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는 우리 역사의 시조인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塹城壇, 塹星壇)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강화도에 단군 유적이 있게 된 연유를 고려의 강화도 천도와 관련해 살펴보자.
참성단 제사의 유래와 단군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에는 참성단을 단군이 하늘에 제사(제천·祭天)하던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전한다”는 세전(世傳)에 근거를 두기에, ‘단군 제천’의 전통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엔 다소 주저된다.
권근(權近, 1352~1409)이 지은 「참성초청사(塹城醮靑詞)」에서는 이런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해 준다. 「참성초청사」는 참성단을 단군에 대한 제사가 아닌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천단(祭天壇)’으로 밝힌,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제천의 전통이 단군부터 시작돼 성조(聖祖)인 고려 태조를 거쳐 후대 국왕에게까지 이어졌으며,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해서도 이어진 역사적인 전통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참성초청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하면서 조선의 성리학 이념을 마련한 권근이 국왕을 대신해 지어 참성단 제사에 사용한 제문이다. 고려 왕조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1384년(우왕 10) 가을 참성단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우왕 10년은 왜구(倭寇)가 전국 해안을 횡행하며 도읍인 개경 부근까지 약탈을 일삼던 때로, 제사의 목적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것이었고 제주(祭主・제사장)는 국왕이었다.
참성단 제사는 도교 의례로 치러졌기에 유교에서 쓰는 제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초례(醮禮) 또는 초제(醮祭)라 불렀다. 참성단 제사의 원래 이름은 ‘참성초’, 또는 참성단이 위치한 마리산(마니산)을 앞에 붙여 ‘마리(니)산 참성초’라고 했다. ‘청사(靑詞)’라는 것은 도교 의례에서 사용되는 제문 같은 것으로, 푸른색의 종이에 제문을 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참성초청사」는 마리산 참성단에서 지냈던 도교 제사에 사용됐던 제문으로, 그 명칭에 참성단의 성격과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초제의 유래를 ‘단군유사(檀君攸祀)’, 즉 “단군이 제사하던 것”에서 찾고 있다. 즉 참성단은 단군을 제사하던 곳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단군은 제사를 주관했던 제주였던 것이다. 단군을 제사하던 평양의 단군 사당인 숭령전(崇靈殿),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도 참성단에서의 제천은 몽골 침입으로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후 시작됐다. 고려 전기에 궁궐 이외의 지역에서 지낸 제천은 서해도 염주(황해도 연백)의 전성 제천단에서 이뤄졌었는데, 이것이 마리산 참성단으로 옮겨진 것으로 짐작한다. 전성에서도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이 직접 제천했을 가능성이 있고,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관료를 파견해 초제를 지낸 적이 있다.
참성단에서 지낸 삼계대초(三界大醮)
도교에서는 별과 관련된 많은 신(神)을 모셨다. 우주 만물을 포함하는 가장 넓은 범위가 삼계(三界)였고, 이를 제사하는 초제가 삼계초, 삼계대초였다. 삼계초는 도교 제사를 관장했던 고려시대의 복원궁(福源宮), 조선시대에는 소격서(昭格署)에서 351위(位)의 신을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지냈다. 참성단은 야외였기에 이를 축소해 95위의 별신을 모셨다. 참성단은 가뭄에 비를 빌면 즉각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기우초제(祈雨醮祭)를 별도로 지내기도 했다.
참성단은 석단(石壇)으로 아래는 타원형이고 위는 정사각형이다. 아래는 초제의 준비 공간이고, 위는 초단(제단)이다. 삼계초는 상단(상계), 중단(중계), 하단(하계)의 초제로 구성됐는데, 상단에서는 옥황상제와 태상노군(노자) 등 4위, 준비 공간에서 계단을 통해 상단으로 올라가는 통로인 서쪽(왼편)의 중단과 동쪽(오른편)의 하단에서는 염라대왕과 이십팔수(二十八宿) 등 91위를 모셨다. 별을 모시는 제사였기에, 초제는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 사이에 지냈다.
초제를 주관하는 사람을 초주(醮主)라고 하는데, 참성단 제사는 국가 제사였기에 초주는 당연히 국왕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참성초제를 지낸 것은 1264년 6월 원종 때가 유일하고, 국왕을 대신해 2~3품의 관료가 파견돼 초제를 지냈다. 이때 국왕은 향을 바쳤기 때문에 국왕을 대신해서 초제를 주관하는 사람을 향사(香使), 행향사(行香使)라 했다. 향사를 보조하는 헌관(獻官)도 3~4품 관료로 파견됐고, 초제의 준비부터 진행의 실무를 맡았던 전사관(典祀官)도 있었다.
전사관은 복원궁이나 소격서의 하급 관리가 맡았는데, 참성초제를 전담하는 관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외에 초제를 보조하는 배단(拜壇) 2명, 도교 의례를 진행하는 도사(道士) 2명 정도가 참석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인 1484년(성종 15)까지 향사는 상단과 중단 제사를 담당하고, 헌관이 하단 제사를 담당했다. 고려 말에 유종(儒宗)이었던 목은 이색(1328~1396), 후에 조선의 국왕(태종)이 된 이방원(1367~1422) 등이 향사로 참성초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향사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해, 이후부터 향사는 상단 제사만 전담하고 헌관이 중단과 하단 제사를 맡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는 강화부사가 헌관을 담당하는 것으로 원칙도 정해졌는데, 때에 따라 중앙에서 관료가 파견되기도 했다.
91위의 별신들은 고려시대에는 목상(木像)으로, 조선 전기에는 목판으로 모셔졌을 것이다. 소격서와 함께 폐지됐다가, 재개된 후에는 지방(紙榜)으로 모셔졌다가 초제를 마친 후 소지(燒紙)됐다. 제기는 이동과 보관의 편의를 위해 유기가 사용됐고, 제수는 몇 가지 종류의 떡과 함께 나물 등 소찬(素饌)이 올려졌다. 제주(祭酒)는 초제 날짜가 정해지면 전사관이 40일 전에 재궁에 내려와 담았다.
참성단의 수리
참성단은 암반 위에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켜켜이 쌓아 올려 만들어진 제단이다. 그러다 보니 비바람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충렬왕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몇 차례의 붕괴와 보수 사실이 알려져 있다. 제단이 무너진다는 것은 예삿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중앙에서는 하늘의 변화를 관측했던 관청인 서운관의 관리를 보내 원인을 조사하고 수리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장관인 서운관정이 직접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제사였다.
참성초가 폐지된 후에도 고적(古跡)으로서 관리를 위한 보수가 있었다. 기록으로 인천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참성단중수기」가 남아 있는데, 강화유수였던 최석항이 1717년(숙종 43) 수리하고 고사를 지낸 후, 그 사실을 참성단 옆의 바윗면에 새긴 것이다.
참성초의 재계 시설, 재궁(齋宮)
참성단 초제를 준비하던 시설로 재실(齋室), 또는 재궁이 있었다. 천제(天祭)를 준비하는 곳이라고 하여 천재궁(天齋宮)이라고도 불렸다. 보통 재궁은 제단과 가까운 거리에 마련됐는데, 참성단이 위치한 곳은 마니산 정상 암반이기에 재실의 위치로 적당하지 않았다. 이에 마니산의 남동쪽 아래에(현재의 천제암 터)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참성단까지는 지금도 약 1시간 정도 올라가야 하며 길이 험하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몇 차례에 걸쳐 재궁을 참성단과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는 공론(公論)이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재궁에는 향사·헌관·전사관이 숙박했던 상방·중방·하방, 초제에 사용되던 기물을 보관하고 초제 준비를 했던 전사청, 마니산 정상이 바라보이던 작은 정자인 앙산루(仰山樓) 등이 있었다. 재궁 아래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연산군 때 금표(禁標)가 설치됐다. 향사와 헌관은 초제 이틀 전에 재궁에 도착해, 자신들의 숙소에서 도교 경전인 황정경을 읽으면서 재계했다. 매 끼니때 만나 식사하며 초제 준비를 의논했다.
참성초제는 임진왜란 직후 폐지돼 이후 참성단에서는 초제를 지내지 못했다. 대신 강화유수가 마니산 산신을 모시는 유교 제사를 마니산 산천제단에서 지냈다. 참성단 제사가 도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변화하는 과정과 관련 있다. 참성단은 제단이 아니라 단군과 관련한 고적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답사와 관광을 위해 마니산 아래에서 산 물고기를 메뉴로 재궁이 변한 천재암(천제암)에서의 점심을 포함한 당일 일정으로 참성단에 올랐다.
삼랑성(三郞城)과 가궐(假闕)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삼랑성은 말 그대로 세 명의 사내가 쌓은 성(城)이라는 뜻이다. 단군이 세 아들에게 쌓게 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지금은 정족산성으로 잘 알려져 있고, 전등사가 그 안에 있다. 전등사는 주차장에서 산길을 올라, 삼랑성 남문을 지나야 갈 수 있다.
참성초제와 삼랑성 가궐의 건립은 고려 고종 말과 원종 초에 ‘개경으로의 환도’와 ‘국왕이 직접 몽골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라’는 몽골의 압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풍수도참의 방편으로 이뤄졌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무인 집정자였던 김준이었고, 그 실행은 술사(術士)였던 백승현이라는 사람이 맡았다. 그는 혈구사(穴口寺)에서 석가여래를 모신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을, 신니동 가궐과 삼랑성 가궐에서는 석가여래의 불정(佛頂)과 도교의 오성(五星)을 합친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이란 법회를 열고 참성단에서 초제를 지낼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 즉각 효험이 있어 국왕이 몽골에 가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몽골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이 고려에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했다. 이를 왕실의 기운을 연장하려는 방책이라는 뜻에서 연기업(延基業)이라고 한다.
고려 조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집정 무인의 강력한 요청과 이에 기대는 국왕의 뜻에 따라 진행됐다. 1259년(고종 46) 혈구사를 중심으로 추진됐던 연기업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발병, 죽음으로 중단됐다.
1264년(원종 5) 6월에 다시 추진됐는데, 이때는 혈구사를 대신해 삼랑성 가궐과 마리산 참성초가 중심이 돼 진행됐다. 국왕이 삼랑성 가궐에 가서 대불정오성도량에 향을 바쳤는데, 당시 수상이었던 이장용 등 고위 관료들은 국왕을 수행해 ‘삼랑성가궐→ 마리산참성→ 신니동가궐→ 혈구사’에서 행향하고, 초제를 지냈다. 그리고 〈임강선령〉이란 가사를 지어 중흥의 조짐을 바랐다.
전승의 확장과 고조선 남쪽 경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고조선에 대한 역사 인식이 체계화되면서 참성단과 삼랑성에 대한 단군 이야기는 확장됐다. 참성단은 단군의 제천단에서 “단군이 쌓고 제천하던 곳”으로, 단군이 세 아들에게 쌓게 했다는 삼랑성은 “하루 만에 쌓았다”라거나 “셋째 아들이 쌓았다” 또는 “단군이 부루 등 세 아들에게 한 봉우리씩 쌓게 했다”는 전승으로 변화했다. 이 전승에 기대어 강화 일대의 한강 변은 실학자들에게 고조선의 남쪽 경계로 비정되기도 했다.
이번 가을, 고려의 국왕인 원종의 여정을 따라 삼랑성과 참성단 답사를 권한다. 그 행로는 전등사 안에 있는 삼랑성 가궐 터를 찾은 후, 재궁이 있던 천제암 터를 거쳐 참성단으로 향하는 마니산 등산이다. 참성단 아래로 펼쳐진 가을 단풍은 그 맛을 더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사진. 유동영
김성환
전 경기도박물관장. 단군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논문으로 「단군, 신화에서 역사로」, 「고려시대 태조의 진전과 봉업사」 등이 있고, 저서로는 『고려시대 단군전승과 인식』, 『조선시대 단군묘 인식』, 『일제강점기 단군릉수축운동』, 『마니산 제사의 변천과 단군전승-참성초에서 마니산산천제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