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바닷가 절인 미황사에는 독특하게 미황사 군고패(사찰 살림을 위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주받는 풍물패)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890년대 후반, 미황사 군고패가 미황사 불사를 위해 해남 지역과 여러 섬을 돌아다니다가 완도 밑에 있던 청산도 앞바다에서 수몰됐다는 내용이다. 군고패 중 단 한 명만 목숨을 건졌고, 그로부터 미황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보통은 농악패, 풍물패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해남 지역에서는 군고 혹은 금고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불린다. 사찰과 연계될 때는 걸립패라 칭하기도 한다. 옛적에는 마을마다 정월대보름에 대동놀이를 벌이는데, 중심에 있던 놀이패다. 박필수(59) 씨는 현재 미황사 군고패를 조사하고 계승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미황사 군고패를 찾아
“미황사 부도전 앞으로 있는 장춘마을에 ‘군고각’이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연습도 하고, 해남의 곳곳 마을을 돌아다닌 거죠.”
해남 사람들에게 군고패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박필수 씨는 1989년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 마을의 당제(堂祭)를 찾아다니며 미황사 군고패의 여러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제가 자란 곳이 송지면 산정마을이에요. 미황사 바로 밑에 있어 군고패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마을입니다. 정월 열나흘이면 큰 은행나무 아래서 당제를 모시고, 그 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큰 놀이판을 벌였습니다. 아버지가 군고패 상쇠(꽹과리를 치면서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였는데, 저는 덩달아 아이들 모임의 상쇠였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로 옮겨와 고향과 멀어졌다. 이때 심한 향수병에 걸렸다. 녹음해 뒀던 고향 어른들의 상여 소리, 모내기 소리, 군고 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언젠가는 돌아가야지’라는 다짐을 수시로 했다.
넓은 세상과 만나고 싶어 학문의 길을 접고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기도 했고, 1989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막걸리를 들고 동네 어르신들을 은행나무 아래에서 만났다. 어른들의 노래와 풍물 소리에 그리움을 놓고 말았다.
“어른들의 거친 호흡으로 이뤄지는 소리에는 고된 노동과 삶이 녹아 있습니다. 훈련을 통해 이뤄지는 전문 집단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소리와 몸짓이죠. 그제야 ‘아름답다’라는 감성에 빠져들었죠.”
마을 사람들과 놀이패를 구성하기도 하고, 마을잔치나 농민회 행사에서 악기를 쳤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들었던 ‘미황사 군고패를 찾아보자’는 인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미황사를 자주 갔다. 어느 날은 기둥에 앉아서, 어느 날은 법당에 앉아서 청산도 앞바다에서 수몰된 미황사 군고패를 상상했다.
곳곳에 남아 있는 ‘군고패’
해남뿐 아니라 고흥, 완도, 진도 등 여러 마을과 섬에서 이뤄지는 당제를 돌아다녔다. 미황사 군고라는 이름은 심지어 신안군 섬마을에도 흔적을 남겼다. 박필수 씨의 조사에 의하면 2001년까지 해남군 500여 마을 중에 100여 곳이 당제를 지내거나, 자그맣게라도 의례를 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완도의 횡간도라는 섬 당제에 참여했는데, 소리와 음악이 훌륭했다. 박필수 씨가 상쇠에게 물었다.
“어디서 배우셨어요?”
“동네에서 배웠죠. 우리 동네 꽹과리 잘 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미황사 군고에 참여했어요.”
“그러면 그분도 물에 빠져 죽었어요?”
“아니요. 그분은 그 배에 타지 않았어요.”
몇 마디 말에 큰 울림이 왔다. 수몰되지 않았던 분은 비번(非番)이었다. 군고패가 한팀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은 노화도의 갯제(바닷가에서 진행되는 제)에 갔는데, 세미(쌀) 세 개를 놓고 제를 지내고 있었다. 연유를 물었다.
“옛적에 미황사 군고가 우리 동네에 왔었는디, 가는 길 다음 날에 수몰됐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때 세미를 더 줄 걸 하는 마음으로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렇게 갯제를 지내지.”
그렇게 바닷가 마을마다 미황사 군고패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 얼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미황사 군고패는 1890년대 어느 날, 미황사 재건을 위해 해남을 떠난다. 해남 당하리에 있는 칡머리당 당할머니에게 ‘떠나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이 섬, 저 섬을 향해 나선다. 섬에 도착해서는 ‘통문’을 먼저 보낸다. 우리가 섬에 들어가도 되겠느냐, 음식을 내어줄 수 있겠느냐를 물어보면서 허락을 받는다. 놀이판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녘에 새로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어느 날, 청산도에 통문을 보내고 섬으로 들어가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수몰당한 것이다.
영혼들의 섬, 미황사
몇몇 생각이 박필수 씨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군고패가 미황사 불사를 위한 시주를 받기 위해 이 섬 저 섬을 돌았는데, 쌀과 미역을 얻으러 그 먼 길을 갔을까?’, ‘돌아다니는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시주로 받은 쌀로 미황사 불사를 짓는다고?’ 이런저런 생각이었다.
하루는 이진마을을 갔는데, 제주도에서 건너온 현무암이 돌담에 박혀있었다. 아마도 배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한 돌이었을 터.
“군고패는 쌀을 시주받으러 다닌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섬 저 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바닷가의 수많은 영혼을 위로해 줬던 거죠. 바닷가에는 쓸려온 시신마저 걷어서 잘 보내는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군고패는 각종 해난사고 등을 당한 영혼을 위로하러 바다와 산을 다녔구나’ 하는 말을 현무암이 건네더라고요. 군고패는 이런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미황사를 재건하고자 했던 거죠.”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미황사는 1,000년 동안 이렇게 바닷가 사람들의 의지처가 됐던 것이다. 새삼 그 마음이 느껴졌다. 그 후 군고패의 뜻을 기리며 미황사 산사음악회, 괘불재에 동참했고,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여러 일을 벌였다.
120년의 인연
2000년대 중반 미황사 불사가 어느 정도 이뤄지고 회향을 앞두고 있을 때, 박필수 씨는 미황사 스님에게 “군고패가 일구고자 했던 미황사 불사가 100년 넘어 회향하니, 군고패가 수몰된 청산도를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스님, 신도들과 함께 군고패가 배를 타고 떠나기 전 인사를 드렸던 칡머리당에 인사를 드리고 청산도로 떠났다. 군고패가 청산도를 다시 찾는 것은 120년 만이었다. 섬에 들어서려니 부두에서 한 명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통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제를 터부시하는 사람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뱃머리에서 “어째 그런다요?” 물었다. 제를 앞둔 박필수 씨에게 가슴을 적시는 한마디 말이 울렸다.
“군고패가 수몰될 때, 한 명이 살아남았잖아요? 제가 그 한 명을 구조한 분의 후손입니다.”
이렇게 미황사를 두고 남도 바닷가 사람들의 120년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