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화상은 누구인가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것으로 알려진 아도화상(阿度和尙)의 행적은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수이전』 등에 전하고, 이를 종합한 듯한 내용이 선산 도리사(桃李寺)의 「아도화상사적비」에 기록됐다. 그러나 기록마다 스님의 활동 시기가 다르고, 때로는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墨胡子)와 같은 또 다른 스님의 행적과 겹치기도 한다. 때문에 아도화상이 과연 실존했던 인물인가 의심을 받기도 한다.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아도화상은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스님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불교를 전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파견된 스님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아도 스님이 이를 성공시킨 것이다.
그 과정은 크게 두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는 향(香)과 관련 있다.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선물로 향을 받아왔는데, 왕실에서 그 사용법을 몰라 전국을 돌며 수소문했다. 그때 마침 아도 스님이 향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신라 왕실에 불교의 존재를 알린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공주가 병들었을 때의 사건이다. 아무도 고치지 못한 공주의 병을 아도 스님이 고쳤고, 그 대가로 경주에 흥륜사 창건을 허락받은 것이다. 이 흥륜사 창건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게 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도 스님이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시기는 신라 미추왕, 눌지왕, 법흥왕 시절 등 달리 기록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중국에 다녀온 사절단이 향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과 흥륜사 창건이 아도 스님과 밀접하게 연관되므로 이 무렵을 아도 스님의 실제 활동 연대로 추정해 서술한다.
우선 신라가 중국에 사절을 보낸 시기는 521년 양나라가 처음이었는데, 향은 이때 받아왔을 것이다. 또한 이차돈의 순교가 527년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므로, 실제 아도 스님의 포교 활동 시기는 6세기 초 무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법흥왕 때의 일이다. 마침 경주 흥륜사 금당에는 신라불교를 이끈 스님과 불교인 열 분의 초상조각이 모셔져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보이는데, 그 처음이 아도 스님이고 두 번째가 염촉, 즉 이차돈이었다. 이처럼 아도 스님의 역할이 법흥왕 대 신라의 불교 공인 및 이차돈의 순교와 연관 있음이 이런 사실들에서 확인되는 셈이다.
그러나 아도 스님 이전에도 불교를 전하기 위해 신라에 들어온 스님이 있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 ‘사금갑’조에는 비처왕(재위 479~500) 시기에 이미 불교가 신라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사가 보인다. 비처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서출지에서 신비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의 조언에 따라 궁궐로 돌아와서 거문고를 보관하는 상자에 활을 쏘아보니 그 안에서 왕비와 정을 통하던 분수승이 발각됐다는 것이다.
분수승(焚修僧)은 아마도 궁궐의 내불당에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재를 지내던 스님일 것이다. 만약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분명히 아도 스님 이전에 신라 포교를 위해 들어온 스님이 있었다. 아마도 왕실 여성들을 대상으로 먼저 포교에 들어갔던 불교이기에 토착 종교 세력들에 의해 제거된 사실을 이러한 스캔들로 기록했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아도 스님의 행적과 특징
아도 스님은 중국 북위에서 고구려로 파견된 사신 아굴마와 고도령이라는 고구려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둘의 만남은 한순간 불장난, 혹은 아굴마의 겁탈 정도로 잘못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도의 출생 성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 고도령이 고씨라면 고구려 왕족으로 볼 수 있는데, 마치 유목민족 사회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아내가 딸을 손님의 잠자리에 들여보내는 전통이 있었다고 하는 것처럼 당시 둘의 일회성 관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는 고구려 공주, 아버지는 북위의 고위 관리라는 아도 스님이 갖게 된 배경은 이후 아도가 신라에서 활동하는 데 큰 보탬이 됐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도령은 아도를 5세에 출가시켰다. 16세 무렵 아버지를 만나게 하려고 고구려 사절이 북위를 방문할 때 아도를 딸려 보냈다. 기록에는 사절단이 북위 황제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아도가 소개됐고, 황제가 직접 아굴마에게 아들을 잘 보살피라는 지시까지 내렸다고도 한다. 그 뒤 3년간 북위에 머물며 현창화상이라는 고승에게 불교를 배우기도 했다. 고구려로 돌아왔을 때 고도령은 아도 스님에게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 가서 포교할 것을 권했다. 이처럼 스님 일생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컸다. 신라 불교사가 새롭게 쓰여질 수 있었던 것도 고도령의 이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신라 포교는 앞서 비처왕의 사문갑 설화에서 보는 것처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아도 스님은 처음부터 경주까지 가지 않고, 우선 경북 선산 지역으로 잠입하다시피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다. 지금의 도리사 아래쪽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을 근거지로 해서 일종의 지하활동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스님이 모례의 집에 도착했을 때 모례는 “(이미 고구려 스님인) 정방과 멸구자 스님이 신라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도 또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엿보이듯 비처왕이 처형한 분수승도 아마도 고구려에서 온 스님들이었을 것이다.
만약 아도 스님이 비처왕 무렵 신라에 건너왔다면, 당시 신라에서는 일종의 반고구려 정서가 팽배해 있던 때였다. 앞서 눌지왕 때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반고구려 정서로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간섭뿐 아니라, 고구려에서 점차 발전하기 시작한 불교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도 스님은 모례의 집 토굴에 머물며 비밀리에 포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도 스님은 신라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남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고구려 승려가 아니라 절반은 당시 동아시아 강대국인 북위 국적을 지녔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고구려 승려들이 탄압을 당하고 있는데 왜 또 오셨느냐”는 모례의 질문에 대한 아도의 답은 아마도 “저들이 저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가 아니었을까?
아도 스님의 승부수
지방에서 포교하던 아도 스님이 경주로 진출한 계기는 양나라에서 사절단이 받아온 향이었다. 아마도 관리들이 전국에 방을 붙여 공고를 하지 않았을까. 당시 스님은 숨어서 포교하는 중이었기에 공식적으로 나서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향의 사용법을 알려줬다. 선산에 내려온 관리들에게 알려주고 말았는지, 아니면 경주까지 불려갔는지는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도 스님은 그저 지방에서 포교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신라에 건너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정체를 밝히고 경주까지 따라나서 법흥왕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였으리라 믿는다. 여기서 스님의 승부사적인 기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일로 당시 법흥왕이 얼마나 더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법흥왕으로서는 아도 스님을 ‘고구려 승려’라기보다는 ‘북위 사람’이라는 데 더 비중을 두고 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처음 중국 남조 양나라와 교류하게 된 입장에서, 북조인 북위의 승려가 신라에 와 있으면 추후 북위와의 외교에서도 긴히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정적 기회는 법흥왕이 공주의 치료를 아도 스님께 부탁할 때였다. 그때 스님은 치료의 조건으로 신라 전통 종교의 성지인 천경림을 요구했다. 그곳에 절을 짓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하는 게 도리에 어긋나 보이지만, 천연덕스럽게 이를 요구한 것에서 다시금 스님의 승부사적인 기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법흥왕의 공주가 누구였는지는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지만, 왕의 딸이라면 왕비 보도부인 박씨 사이에서 낳은 지소부인일 것이다. 지소부인은 이후 삼촌인 입종갈문왕과 결혼해 진흥왕을 낳았다. 진흥왕 역시 독실한 불교 후원자가 됐던 까닭은 아마도 자신의 어머니를 아도 스님이 살려준 바 있어 감사함과 함께 그 영험함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도화상의 여정, 도리사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경주에서 포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세운 절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모례가 아도 스님을 몰래 숨겨줬던 곳이었다. 전해지는 것처럼 아도 스님이 경주에서 돌아와서 세운 절이라면, 경주에 가서 향의 용도를 알려주고 돌아온 이후로 추정한다. 그 대가로 일차적으로 선산 지역에서의 불교 포교가 허락됐고, 신라의 첫 절로 도리사가 세워진 것이 아닐까.
비록 도리사는 당시의 유물은 없지만, 도리사의 석탑은 그 희미한 흔적일 수 있다. 일반적인 석탑 형태를 벗어난 이 탑은 어찌 보면 작은 금강계단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실제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단은 아니지만, 형태적으로나마 계단의 형식을 취해 이곳에서 아도화상이 계를 주지 않았을까. 이 탑이 원래 모습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다면 원형은 오히려 더욱 금강계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설령 아도화상 때 세워진 탑이 아닐지라도 그에 대한 기억과 오마주를 담기 위해 이런 특별한 탑이 세워졌던 것은 아니었을지 추정해 본다.
아도 스님은 도리사와 흥륜사 외에도 백제 지역을 포함해 많은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주로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세웠다고 한다. 임무를 마치고 미련 없이 길을 떠나는 스님의 모습은 마치 미국의 서부극 <석양의 무법자>의 한 장면같이 쿨함마저 느끼게 한다.
사진. 유동영
주수완
불교미술사학자이자 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전공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인도와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미술 도상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불꽃 튀는 미술사』, 『미술사학자와 읽는 삼국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