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의 바다 우수영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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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의 바다 우수영 관광지
  • 명현관(해남군수)
  • 승인 2024.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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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 명량대첩과 우수영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한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키면 
천 사람을 막을 수 있다.”

 

명량의 바다, 울돌목

133척의 왜선에 맞선 단 13척의 배. 428년 전 우수영 앞바다 울돌목 거센 물살 위로 죽음을 각오하고 일자진(一字陣)을 펼친 조선 수군들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열세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승승장구하던 133척의 왜 함선을 격파하고 1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치는 기적의 대승, 명량대첩을 거두게 된다.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대승으로 기록되고 있는 명량대첩 역사의 현장, 울돌목에는 변함없이 회오리 물살이 몰아치고 있다. 

해남 우수영과 진도 녹진을 가로지르는 좁은 해협인 울돌목은 이곳의 급류가 서로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바다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명량(鳴梁), 즉 ‘울돌목’이라고 불린다. 실제 측정해 보면 평균 10노트(kn), 시속 18km의 물살이 흘러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빠른 급류지로 유명한 곳이다. 지명인 우수영(右水營)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1440년 세종은 전라도 수군의 본영인 전라수영을 황원의 주량(周梁), 지금의 우수영에 설치하게 된다. 주량의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된 것은 성종 10년(1479)부터의 일로, 전라도 서남해안이 너무 광범위해 여수에 좌수영이 개설됐고 이곳이 우수영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우수영은 대한제국이 신식 군대로 재편한 1895년(고종 32년)까지 전라우도 수군의 총지휘부로 해안 방어를 전담하게 된다. 

 

명량대첩

우수영의 역사에서 명량대첩의 대승은 임진왜란 당시 실로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후 조선 수군은 백척간두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백의종군하던 중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그날로 장흥 회룡포에 이르러 간신히 12척의 범선을 수습해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명량대첩을 앞두고 배 한 척이 추가돼 13척이 됐다.)

이때 왜군들은 330여 척의 배에 2만여 명의 군인들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에 머물러 있던 육군과 합세해 서울을 침범하려는 계획이어서 울돌목의 장악은 매우 중요했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 때부터 울돌목의 지형 조건을 파악한 이순신 장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울돌목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쇠줄을 설치했다든가 부녀자들을 동원해 강강술래를 돌게 하며 적군의 눈을 속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드디어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일본 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량으로 공격해 왔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벌어진 격전, 왜선이 이순신 장군의 배를 포위하는 위기에서도 장군은 적장 마다시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렸던 조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旗艦)을 잃은 왜군들은 혼란에 빠지게 됐고, 조선 수군은 왜선 130여 척을 대파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순신 장군조차도 그날의 승리에 대해 ‘천행(天幸)’이라 난중일기에 적었을 정도이니 하늘이 도운 대승이 아니 할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략과 목숨을 마다치 않고 싸운 수많은 해상의병, 더불어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만들어낸 삼위일체의 승리는 천행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전라우수영

우수영 관광지는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울돌목이 내려다보이는 해안가 언덕에는 당시의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기념공원이 조성됐다. 명량대첩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명량대첩탑’이 높다랗게 조성된 주변으로 울돌목 앞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우수영 성문 앞에는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과 명량대첩의 역사를 담아낸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 전시관’이 건립돼 운영 중이다. 명량대첩 현장을 화면으로 만나는 4D 상영관과 조선의 판옥선(板屋船)과 왜선을 재현하고, 당시 무기 등을 전시해 조선 수군의 전력과 전술, 지형 등 승전 요소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우수영의 지명은 기념공원 내에만 한정돼 있지 않다. 문내면 우수영 전체가 우수영성지(右水營城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수영성지는 지난 9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5호로 지정됐다.  

전라우수영 유적 내에는 우리나라 수군진성 중 가장 큰 규모인 석축 성곽 1,872m와 현재도 남아 있는 원문을 비롯한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 객사·동헌 터와 함께 영창 터 등 각종 군사 시설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따르면 영내에는 민가 620호, 수군 병력 1,085명을 보유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명량대첩비

울돌목에서 5분여 거리에 있는 충무사(忠武祠)는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이곳에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보물 명량대첩비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했다. 국가의 대란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온다는 충절의 비로 유명한 명량대첩비에 얽힌 일화는 우수영 주민들의 애국정신을 잘 전해준다.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는 왜란 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비를 뜯어내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어버렸다. 해방되자 우수영 주민들은 기성회까지 조직하고 수소문 끝에 대첩비를 발견, 서울에서 우수영까지 우여곡절 끝에 비를 옮겨 왔다. 비를 되찾아오기는 했지만 비각을 조성할 비용이 없었던 주민들은 풍물패까지 구성해 각지를 돌며 모금 활동을 벌인 끝에 1950년 학동리에 비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명량대첩비는 지난 2012년 다시 한번 원 설립지인 동외리로 이전하면서 주민들의 오랜 염원을 마무리하게 됐다. 

치열했던 명량대첩 현장을 그대로 옮긴 명량대첩비부터 망해루, 충무사 등의 유적이 역사를 대변하듯 자리 잡고 있는 우수영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 ‘우수영 강강술래’, 우수영 민초들의 삶을 위로했던 노동요 <우수영 부녀농요>와 <들소리>, <우수영 용줄다리기> 같은 역사와 전통이 결합한 독특한 문화예술 자원들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 유동영

 

명현관
해남군 화산면 출신으로 지난 2018년부터 해남군수로 재직하며, 민선7, 8기 해남군정을 이끌고 있다. 해남형 ESG를 통해 공평, 공정, 공개의 군정 운영으로 매니페스토 6년 연속 최우수(SA) 등급을 획득하는 등 신뢰행정 구축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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