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법계 대화합의 장, ‘수륙재’
감로탱의 방대한 화면에는 파노라마처럼 무수한 존재들이 펼쳐져 있다. 천도재를 올리는 의례 장면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자비와 구원의 존재인 불보살이 포진해 있고, 아래에는 업의 굴레 속에 윤회하는 육도(六道, 천도·인도·아수라도·축생도·아귀도·지옥도)의 중생들이 가득하다. 감로탱은 수륙재를 지낼 때 영단에 거는 불화로, 불교의 세계관을 펼친 가운데 의례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말해준다. 조선 후기의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스님은 「수륙법어재후(水陸法語齋後)」에서, 야외에 감로탱을 걸어놓고 수륙재를 올리는 의미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했다.
“오늘 재(齋) 올리는 이들은 큰 신심을 일으켜 두루 공양을 마련하고 시방 법계의 모든 성인과 범인을 빠짐없이 청하였다. 이에 평등무차대회(平等無遮大會)라 일컫는 것이다. 이에 영가가 사성(四聖)의 가피를 입어 육범(六凡)의 고해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의 육도 중생들도 다 같이 이익과 복락을 받게 되니 이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사성 육범의 십법계(十法界) 가운데 인간세계의 한 존재가 오면, 나머지 아홉 세계도 동시에 와서 한마음이 된다. 비유하자면 십법계가 한 폭의 종이에 그려지는 것은, 인도(人道)를 그린 자리를 끌어당기면 아홉 자리를 그린 곳도 동시에 끌려옴과 같기 때문이다. 이에 재 올리는 이 자리에 사성 육범이 모두 와서 공양받을 것이니, …영가는 십법계의 가피를 동시에 입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되며, 오염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되리라.”
수륙재는 재주(齋主) 또는 여러 재자(齋者)가 영가천도를 위해 발심함으로써 개설된다. 법회를 여는 지극한 마음에 감응한 불·보살·연각(緣覺)·성문(聲聞)의 사성(四聖)이 도량에 참석해 가피를 내리고, 영가뿐만 아니라 모든 고혼(孤魂)과 육도 중생이 함께 그 공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성과 육도의 십법계(十法界)는 한마음으로 움직여, 육도의 한 존재를 위한 발원에도 나머지 아홉 세계의 존재가 모인다는 대목은 큰 감동을 준다.
아울러 이러한 수륙재의 관념적 구도가 ‘감로탱’이라는 불화 속에 그대로 가시화돼 있음을 설명했다. 한 사람의 영가를 위한 자리를 그림으로 그리면, 십법계 성속(聖俗)의 존재들이 자석처럼 저절로 법회에 이끌려와서 각자의 자리에 그려진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공에게 비춘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조명을 밝히면, 전체 등장인물로 가득한 무대 장면이 드러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특징은 ‘천지명양수륙(天地冥暘水陸)’, ‘수륙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 등으로 표현한 수륙재 의식문의 제목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 천지·명양·수륙·성범(聖凡)의 대극 세계와 존재를 거론한 다음, 모두 ‘무차 평등’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성인과 범부, 깨달은 자와 미혹한 자, 죽은 자와 산 자, 원수와 친지 등 시방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차별 없이 한자리에 모시고 평등하게 법식(法食)을 베풀며 소통하는 장임을 나타낸 것이다. 감로탱을 걸고 그림 중앙의 장면처럼 수륙재가 시작되면, 화면 상단의 불보살이 하단을 가득 채운 육도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 현실에서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림은 의례의 보이지 않는 세계와 목적을 가시화하고, 의례는 그림의 내용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다.
소청(召請), ‘구제의 대상’을 청하다
그렇다면 감로탱 아래쪽을 가득 채운 구제의 대상은 누구인가. 이들은 곧 수륙재 하단(下壇) ‘소청(召請)’의 단계에서 하나하나 청해 부르는 존재들이다. 대략 살펴보면 천인(天人)에서부터 제왕·왕후, 대신·재상·충의장수, 출가수행자, 평민·천민 등을 비롯해 지옥도와 아귀도의 중생들, 축생, 미물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거론된다. 육도 모든 존재를 아우르면서 인간계를 신분에 따라 구분하고 다시 굶어 죽은 이, 얼어 죽은 이, 뱀에 물려 죽은 이 등 온갖 죽음의 형태를 세세히 밝히는 것이다. 이들 구제의 대상은 감로탱의 화면 곳곳에 그려져 있다. 평소 신분에 따라 점잖은 모습 또는 생업에 열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 순간을 생생히 묘사한 재난 장면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모두 억울한 죽음, 준비되지 않은 죽음들이다. 생전의 모습을 담은 것이기에 죽은 자들이지만, 육도의 범주에서 윤회하고 있으니 현실의 존재로 보아도 무방하다.
감로탱에 이처럼 무수히 많은 이들의 온갖 죽음을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 명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죽음들, 제사를 지내줄 이 없이 떠도는 고혼을 위무하고 왕생하도록 도와주는 힘이 산 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해 예로부터 수륙재는 가장 공덕이 높은 의례라 여겨졌다. 개인의 극락왕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시방 법계를 떠도는 모든 고혼의 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의례이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이 설판재자(불사나 법회를 베푸는 비용을 내는 사람)가 됐더라도 그의 선망부모·조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혼을 천도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특정 영가는 물론 일체중생에게 더 큰 공덕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수륙재 구제 대상의 시원은 아귀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쁘레따(prḛta)’라 불리는 귀(鬼)의 단계를 거쳐 조령(祖靈)이 된다고 봤다. 조령이 되기 위해서는 제(祭)를 지내야 하는데, 이때 귀의 존재는 굶주려 있고 미혹함과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여겼다. 부모의 영혼이 굶주려 고통받는다는 인식은 후손에게 제를 촉발하는 것이 됐고, 팥을 뿌리거나 흐르는 물에 음식을 던지거나 음식 그릇을 들고 염불을 외는 등의 방식으로 조령제를 지냈다.
한편 2세기경의 대승불교 초기경전에서는 사후 다음 생을 받기까지 일정 기간 중음(中陰)에 머물며, 그 기간은 최소 칠일, 최대 칠칠일(49일)이라 규정했다. 아울러 쁘레따가 한역(漢譯)되는 과정에서 사후 영혼을 지칭하는 ‘귀(鬼)’에 굶주림을 뜻하는 ‘아(餓)’를 붙여 아귀(餓鬼)로 불리게 된다. 불교에서도 중음의 존재는 음식 냄새를 맡고 생을 이어가는 존재라 보면서 조령제를 수용해 ‘시아귀회(施餓鬼會)’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령을 굶주린 상태만이 아니라, 미혹함과 업의 굴레에 갇힌 존재로 여긴 출발점은 불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목에 해당한다. 이는 선악 개념과 무관하게 죽으면 후손의 제사를 받는 조상으로 자리 잡는 유교적 조상신과 달리, 영혼을 위한 구원이 필요하고 구원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하는 존재라면 시식(施食)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다음 생의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시아귀회는 윤회에서 벗어나거나 더 나은 내세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천도(薦度)의 성격을 본연적으로 지니게 마련이다. 이처럼 죽은 자를 위한 의례는 ‘조령제 → 시아귀회 → 천도재’로 전개되고, 모든 천도재는 음식 공양과 함께 감로의 법 공양으로써 미혹한 마음을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육도윤회(六道輪廻)의 파노라마
천도·인도·아수라도·축생도·아귀도·지옥도의 생명은, 육도에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감로탱에 등장하는 이들 존재는 대부분 수륙재 의식문에 근거할뿐더러, 조선 후기에 조성된 감로탱의 경우 인물 옆에 방제(傍題, 그림을 설명하는 글귀)를 써놓아 도상과 의식집의 내용이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천도(天道)의 신들은 극락정토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 화면의 중단에 그려진다. 천은 모든 즐거움이 온전히 갖춰졌으나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세계이다. 리움미술관 소장 〈감로탱〉(18세기)을 보면, ‘천인권속(天人眷屬)’의 방제를 적은 곳에 관·화관을 쓴 남녀 천인들이 표현돼 있다[도판 1]. 아울러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금은교(金銀橋)[도판 2]가 등장하는데, 이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뜻한다. 따라서 금은교의 바로 옆에 천인을 둠으로써 이들이 선정을 닦아 곧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나타냈다.
인도(人道)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로 신분과 죽음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된다. 제왕·왕후를 비롯해 관리와 장수, 출가수행자 등은 중단의 재단(齋壇) 곁에서 의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적인 모습을 지녔다[도판 3]. 이에 비해 평민·천민은 하단에 중생의 다양한 삶을 펼쳐놓은 풍속화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이들의 삶을 중심으로, 갑작스레 닥친 갖가지 죽음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충격을 준다. 예나 지금이나 신분이 낮을수록 준비되지 않은 죽음에 맞닥뜨리기 쉽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묘사한 것이다.
아수라도(阿修羅道)·축생도(畜生道)는 감로탱에 잘 표현되지 않는 세계다. 인도의 토속신을 불교에서 수용한 아수라는 지혜가 있으나 분노가 많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녔다. 소·개·호랑이·말·뱀·사슴 등으로 나오는 축생도(畜生道)의 경우, 인간계와 관련된 사례가 다수인 가운데 축생도의 처지 자체를 조명한 도상도 더러 보인다. 한 화면에 방대한 도상을 담지 못했을 뿐, 이들은 모두 감로탱과 수륙재의 의미에 포함된 존재다. 아귀도(餓鬼道)[도판 4]는 모든 구제의 대상을 대표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중앙의 재단 앞에 커다랗게 자리한 아귀는 육도 근처에 다다른 일체 중음신(中陰身)이자, 극심한 기갈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삼악도(三惡道, 지옥도·아귀도·축생도)의 한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귀의 또 다른 실체는 중생을 구하고자 함께 고통받는 비증보살(悲增菩薩)·초면귀왕(焦面鬼王)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감로에 목마른 아귀’는 현세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림 앞에 선 나’는 부질없는 탐욕으로 업의 굴레에 얽매인 육도 중생이자, 한마음을 돌이켜 구제를 서원하는 보살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옥도(地獄道)[도판 5]는 무간지옥·팔한지옥·팔열지옥·도산지옥·한빙지옥 등 8만 4천 지옥에서 고통받는 최악의 세계다. 초기 감로탱에 보이지 않던 지옥 장면이 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봉정사 감로탱〉(1765)에는 명부(冥府, 죽어서 심판받는 곳)를 묘사한 시왕도(十王圖) 하단처럼 갖가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지옥 중생을 남김없이 구하리라 발원한 지장보살은, 이들을 구해주는 존재로 짝을 이룬다. 따라서 〈남장사 감로탱〉(1701), 〈용주사 감로탱〉(1790) 등에는 하단에 강림한 지장보살이 석장(錫杖)을 두드려 지옥문을 열자 수많은 지옥 중생이 빠져나오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도판 6].
감로탱 속의 무수한 존재는 윤회의 바퀴 속에서, 또한 ‘누구든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명제 속에서, 독자적·배타적으로 구분돼 있지 않다. 설사 지옥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불보살의 보살핌 아래 미혹함에서 벗어나 상승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이자 문화재위원, 조계종 성보보존위원회 위원이다. 불교민속 전공으로 안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 『공양간의 수행자들』, 『한국불교의 일생의례』,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 『종교와 의례공간』(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