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직지사, 추풍령 넘어 수행자들의 야무진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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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 추풍령 넘어 수행자들의 야무진 터전
  • 노승대
  • 승인 2023.05.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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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담아둔 절]

향화가 끊기지 않은 가람, 직지사

추풍령을 넘어서면 바로 김천 땅이다. 곧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있는 고개가 바로 추풍령이다. 예부터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려면 큰 고개 셋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곳 추풍령과 문경과 충주 사이의 문경새재, 영주와 단양 사이의 죽령이다. 새재는 새들도 힘들어 쉬면서 넘어가는 고개라고 해서 한자로는 조령(鳥嶺)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세 곳 다 고속도로가 통과하지만 문경새재와 죽령은 터널로 뚫려 있다. 죽령터널은 그 길이가 4,600m로 한때는 가장 긴 터널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는 추풍령이 가장 완만한 고개였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은 추풍령이나 죽령을 경유하지 않았다. 추풍령을 경유하면 과거시험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경유하면 ‘죽죽~ 미끄러진다’는 속신(俗信)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구 방향에서 올라오는 선비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빙 돌아 김천-상주-문경을 경유해서 새재를 넘어갔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은 ‘문희경서(聞喜慶瑞)’, ‘기쁘고 경사스럽고 상서로운 일을 듣는다’는 뜻에서 왔다. 과거 응시자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자 하는 것은 간절한 염원이니 굳이 징크스가 있다는 고개를 넘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김천 땅에서 추풍령을 넘기 직전 서쪽 방향으로 바라보면 부드러우면서도 높은 산이 우뚝 솟았다. 황악산(1,111m)이다. 골은 깊고 그윽하니 대가람이 들어섰다. 김천지역을 대표하는 직지사다. 직지사가 언제 창건됐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선산의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멀리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 절을 지을 만한 상서로운 터가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고려 초기 능여(能如) 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직접 자신의 손가락으로 길이를 재었기 때문에 절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선종의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사찰의 이름이 유래됐다고 본다. 그러나 선종은 9세기에 이르러 유행했기에 창건 시기가 너무 늦어지게 된다. 

어쨌든 직지사는 창건 이래로 향화의 불빛이 사그라진 적이 없었다. 신라, 고려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그러했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 정종의 태를 직지사 북봉에 안장함으로써 직지사는 자연스럽게 대실수호사찰이 되어 조정의 보호를 받았다. 정종 원년(1399) 때 일이니 조선이 개국한 지 불과 7년 만의 일이다. 조선 중기에는 14세의 나이에 부모를 연이어 잃고 직지사로 출가해 신묵화상의 제자가 된 스님이 출현했다. 바로 사명당 유정(1544~1610) 스님이다. 스님은 승과 시험에 급제한 후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됐지만 곧 사양하고 서산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크게 깨달았다. 4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당은 승군의 총대장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직지사는 오히려 그 앙갚음으로 쑥대밭이 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직지사는 스님들의 원력과 조정의 도움으로 원만히 중창됐다. 또한 그때부터 전해진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 왔다. 함부로 옛 법당을 손대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불사를 잘 진행해서 대가람의 품위를 잘 지키고 있는 곳이 바로 직지사다.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경내를 흐르게 하고 연못을 조성해서 여름철의 더위도 누그러뜨릴 수 있게 조경한 것만 보아도 스님들의 세심한 배려와 노력을 알 수 있다. 

 

금자대장경을 조성하다

927년 고려의 왕건과 신라의 경애왕이 연합해서 후백제의 변방 관할지역을 쳐들어가 경상도의 예천을 점령하고 충청도 홍성을 공격했다. 왕건 휘하의 김락 장군은 합천의 대야성을 빼앗았고 고려 수군은 남해를 돌아 진주 일대를 공격했다. 전방위적으로 고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변방 지역을 두드리자 전략에 능한 견훤은 상주에서 출발하여 곧바로 군위, 영천을 거쳐 서라벌로 쏜살같이 쳐들어갔다. 서라벌의 방위가 허술한 것을 노린 것이다. 견훤은 지금 상주에서 영천으로 연결된 상주영천고속도로(301번 고속도로) 루트를 따라 최단 거리 지름길로 직행해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고 서라벌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왕건이 신라를 구하고자 서둘러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했지만 견훤은 이미 서라벌에서 북상해 팔공산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에게 야습당해 대패했고 왕건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왕건을 구하고자 몸집이 비슷한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었고 전이갑은 복지겸의 갑옷을 걸치고 싸우다 결국 죽었다. 왕건은 졸병의 복장으로 겨우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숭겸, 김락을 비롯해 고려장수 8명이 이 공산전투에서 죽었다. 직지사 인근까지 쫓겨온 왕건은 부하들의 권유로 직지사의 능여대사를 찾아뵙게 된다. 능여대사는 짚신 2,000여 켤레를 헌납하며 말띠 해부터 좋은 기운이 들어올 것이라 예언했다. 

3년 뒤인 930년, 나라는 더욱 어지럽고 백성들이 고난 속으로 내몰리자 직지사 천묵대사는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 조성을 발원했다. 금니로 필사한 대장경은 593함(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천묵대사가 이 대장경을 신라 조정에 헌납하자 경순왕은 6개 함에 들어있는 『대반야경』의 제목을 손수 써서 달았다고 한다. 고려의 팔만대장경 조성 이전, 가장 큰 대장경 불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왕건의 고려군은 안동에서 견훤의 군대와 맞붙어 대승을 거두게 된다. 후백제군의 전사자만 8,000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꽤 큰 전투였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견훤은 차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 전투 이후 경상도 지역의 110여 성이 고려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934년에 고려군이 다시 충청도 홍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자 인근에 있던 30여 군현이 또 고려에 귀부했다. 이 해가 바로 말띠 해이니 능여대사의 예언대로 후삼국통일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935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개경으로 찾아와 귀부함으로써 신라 땅은 공식적으로 고려의 영토가 됐다. 936년에는 아들 신검에게 쫓겨 왕건에게 와 있던 견훤이 후백제를 징벌해 달라는 요청을 해오자 이를 받아들여 87,500명의 군사로 후백제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에 신검도 결국 논산 연산벌에서 항복하니 왕건은 비로소 후삼국 K-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다. 

왕건은 능여대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직지사에 전답 1,000결(275만 평)을 하사했다. 새롭게 중창을 마친 직지사는 신라에서 돌아온 금자대장경을 잘 보존하고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1185년 임민비(1122?~1193)가 대장당(大藏堂)의 비문을 짓고 그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비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일부 비편의 탁본 내용이 『대동금석서』에 수록돼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 “고려 임민비가 지은 대장당(大藏堂) 기문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곧 16세기 전반까지는 대장당의 내력을 쓴 비가 실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나말여초에 금니로 사경한 금자대장경이 직지사에서 조성됐고 그 양이 593함에 이르렀다는 것은 고려조에서 나무로 판각한 초조대장경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대장경을 만든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나 짐작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경불사를 통해 대장경 판각불사로 이어가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세 가지 보물을 품은 법당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는 임진왜란의 병화는 피해 갈 수 없었다. 임진왜란 발발 4년 뒤인 1596년 왜병의 방화로 43동의 건물이 일시에 사라지고 천불전, 천왕문, 자하문만 겨우 남아 있게 됐다. 전쟁이 끝난 후 직지사는 스님들의 발원과 조정의 도움으로 70여 년간에 걸쳐 복원불사를 마무리했으니 8전(殿), 3각(閣), 12당(堂), 4료(寮), 3장(藏), 4문(門)을 갖췄다. 산내 암자는 20여 곳에 이르렀다. 

대가람의 형세를 회복한 뒤에도 숙종의 어필(御筆)을 하사받고 영조의 후궁 정빈(靖嬪) 이씨(1694~1721)의 원당이 들어서면서 왕실원찰로서도 크게 입지를 다졌다. K-왕실원찰이 되면 불교에 대해 편파적인 시선을 가진 유생들의 트집과 침탈을 벗어날 수 있었다. 왕실원당과 임금의 글씨를 보유한 사찰에서 유생들이 행패를 부리는 것은 조정에 대한 반역으로도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지사의 많은 전각 중에서도 대웅전은 3점의 보물을 품고 있는 명품 문화재다. 원래 임진왜란 전에는 2층 건물이었지만 다시 중건할 때는 단층 건물로 세웠다. 1649년에 대웅전을 완공하고 단청을 했을 때는 규모와 그림의 아름다움이 인도 기원정사에 못지않았다고 찬탄한 기록이 있다. 

이 대웅전은 90년 만인 1735년에 다시 중창했다. 목수 20명과 50여 명의 산중대중, 900여 명의 시주자가 동참했다. 곧 지금 대웅전의 모습은 1735년에 중창된 바로 그 모습인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적당한 지붕선과 단정한 맵시, 잘 보존된 벽화 등이 남아 있어 보물로 지정됐다. 

뒤 숲을 배경으로 품위 있게 앉아 있는 대웅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마 끝 수막새기와 위에는 연꽃 봉오리 형태의 백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음을 볼 수 있다. 법당건물에서는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쌓였을 때 수막새기와가 밀려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긴 쇠못을 박아 고정하는 경우가 있다. 지붕이 손상되고 사람이 다치는 것을 미리 막는 장치다. 그 쇠못이 노출된 것을 감추고 법당을 장엄하기 위해 백자 연꽃 봉오리를 쇠못에 끼워 놓는다. 고려시대 청자 연꽃 봉오리도 있다. 그만큼 법당 장식에 정성을 다했다는 뜻이다. 대웅전 용마루 가운데에는 청기와도 얹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연관된 사찰들이 청기와를 하사받아 용마루에 얹어놓은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직지사가 왕실과 인연이 있다는 증거물이다. 

대웅전 내부의 벽화도 볼 만하다. 특히 서쪽 벽에 그려진 벽화가 압권이다.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여의주를 쥔 채 용을 타고 나아가는 벽화, 등에 동자를 태우고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용의 모습을 그린 벽화는 여느 절에서 보기 힘든 작품이다.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의 모습도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그린 솜씨도 좋거니와 색감도 남다르다. 

대웅전 삼존불탱화도 보물이다. 중앙에 계신 석가모니불 뒤에는 영산회상도, 왼쪽에는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가 각각 걸려 있다. 이 세 폭의 탱화는 1744년 10여 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폭 2m가량에 길이는 6m에 이르는 거작이다. 세간에서는 겸재 정선(1676~1759)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고 불가에서는 의겸 스님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화승들이 활약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녹색을 기본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섬세한 묘사, 안정감 있는 색감 등은 당시의 불화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세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목조 수미단도 보물이다. 1651년에 조성했다는 먹글씨가 남아 있어 17세기를 대표하는 수미단이다. 법당 내 수미단이 별도의 보물로 지정된 곳은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과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두 곳뿐이다. 수미단은 높이 129cm, 길이 1,068cm, 너비 206cm의 평면 탁자형 대형 불단이다.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돼 있지만 높은 부조나 투각으로 깎은 문양은 중대에 주로 베풀어졌다. 중대는 1, 2, 3층의 3단 구조인데 하단에는 주로 수중생물들이 연꽃 속에 숨거나 나타나며 조각돼 있다. 물고기, 개구리, 거북도 있고 쏘가리, 조개도 있다. 수중생물이 살고 있으니 화재를 막고자 하는 염원과 자손 창성, 출세의 꿈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중단에는 주로 지상에 사는 중생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 새겨져 있다. 새, 나비와 잠자리도 있고 지상의 최상부인 도리천도 새겨져 있다. 푸른색 병의 입구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병 주둥이로는 용의 몸이 빠져나오는 조각도 있어 궁금증을 더하기도 한다. 상단에는 주로 구름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용의 모습이 담겼다. 용의 정면 모습도 있고 측면 모습도 있다. 용이 날아다니는 하늘 세계 위로는 바로 부처님의 세계라는 상징도 담고 있다. 

이렇게 직지사 대웅전은 보물 세 점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다. 이는 직지사를 지켜온 스님들이 옛 스님들이 전해준 전각들은 함부로 손대지 않고 잘 보존해 준 덕분이다. 대웅전뿐만 아니라 다른 법당들도 옛 모습을 잘 지키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직지사는 무려 11점의 지정된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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