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하면 으레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이 떠오른다. ‘법정 스님 = 무소유’라는 등가 공식은 『무소유』 글(산문집)로 인해 성립됐다. 스님의 최고 베스트셀러는 『무소유』가 아닌 『서 있는 사람들』(1978)로, 당시(1979) 연령과 지역 및 성별과 무관하게 가장 많이 읽힌 국내 서적으로 뽑혔다. 그럼에도 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상징이 됐다. 스님은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완벽한 무소유 삶을 산 사람이어서인가? 그건 아니다.
스님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대두된 소유의 폭력을 지적하며, 단지 인간의 삶인 선택의 삶에서 맑은 가난을 택해 그것을 행하며 지켰기[行持] 때문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울림이 어디 있겠는가.
미니멀 라이프와 무소유의 삶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 법정, 「무소유」(1971년 3월) 중에서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기른 난에게 느꼈던 그 행복이 실상은 본인의 집착이자 일종의 족쇄였음을 깨닫고 “이때부터 하루에 한 가지씩 버리고자 다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스님은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무소유와 상반된 소유의 폭력성에 대해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스님의 태도는, 현대사회의 한 부류를 이루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불필요한 일이나 물건을 줄이고 그것을 최소화·단순화하는 삶)를 연상시킨다. 특정 부류만 관심을 가지던 미니멀 라이프는 코로나를 겪으며 집 안에서 일상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 시기 한정된 공간에 불필요한 물건이 주는 답답함이었다. 이후 공간과 물건, 그리고 일에 대한 고민이 보편화돼 세계적으로 정리 및 버리기, 단순화가 유행처럼 번졌다. 이제는 ‘물건, 공간, 시간, 돈, 마음’의 관리 영역으로 미니멀리즘이 세분화됐고, 여기에 부의 과시 일종인 ‘사치 미니멀 라이프(큰 공간을 낭비해 고급 호텔처럼 삶의 느낌이 없도록 꾸미는 것)’와 빈곤으로 어쩔 수 없이 ‘강제된 미니멀 라이프’의 갈등까지로 진화하게 됐다. 마치 무소유적 삶을 위해 또 다른 층위의 무소유를 빌려오는 꼴이다.
간디, 비노바 바베, 헨리 소로
이와 같은 갈등이 모두 녹아 있는 것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개념이다. 스님의 무소유 핵심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선택한 맑은 가난”에 있다.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좀 더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유보다 값지고 고귀하다.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 그 의미라 한다.
요약하자면, 스님은 “맑은 가난[淸貧]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을 말하고,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가난의 정신”이라 했다. “선택한 맑은 가난, 갖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스님의 무소유는 개인적 삶의 편리에 방점이 있는 ‘미니멀 라이프’와 그 층위와 방향을 달리하는 원천이다.
맑은 가난을 선택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적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동국대 김호성 교수의 BBS강의에 의하면) ‘간디(1869~1948), 비노바 바베(간디의 제자, 1895~1982), 헨리 소로(1817~1862)’ 세 사람이다.
간디의 경우는 스님의 「무소유」 글에서 함께 출발한다. 첫머리에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라는 구절에서 스님은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70~80년대 절집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님의 수행자로서의 기본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때의 절집은 몹시도 어려워 아끼고 아끼는 생활로, 그 시절은 ‘정혜(定慧)’가 아닌 ‘복혜쌍수(福慧雙修)’로 “복” 짓는 하루하루였다. 그럼에도 스님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더 맑은 가난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간디의 제자 비노바 바베는 1971년 법정 스님이 인도 여행 중에 만났다고 한다. 비노바 바베는 간디가 칭송한 성자로, 인도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이끌었고, ‘부단운동(토지헌납)’을 이끌며 20년간 맨발로 걸었던 실행의 수행자였다. 마지막으로, 소로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월든』(1854)의 저자다. 김호성 교수에 의하면 스님은 소로의 후신이 아닐까 할 정도로, 경전보다 더 『월든』을 좋아한 것 같다는데, 스님은 『월든』의 책 내용처럼 살아오신 듯하다.
돈오점수의 행, ‘맑고 향기롭게’
법정 스님은 해남 출신으로 전남대 상대 재학 때, 선학원(현재 서울 안국동)에서 효봉(1888~1966) 스님을 만나 삭발하고,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로 출가 생활을 시작했다(1954). 해인사 강원을 거쳐 통도사에서 운허(1892~1980) 스님과 맺은 인연으로 동국역경원의 번역을 위해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렀다. 은사 효봉 스님과 평양고등보통학교 선후배인 함석헌 선생과는 함께 『씨알의 소리』 발행에 참여할 정도로 두 사람의 인연은 깊었다. 그 당시(1960년대), 스님은 불교신문사 주필로 있으면서 ‘월남전 파병을 반대한다’는 글을 실었는데, 여기서 종단과 갈등이 일어났다. 이 일로 총무원장 스님이 ‘승적을 박탈하겠다’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제도권 불교와는 인연을 끊기로 마음먹고 스님은 그렇게 지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 인혁당 사건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닫고, 수행자의 본분을 되찾기 위해 송광사 조계산 한 칸 암자인 불일암으로 들어갔다(1974). 혼자 밭을 매고 밥 지으며 지낸 17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일과를 매일 지켰다. 한 칸의 암자, 즉 한 칸의 방인 인법당(因法堂, 스님이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곳)이기에 불일암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은 모두 방 안이 아닌 마루에 걸터앉은 모습이다.
필자가 볼 때, 불일암과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은둔한 무소유를 행한 것은 간디와 소로의 삶이었다면, 중생구제의 이타적 회향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인 보조사상연구원(1987) 및 송광사 여름수련원(1971) 설립과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 출범(1992)은 바베의 삶이었다.
스님의 사회적 확충과 그 실천의 삶은 오랜 칩거 생활에서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돼서는 안 된다”는 것과 “내가 사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얻어들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눠야 된다”는 깨달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스님이 평생 유일하게 원장을 맡은 곳은 보조사상연구원장(1987)과 송광사 여름수련원장(1971)인데, 스님이 정성과 애정을 더 쏟은 쪽은 여름수련회였다고 한다. 보조사상연구원은 한국 절(송광사)에서 최초로 (본인이) 설립한 연구원으로, 당시 해인사 성철(1912~1993) 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전국을 강타하던 시절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 돈오돈수가 아닌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꺼내 들었는가? 당시 스님을 곁에서 모셨던 김호성 교수는(『불교평론』 2018년 3월호) 스님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깨달은 다음의 수행, 곧 점수에 대한 재인식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닦음은 단순히 마음속의 번뇌, 즉 ‘오염을 막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행을 두루 닦아 이웃을 함께 구제하는 일”이기에 “돈오돈수에는 중생구제의 비원과 행이 결여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돈오점수의 행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맑고 향기롭게’ 시민운동을 전개하면서 “실질적인 선행을 했을 때 마음은 맑아진다. 선행이란 다름 아닌 나누는 행위를 말한다. 내가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아 있던 것들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행위일 뿐”이라고 스님은 강조했다. 즉, 선행이란 단순한 보시의 의미가 아닌 제 자리로 되돌려주는 회향임을 담아내고 있다.
스님은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이고, “스스로 맑은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하는 것”이라 했다. 비구 법정 삶의 위대함은 맑은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행하고 지켜[行持], 사회의 모두에게 되돌려주는 실천(회향)을 한 데 있다. 요즘 스님들 사이에서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승가를 ‘취업승’과 ‘출가승’으로 나누겠는가. 그만큼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며 양심에 따른 실행을 하는 삶(출가승)이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승가마저 출가자(수행자)가 그리운 요즘이다. 스님은 출가자로서, 수행자로서 그 본분에 충실하고자 맑은 가난을 평생 행하고 지켜온 전형적인 출가승이었다. 스님은 평생 기본에 충실한 출가승, 평범한 출가승의 가치를 몸소 보였다.
우리를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정신적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우고,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 법정 스님의 살아온 날들에 찬사를 보낸다.
월조 효신 스님
동국대 강사, 철학과 국어학 그리고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