고 신안리 미륵부처는 녹진역이 있는 곳에, 연당리 미륵부처는 남리역이 있었던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 무사안녕과 평안을 비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북미륵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중간에 만일암 터와 미륵불을 조성할 때 해를 잡아맸다는 천년수가 나온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된 백두대간의 정맥이 길게 뻗어 가장 마지막으로 치솟아 이룬 산이 해남 두륜산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세 가지 재앙이 미치지 않는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 하여 자신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을 이곳 두륜산 대흥사에 모시라고 했다. 

두륜산은 북쪽에서 들어오는 입구를 빼고는 대흥사를 둥그렇게 안고 있기에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이곳 두륜산에 성을 쌓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성을 쌓지는 않았지만, 만약 성을 쌓았다면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요새가 됐을 것이다. 지형 덕분에 대흥사는 전란의 피해가 없었다. 또한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할 만큼 명찰을 유지해 왔다.

높은 산에 있는 암자일수록 속세로부터 멀어지기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앞선다. 명산에는 도를 닦는 고승들이 많이 모여들어 암자도 많다. 두륜산에는 20개가 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두륜산 정상인 가련봉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가 북미륵암이다. 북미륵암 용화전에는 마애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균형미 있게 잘 조성된 미륵불이다.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양각했는데 얼굴이나 각 부위의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의 전체높이는 5.2m이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숭불정책에 의해 전국적으로 많은 미륵부처가 조성됐다. 북미륵암 미륵불은 규모나 조각 수법의 정교함을 볼 때 고려불교의 전성기에 조성된 미륵부처라 할 수 있다. 

대흥사 남미륵암 마애불상(출처 한듬문화재, 「해남 대흥사 남미륵암 마애불상의 현상과 의의」, 2p)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미륵암에도 미륵불이 조성돼 있다. 평평한 바위 면에 선을 돋을새김(음각)해 서 있는 모습인데, 희미한 음각 때문인지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의 미륵부처 조성과 관련해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전설이 전해온다. 전설에 의하면 천동과 천녀가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났는데,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방법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었다.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 천동과 천녀는 해가 지지 못하도록 대흥사 만일암의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 바위에 서 있는 불상을 조각하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 앉아 있는 불상을 조각한다. 천녀는 앉아 있는 좌상의 불상을 조각했기에 서 있는 모습을 조성한 천동보다 먼저 조각할 수 있었다. 불상 조성을 다 마친 천녀는 먼저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만일암 천년수에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렸다. 해가 지자 금세 어둠이 찾아왔고 더는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된 천동은 결국 하늘에 올라갈 수 없게 됐다는 이야기다.

북미륵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중간에 만일암 터와 미륵불을 조성할 때 해를 잡아맸다는 천년수가 나온다. 천년을 살았다는 천년수는 느티나무 일종이다. 거의 산 정상에 천년을 산 나무가 있다는 것이 놀랍거니와 그 세월을 다 견디고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마을로 내려온 미륵부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한다. 이러한 시대에서도 불교는 민중들을 통해 전승, 전개돼 탄압은 오히려 불교를 민중에 더 가깝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민중화한 불교의 중심에 미륵신앙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과 사회적 혼란 와중에 이러한 말법 세상을 구제할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는 미륵신앙이 민중들을 중심으로 넓게 퍼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미륵부처는 고려시대와 같이 거대하게 조성되지 않고 대체적으로 조각 수법도 정교하지 않아 민중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삼정 미륵불
송천마을 미륵불

말삼정 미륵불과 송천마을 미륵불

동쪽에 있는 미륵은 해남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계곡면 성진리 속칭 ‘말삼정’에 있는 미륵부처다. 지금은 4차선 국도가 뚫려 큰길이 났지만, 계곡이 굽이쳐 흐르는 옛길 옆에 있다. 부처의 형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2m 높이의 볼록한 자연석 바위에 음각으로 새긴, 앉아 있는 미륵불이다. 이곳은 해남 3역 중 하나였던 별진역이 있었던 곳이다. 불상으로서의 조형미를 갖추지 않은 입석(立石, 선돌)이나 바위조차도 미륵으로 인식하고 종교 행위를 하는데 말삼정 미륵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말삼정 미륵을 통해 영험한 효력을 얻었다는 민씨 부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미륵불의 소유주였던 민씨 부인은 남편이 꽤 높은 관료였는데, 내리 딸만 다섯을 낳고 아들은 없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보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민씨 부인은 이 미륵불이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일 미륵불 앞에 찾아와 아들을 낳게 해 달라며 치성을 드렸다. 그러자 부인의 치성이 하늘에 닿았던지 아들을 낳게 됐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산이면 송천마을에 미륵부처가 있다. 송천마을 도로 옆 미륵사에 모셔져 있다. 대부분의 마을 미륵이 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송천마을 미륵도 원래는 들판에 있었다. 미륵불 앞의 언덕진 곳을 ‘미륵등’이라고 한다. 

높이 2.4m, 폭 2m의 미륵불은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바위에 앉아 있다. 이 미륵불에도 전설이 있다. 이 미륵불이 영암군 미암면에 있는 미륵불과 마주 보고 있었다 한다. 두 분의 미륵불이 서로 마주 보면 산이면의 남자 총각들은 문둥병에 걸리고 미암면의 처녀들은 정신병에 걸린다고 믿어, 산이면 사람들은 영암의 미륵불이 보이지 않도록 앞쪽 구릉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현재 영암군 미암면의 경계인 학계리 민가 정원에 영암의 미륵불이 서 있다. 

 

신안마을 미륵불. 미륵사 안에 모셔져 있다. 
미륵사는 여흥 민씨 소유의 절이다. 현 주지 보명 스님은 8년 전 강원을 졸업하며 머물게 됐다. 강원을 마칠 때까지 『반야심경』조차 외우지 못하는 스님에게 한 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하루에 108독을 해보라고 권했다. 스님은 찬바람이 드는 한겨울에도 하루도 놓치지 않고 법당에 앉아 독송을 했다. 얼굴은 동상에 걸렸다. 어느 날부턴가 경전을 보지 않아도 암송이 됐다. 허름한 법당에 잠자리조차 변변치 못한 절이기는 해도 보명 스님의 출가 수행자로서 본분은 한결같다. 

연당마을 미륵불과 신안마을 미륵불

황산면 연당마을에 있는 미륵부처는 해남 서쪽에 있는 미륵불이다. 해남-진도 간 도로변 옆 전각에 모셔져 있다. 이 미륵불이 있는 곳은 진도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남리역이 있었다. 현재 얼굴 윗부분이 반쯤 깨어진 상태로 넙적한 바위인 통돌에 입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미륵부처는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민불(民佛)의 모습 대신 부처의 형상을 비교적 잘 조각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조성된 미륵불로 추정한다. 해남읍 신안리 미륵부처와 매우 비슷한데, 신안리 미륵부처 역시 입상에 높이 약 1.7m(연당리 미륵 약 1.8m)로 전체적인 외형이 닮았다. 그래서 신안리 미륵불 역시 고려시대 미륵불로 추정한다.

연당 미륵부처는 아주 영험했다고 한다. 영험함이 얼마나 강했던지 전라우수영 수사(水使)가 미륵부처 앞을 지나다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지고, 가마에서 내리지 않으면 가마가 부서질 정도였다는 것이다. 영험함이 너무 강해 본래 남녀 한 쌍이었는데, 여자 미륵은 땅에 묻어버려 남자 미륵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다. 

 

음양의 논리로 보면 대흥사의 남미륵암 미륵불과 북미륵암 미륵불이 한 쌍을 이루고, 부처의 형태로 볼 때는 신안리 미륵부처와 연당리 미륵부처가, 그리고 계곡면 말삼정 미륵부처와 산이면 송천리 미륵부처가 각각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우주의 원리가 음양의 조화이듯이 해남의 미륵부처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황산면 연당마을 미륵불과 함께 해남읍 신안마을 미륵불은 신안마을에서 약 500m쯤 떨어진 덕음산 아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옆에 옥개석만 남은 탑이 있어 예전에 이곳이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맹진리 장군바위
맹진리 장군바위에 새겨진 매향비문(埋香碑文). 매향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을 새겼다.

맹진리 장군바위 매향비(埋香碑)

일반적으로 미륵신앙은 돌에 부처의 모양을 조각한 ‘미륵불과 이에 대한 신앙’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마산면 맹진마을 만대산 북서쪽 능선에 있는 속칭 ‘장군바위’에 새겨진 매향비는 부처의 형상이 아니다. 매향(埋香)의식을 하면서 그 연유와 시기, 장소에 관련된 사람이나 집단을 기록한 비문이 평평한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매향의식은 향을 피우면서 세상으로 내려온 미륵부처를 맞이하는 의식의 일종으로, 하생하는 미륵부처를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는 의식이다. 향을 묻어 복을 구하는 기복적 성격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다. 어째서 산등성이 장군바위에 매향의식을 기록한 매향비를 기록했을까? 

예전에는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 지금은 영산강지구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막혔지만, 해남군 산이면과 영암군 미암면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특히 매향비 아래 북창마을은 해상으로 유통되던 곡식을 쌓아두는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으로 예로부터 배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던 포구였다.

이 장군바위에 새겨진 매향비문은 좁은 바위틈 사이의 자연암벽에 10행 59자가 음각됐다. 매우 은밀한 장소에 써져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속에서도 원형대로 잘 보존됐다.

비문은“죽산현(해남의 고칭)의 동쪽 구포(具浦)에 미타향도(彌陀香徒) 58명과 상당(上堂)주민들이 함께 모여 매향을 하고 영락(永樂) 4년(1406년, 태종 6)에 비를 세웠으며, 매향의식은 법각(法覺)의 주관하에 혜관(惠觀)등이 참여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비에 나오는 향도의 숫자 58명과 상당주민 100인은 조직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으로 향도와 일반 백성과의 관계를 말해준다.

고려시대의 향도 조직은 천여 명을 넘는 꽤 큰 규모였는데 행정조직과 승려가 밀착된 것이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점차 분화 축소돼 자연촌을 중심으로 소규모 촌락 공동체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 장군바위에는 예로부터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제대로 해석하면 거기서 500보 이상, 즉 1km 내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군량미 수천 석에 해당하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 만대산 일대에 향나무가 많이 숨겨져 있는데, 단지에 들어 있는 그 향은 자명고(自鳴鼓)와 같아서 전시 때 향을 피우면 적이 침범해 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렇듯 매향비가 바닷가를 중심으로 두루 퍼져 있음은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반증도 된다. 해안으로 쳐들어온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을 것이며, 지방 오지에서 자행되는 관권의 수탈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민중들은 사회를 말법 세상으로 보고, 하생해 자신들을 해방해 줄 미륵부처를 찾은 것이다. 

 

사진. 유동영

 

정윤섭
고산윤선도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했고 현재는 지역의 다양한 역사문화를 소재로 한 글쓰기 작업을 한다. 2011년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경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녹우당』이 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