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니라 시작의 땅
땅의 끝. 땅, 끝. 세상은 넓고 땅끝은 많다. 우리나라만 해도 동서남북 네 곳에 땅끝이 있다. 그중 해남은 육지 중 남쪽의 끝, 땅끝이다.
그렇다면 누가 해남의 땅끝을 찾는가? 끝에 서본 자, 그 끝에서 시작을 꿈꾸는 자 함께 찾아든다. 차마 놓아버릴 수 없어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고 싶은 자, 불끈 솟는 열정에 불꽃을 점화하고 싶은 자 앞다퉈 해남 땅끝을 찾는다. 그래서 땅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의 땅이며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나희덕, <땅끝> 중에서
끝이라는 땅에서 사람들은 삶, 죽음, 절망, 희망이 안팎으로 뒤섞인 감정과 상황을 부려 놓으며 이율배반의 인생을 만난다. 땅의 끝, 땅끝에서.
미황사 창건 설화의 시원, 사자포구
사자봉 땅끝전망대에 올라 가슴을 펴고 사방을 둘러보라. 아기자기한 섬들과 어우러진 완도 바다 풍경에 깃든 평화를 만날 것이다. 서쪽 바다 저 멀리 너른 품으로 버티고 선 진도의 풍광에 매료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파란 바다와 더 파란 하늘이 만나는 그 끝에 제주도 한라산이 가만히 모습을 내밀지도 모른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곳. 부디 거기 앉거나 서서 땅끝이 건네는 온기를 포근히 느껴보시라.
우리나라 최남단 산은 갈두산이며 그 봉우리는 사자봉이다. 해발 156m의 아담한 높이인데 사자 머리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봉수 형상의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사자봉에서 서쪽으로 난 아랫길을 따라가다 보면 포효하는 사자의 입을 닮은 사자포구가 나온다. 사자포구는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온 배가 길지를 찾아와 정박하기로 마음먹었던 한반도의 첫 땅이었다. 배에 실린 검은 돌멩이를 깨고 나온 소가 내달리다 멈춘 곳에 경전을 봉안하고 절을 세웠다는 미황사 창건 설화의 시원이기도 하다.
땅끝다운 땅끝이란?
예로부터 사자봉에는 갈두산 봉수대가 있어 진도, 완도, 제주도를 잇는 긴급 통신수단 역할을 했다. 이순신 장군이 활약하던 임진왜란 때도 그 쓰임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남 사람들은 이곳을 ‘토말(土末)’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1986년 국민관광지가 되면서 차차 땅끝이라 부르게 됐다. 땅끝에서도 땅의 끝인 지점에 땅끝탑을 세우고 위아래를 바꾼 한반도 형상을 조성하면서 끝이 아닌 시작의 땅임을, 대양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는 첫 땅임을 선포했다.
땅끝이 해남의 상징 관광지가 되면서 모노레일,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조각공원, 산책로가 만들어져 다양한 땅끝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땅끝만이 갖는 상징성이 부족하고 낯익은 관광지 어촌에 불과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맞다. 옷을 벗듯 자신이 짊어진 모든 것 부리러 오는 사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자 오는 사람, 달뜬 마음 안고 새날의 깃발을 높이 든 사람들 그들에게 맞춤한 땅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남도 들녘과 남도 사람들
바다의 풍광도 그러하거니와 해남 곳곳에서 만나는 들녘의 정취 또한 평화롭고 안온하고 정감 넘친다.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 황톳빛 땅에서 자라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헛헛한 마음이 채워진다. 내 손길 한 번 스친 적 없지만 꽃을 피우고 바람에 흔들리며 노랗게 익어가는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단박에 경이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냥 내가 평화가 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고단한 인생일지언정 묵묵히 논과 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가 주는 감흥 또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땅끝 해남에서.
물김 최대 위판장의 위기
들과 산과 바다와 사람들이 엮어내는 합주를 들으며 땅끝에서 15km쯤 가면 어란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지형이 마치 난초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어란은 우리나라 최대 물김 위판장이 있는 곳이다. 물김은 바다에서 막 채취한 상태의 김을 말한다.
김 채취가 끝난 철이긴 하나 선창이 한가한 것을 넘어 괴괴하다. 북적대던 예전 모습은 찾을 수 없다.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와 진도군 사이에는 1,370ha 만호해역이 있다. 두 지역이 함께 김 양식을 하던 곳인데 지난해 대법원이 진도군의 어업권만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이곳 어민들이 어장을 잃은 탓이다. 170여 어민이 그 피해를 봤고 특히 김 양식을 전업으로 하는 젊은 어민의 피해가 컸다. 빚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면서 어란은 지금 깊고 짙은 절망을 앓는 중이다.(2024년 6월 18일, 해남과 진도의 만호해역 김양식장 어업권 분쟁이 합의에 이르렀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편집자 주)
논개는 알고 어란은 모르고
이곳은 조선시대 수군만호가 있었던 곳으로 진성이 축조됐으며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의 식량보급소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 가옥 몇 채가 남아 있다.
진주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던 여인 논개. 그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 어란이다. 물론 역사적 자료가 많지 않고 연구 또한 부족해 그 인물에 대한 실체가 검증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몇 사료와 주민들 입을 통해 전해오는 이야기에서 어란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어란에는 그가 투신했다고 전해지는 여낭터와 그를 위해 만든 어란 할머니 석등, 그리고 어란 여인상이 있다.
명량대첩 승리를 거들다
1597년 8월은 명량해전을 앞둔 때였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이곳 어란에 머물다 진도 벽파진으로 진지를 옮겼다. 일본군이 명량해협을 지나 진격할 거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 뒤 왜장 스가 마사가게가 군선 몇 척을 이끌고 어란에 염탐하러 왔다 기생으로 알려진 어란을 만나게 된다. 일주일 뒤 총대장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어란에 들어오고 곧이어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까 스가 마사가게와 어란은 일주일 남짓 연인으로 함께 지낸 것이다.
어란의 미색에 빠진 스가 마사가게는 곧 있을 명량해전의 기밀을 어란에게 발설하고 어란은 포로로 잡혀 있던 김중걸을 구해준 뒤 그에게 왜군의 계획을 알려준다. 이 소식은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진도 벽파진에 있던 본진을 해남 우수영으로 옮겨 왜군의 침략에 맞서게 된다. 그 결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물리치는 대승을 거둔다.
스가 마사가게는 벽파진에서 익사한다. 어란은 비록 나라를 위한 일이었으나 스가 마사가게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어란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 “왜군이 어란항에서 출항할 때 적장의 시중을 들던 조선 여인 1명이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는 어란임을 짐작하게 한 구절이 나온다.
어란의 흔적을 찾아
1597년 9월 17일 마을 앞바다에 어란의 시신이 떠올라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 밑에 그를 묻고 충절을 기리고자 석등을 세웠다고 한다. 포구에서 바닷길 따라 산비탈 쪽으로 가면 위태로운 낭떠러지에 어란이 떨어져 죽었다는 여낭터와 그의 작은 동상이 서 있다.
포구 한편에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있고 어불도로 건너가는 간이 선착장이 있는데 그 근처에는 어란 할머니 석등이 있다. 팔순의 어른들은 밤이면 이 석등에 불을 밝혔다고 기억하는데 사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없는 석등이다. 아마 남포등을 평평한 상단에 올려놓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등대가 없던 시절 등대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부처를 닮은 섬, 어불도
어란을 마주 보고 있는 작은 섬 어불도. 생긴 모양이 부처님을 닮아 갖게 된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상당 기간 섬을 비우는 정책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다 300여 년 전부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머물게 됐다. 육지에서 1km 남짓 떨어진 어불도는 2025년에 다리가 놓아질 계획이다.
세상에는 제 가치 이상으로 알려진 허명도 많지만 제 존재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 가치 있는 것들도 제법 있다. 어란이라는 여인의 존재를 아는 이 몇이나 될까? 가치는 놔두고라도 실존 인물인지 만큼은 연구됐으면 좋겠다.
마을을 감싼 채 쌓은 이진성
어란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 완도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완도 가기 전 들머리에 이진성이 있다. 이진성은 두륜산의 남쪽 끝점과 달마산의 북쪽 끝점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이진리에 있는 성이다. 남북은 높고 중앙은 낮은 분지형으로 옴팡진 곳에 마을이 자리해 성 또한 마을을 감싼 타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닷가를 따라 돌로 쌓은 성인데 고려 말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다 조선 선조 때인 1588년에 군대의 진을 세우고 1627년에 만호진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총길이가 2.5km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970m 남짓 남아 있다. 1차 방어선인 해자를 설치했다는데 그 흔적은 없다. 마을 통로로 이용하는 곳에 동문과 서문 터가 남아 있고 제법 규모를 갖춘 옹성을 복원해 놓았다. 이진성에는 제주도 출입 통제소가 있었고 제주도로 말을 수송하는 시설 또한 있었다.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수군만호비 4기가 남아 있다.
이순신의 토사곽란을 잠재운 우물
이진성은 이순신과 인연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받고 진주에서 하동, 구례, 곡성, 순천, 보성, 장흥, 강진을 거쳐 종착지인 해남 우수영까지 오는 동안 이곳 또한 거쳐 갔다. 전투력을 상실한 수군의 재건을 위해 병사를 모으고 군량미와 무기도 구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 이진성에 이르러 토사곽란에 처하고 말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이진성 안에 있는 우물물을 떠다 마시니 차츰 몸이 회복됐다. 이곳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마셔 병증이 나았다는 우물을 장군샘이라 부르게 됐다. 남문 터 가까이에 이 우물이 남아 있다.
풀들이 우거져 성 위를 거닐며 주변 풍광을 감상하기는 어렵다. 통행이 허락된 곳들을 사부작사부작 걸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성이다. 특히 높낮이가 다른 지형에 자리한 집들이 층위를 달리하며 들어앉은 마을의 집들을 골목 따라 찾아다니는 맛이 좋다. 돌담으로 혹은 시멘트 벽돌 담장으로 구획 지어진 집들의 마당에 소담하게 자리한 텃밭과 정원의 꽃들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다. 남문 터 성 위로 방풍림으로 열 지어 서 있는 소나무들의 우람한 모습도 볼만하다.
멀리서 풍경으로만 바라봤던 이진성을 천천히 걸으며 만나니 좀 더 깊이 안 것 같다. 파란 하늘과 살랑이는 바람이 한몫 거들었다.
사진. 유동영
서관순
『불교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으며 지금은 자서전 쓰기 수업과 책을 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내 인생 한번 못 산 거시 한이제』, 『자연산 버섯전문점 호남식당 조경애』, 『눈물로 핀 할미꽃』, 『내가 짊어진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 등의 구술 자서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