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열린·닫힌 공간의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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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열린·닫힌 공간의 제주
  • 김새미오
  • 승인 2023.02.2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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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제주 바다, 흔들리는 마음
바다는 제주 사람들에게 삶을 찾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바다일 뿐. 이를 열고 닫으며 흔든 것은 펄럭이던 인간의 마음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 제목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다. 시인의 말대로 아름답게 피어난 모든 것은 흔들린 경험을 갖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얼핏 보면 멈춰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 우리가 사는 공간 역시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 모든 우주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기본적으로 열린 공간이다. 해변에서 바다를 보면 뻥 뚫린 느낌을 받는다. 정해진 길조차 없다. 바다는 동시에 닫힌 벽이다. 섬은 바다에 가로막힌 공간이다. 바다가 커다란 유리 벽처럼 자리한다. 가까이 보이는 섬은 그래도 완전히 닫혀 있지는 않다. 사는 공간이 눈에 선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 바다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주는 탐라(耽羅)·탁라(乇羅)·탐모라(耽牟羅) 등으로 불렸다. 탐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탐라’는 제주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현재 제주도 내에서도 탐라를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탐라가 어떤 형태의 나라였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왕권이 어떻게 계승됐고, 어떤 정치·경제활동을 했는지, 또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문헌으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의미 있는 유적 또는 유물이 대량으로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신화 연구자들은 삼성신화(三姓神話, 고·양·부 씨족의 시조신화이자 탐라 개국신화)를 근거로 탐라가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췄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외부와의 교류를 위해서는 반드시 광활한 바다를 건너야 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탐라는 분명 해양 세력이었다. 

고려시대 탐라는 자치권을 가지고 다스렸다. 『고려사』에는 탐라가 고려 조정에 조회한 기록을 특기했다. 당시 탐라는 고려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탐라시대 제주 바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열려 있던 공간이었다. 

탐라 시기, 원나라와 고려의 지배를 받았다. 원나라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했다. 말은 당시 전투는 물론 생활을 위해서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원나라에서는 제주의 말을 원했다. 탐라의 입장에서는 타율적인 형태이지만, 바다가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고려 역시 말이 필요했다. 원나라든 고려든 탐라의 조공을 원했고, 이는 모두 바다를 통해 이뤄졌다. 

원명교체기인 고려 공민왕 23년(1374), 제주에서는 말을 둘러싼 갈등으로 목호(牧胡, 몽골의 목자)들이 ‘목호의 난’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세력이 탐라를 중심으로 오가며 제주 바다는 흔들렸다. 

제주의 말은 특산물이었다. 조선 초 역시 바다를 건너 말이 진상됐다. 

“명하여 이제부터 제주(濟州)에서 사사로이 진상(進上)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만약에 진실된 마음으로 진상하는 자가 있어도 1필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실록』의 일부로 제주에서 조선 조정에 말을 바쳤던 기록이다. 말이 제주의 특산물이었기에 제주 사람들은 너나없이 말을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개인적으로 말을 올리지 못하게 통제했다. 생각해보면 당시 제주 바다를 건너 말을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제주에서도 힘을 꽤나 썼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사사로이”란 말을 보건대, 당시 제주 바다는 결코 닫힌 공간이 아니었다. 

“포작인(鮑作人)의 일을 지난번에 재상(宰相)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셨습니다. 이 무리는 본래 제주 사람들입니다. 제주는 토지가 척박(瘠薄)하고 산업(産業)이 넉넉지 못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 도망가서 오로지 해물(海物)을 채취하여, 이것을 판매하여 생활합니다. 지금 만약 독촉하여 본고장으로 돌려보내게 한다면, 저들이 틀림없이 실망할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그대로 존무(存撫)하는 것이 편안하겠습니다” 하였다. 

지사(知事)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이 무리들은 해물을 채취하고 판매하며 살아갑니다. 간혹 여러 고을의 진상(進上)을 공급(供給)한다 하여, 수령(守令)들이 고의로 호적(戶籍)에 편입시켜 백성을 만들지 아니하고, 평민들도 간혹 저들 사이에 섞여 한 무리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거짓으로 왜복(倭服)을 입고 왜말을 하며 몰래 일어나서 도적질을 한다’고 하니,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마땅히 모두 본토(本土)로 돌려보내서 후환(後患)을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저들이 과연 도적질하는 폐단이 있기는 하나, 한결같이 평민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비록 본토로 돌려보내게 하더라도 반드시 즐겨 따르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원망과 틈이 생길 것이다. 저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제주 수령들이 어루만져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수령에게 알려 다시 돌봐주게 하고 나오지 못하게 하라.”

이는 『성종실록』에 실려 있는데, 제주 포작인에 관한 사항이다. 포작인이란 전복과 물고기 등을 잡아서 진상하던 사람들이며, 제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이들은 제주를 떠나 본토 해안에 거처하면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먹을거리를 구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 제주를 떠나 본토를 기웃거린 것이었다.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두무악(頭無岳)·두독(頭禿)·두독야지(頭禿也只)·두모악(頭毛岳)” 등으로 불렀는데, 한라산 꼭대기인 백록담에 나무가 없어서 그렇게 호칭했던 것이다. 이 단어를 굳이 해석하자면, “제주것·제주놈” 정도가 될 것이다. 

『성종실록』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첫째, 다른 지역의 문제가 될 정도로 제주 출신 유랑민이 많았다. 둘째, 이들은 잠수를 통한 해산물 채취 및 배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셋째, 이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지역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주 유랑민들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가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이들은 해산물 채취는 물론 배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늘 바다에서 살기에 물길에도 밝았다. 문제는 종종 해적으로 변해서 약탈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 사람으로 위장해서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을 털기도 했다. 

제주 유민들은 전라도·경상도 해안과 심지어 중국의 해랑도(海浪島) 지역까지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팍팍했던 그들의 삶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제주를 떠날 수 있었다. 기록의 이면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 제주 사람들은 세력이 있든 없든 배만 있다면 타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 제주 바다는 제주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갈 수 있는 하나의 열린 공간이었다. 

임진란을 기점으로 제주 바다는 다시 흔들린다. 지속된 전란 등으로 왕래가 줄어들어 멀리서 배가 보이면 의심부터 했다. 가뭄과 폭정 등으로 지역 인구 역시 격감했다. 이에 제주 포구에서의 관리들 감시도 심해졌다. 평온해 보이는 제주 바다는 이렇게 점점 닫혀가고 있었다. 

“제주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육지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였다. 비국(備局, 비변사)에서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인용문은 『인조실록』의 일부이다. 이른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의 시작을 알리는 기록이다. 이 조치 이후 제주 바다를 가장 많이 건넜던 것은 말과 귤이었다. 이 시기 서양 세력은 제주 동남쪽 바다로 밀려왔다. 효종(재위 1649~1659) 대에는 ‘하멜 표류(1653년 네덜란드인인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착한 사건)’와 같은 큰 사건도 있었다. 중국 정세 역시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조선 정부는 바다를 꼭꼭 닫았다. 표류된 중국 사람이나 중국에 표류됐던 사람들을 통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되새길 뿐이었다. 

조선 정부의 출륙금지령으로 제주 사람들에게 바다는 닫힌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 조치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현실에서 닫힌 공간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생활공간으로, 본토 사람들에게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선망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닫힌 공간이 열린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힘이 없어지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일제강점기 제주를 기점으로 하는 항로가 개설되면서 각 지역으로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제주와 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군대환(君代丸·기미가요마루)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해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필리핀까지 왕래했던 기억을 전하고 있다. 이후 태평양 전쟁 등의 변란으로 잠시 닫히기도 했다. 이후 제주 바다는 대체로 열린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돌아보면 바다는 바다일 뿐이다. 이를 열고 닫으며 흔든 것은 결국 펄럭이던 인간의 마음이었다. 불현듯 혜능 선사의 울림이 저 바다에 메아리쳐 흐른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다.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종달리 생개납 돈짓당. 독특한 해신당(海神堂)이다. 자연석을 신체(神體)로, 돌 틈에서 자란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았다. 바다를 안고 사는 제주인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사진. 유동영

 

김새미오
제주대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제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태동고전연구소, 한국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성균관대에서 「연천 홍석주 산문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제주의 고전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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