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창간 50주년] 생명의 위기와 공생(共生)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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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 창간 50주년] 생명의 위기와 공생(共生)의 윤리
  • 김종철
  • 승인 2024.06.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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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불광 ⑥ 1991~1993
권두수상 | 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우리 삶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거의 파국에 이르렀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가 기록된 이래 전대미문의 가공할 위기, 인간을 포함하여 생물들이 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불투명해져 가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이러한 사태는 대체로 환경위기라는 개념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위기라고 해야 한다. 환경위기라는 말속에는 어딘가 이런 사태를 적당한 기술적 방법에 의하여 짜깁거나 꿰매는 것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문제의 본질을 흐려놓은 안이한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위기는 환경과 인간을 분리해서 보는 이원론적 사고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으니만큼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본이나 더 진보된 기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의 일부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올바르게 깨닫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생태적 파국이라는 현실은 산업문명의 논리와 그것을 수용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상생활의 욕망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생활의 습관 속에서 길들여진 사고, 익숙해진 취미, 거의 본능화된 이기적인 욕구 충족 가운데 이미 폭력과 죽음에의 길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른바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또 남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때문에 개인 자동차의 소유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동차 한 대의 사회적 생태학적 비용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이 모여서 잠재적이든 현실적이든 인명과 자연만을 해치는 흉기가 되고 생활공간을 어지럽히고 인간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대기와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산성비를 내리게 하며 이상기후와 오존층 고갈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개인적 삶의 작은 행복의 추구가 생명공동체 전체를 훼손시킬 수 있는 경우를 여기서 우리는 보는 것이다. 핵무기나 원자력발전소 같은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냉철하게 보아야 할 것은 자동차 한 대가 생태학적으로 갖는 의미는 본질적으로 원자력발전소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궁 속의 태아가 자기의 태반을 찢고 할퀴고 구멍을 내는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미치광이 짓이 지금 산업문명과 과학기술과 진보라는 이름 밑에서 쉴 새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경제정책으로부터 기업경영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국면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계속하여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성장의 논리이다. 이 논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 인간성에 대한 물질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붓도록 강요하며 공공성의 윤리 책임감 명상적인 삶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 등을 말살시키려 한다.

어떤 적정한 한계 내에서는 비록 부분적인 것이라 해도 어느 정도의 행복을 약속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던 산업적 생활방식은 그것이 한계를 무시하고 무한대로 추구될 때 미증유의 비극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이제 명백하다.

사람들이 비록 물질적인 풍요와 편의를 임시로 누릴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인간성이 피폐해지고 흙으로부터 절연되고 창조적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이웃과 자연으로부터 격리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더욱이 그러한 물질생활의 편리 위주가 생존의 기반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있지 않는가?

아마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종래의 어떤 낯익은 방책으로도 수습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종래 사회변혁이론은 대개 간단히 말하여 빵의 공평한 분배에 관심의 초점을 두어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맞서서 체제 옹호론자들은 늘 상 분배하기에 넉넉할 만큼 먼저 빵을 크게 만드는 일이 선결문제라고 응수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빵 그 자체가 독으로 오염된 상황에서는 무슨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썩은 빵이라도 고르게 나누면 되는가?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당연시하고 과학기술을 맹신하며 생산력의 계속적인 증대를 사회 진보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하는 어떠한 ‘진보적인’ 사회사상도 이제 오늘의 이 비극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합한 사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옛날부터 인류의 지혜로운 스승들이 언제나 가르쳐 온 것은 인간이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생명의 근원적인 평등성과 상호의존성과 협동성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계급사회가 출현한 이래 인간이 그 자신도 그 일부인 자연을 적대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제도화하는 데 무엇보다 큰 작용을 한 것은 사람이 배타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귀하게 여기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이었을지 모른다. 산업문명은 이 욕망을 자극하고 극대화함으로써 마침내 인간관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전면적인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기술적인 재간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생(共生)의 윤리를 회복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공생의 윤리는 단지 추상적인 의미의 인격 수련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식들이 이 지상에는 평화롭게 지속적으로 생존을 누릴 수 있는 기초를 다시 세우는 데 필수적인 생활윤리라고 할 수 있다. 공생의 윤리야말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비폭력적인 것으로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생의 윤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다시 한번 옛 성현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랜 옛날부터 인류의 스승들이 가장 경계해 온 것은 인간의 교만이었던 것 같다.

옛 성현들이 거의 예외 없이 강조한 것은 사람이 자기를 낮추고 검소한 생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가의 오랜 전통에서 이러한 생각은 ‘무소유’의 개념 속에 집약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란 고통스러운 금욕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날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무소유의 생활을 실천해야 할 필요성은 이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다.

 

*1992년 2월호(통권 208호)에 실린 김종철의 글입니다. 당시 김종철은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해 영남대 영문과 교수, 환경교양지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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