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도 사찰과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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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도 사찰과 절터
  • 주수완
  • 승인 2022.08.3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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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어서 더 찬란한,
강화 사찰기행

 

섬에서 시작된 사찰들

강화도 사찰들은 모두 몽골 침입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삼국시대까지 창건 설화가 올라가는 절들도 많다. 최강의 몽골군도 건너오지 못할 만큼 접근이 어려웠던 이 외진 섬에 어떻게 절이 들어서게 됐을까? 고려가 강화도를 조정의 피난처로 선택한 데에는 몽골군이 해전에 취약하다는 것과 개경에서 뱃길로 가깝다는 이유 외에도 이곳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점을 분명 고려했을 것이다. 

강화도는 물이 풍부하고 농사가 잘되는 풍족한 땅이다. 지금도 ‘강화쌀’을 알리는 선전과 함께 드넓은 경작지를 발견할 수 있다. 뭍에서 거둬들인 조세는 강화도 조정을 운영하는 중요 재원이었지만, 혹시라도 몽골에 의해 조세가 끊겼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따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찰들도 섬 주민들의 보시와 시주로 오래전부터 운영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나아가 강화도 사찰들의 창건 설화를 보면 뭍의 절들이 섬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절은 강화도에서 시작해 뭍으로 건너갔다고 보는 편이 옳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아도 스님이나 인도에서 건너온 어떤 스님은 강화도를 일종의 포교 전초기지로 삼았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대략 15개소 정도의 사찰이 운영되는데, 이 중에서 강화도의 역사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들러야 할 사찰 몇 곳을 섬의 중부, 남부, 북부로 나눠 소개한다.

 

선원사지

강화의 법보사찰, 선원사지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간다면 우선 선원사지부터 들러보자. 한때 이곳은 강화도 도읍 시절 고려의 궁궐터로도 추정된다. 그러나 발굴로 이곳이 절터였고, 더불어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했던 선원사의 터임이 분명해지면서 현재는 선원사라는 절도 운영되고 있다. 한동안은 이곳에서 팔만대장경판을 제작했던 것인지, 아니면 남해에서 제작했던 것인지 논란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조성은 남해에서 하고, 강화로 옮겨와 이곳에 봉안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터로만 남아 있지만,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했던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

여러 단의 석단이 계단식으로 점차 높아지는 가람 구성은 해인사와 닮았다. 장중한 첫 번째 석단의 계단을 오르면 두 번째 석단은 가운데에 계단을 두고, 좌우에도 역시 계단이 설치된 돌출부가 보인다. 또한 가운데 계단과 좌우 계단 사이는 땅이 약간 움푹 파여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일본 사이후쿠지(西福寺)에 소장된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에 묘사된 극락세계와 닮았다. 

이 그림 속에 묘사된 극락세계를 보면 입구 가운데에 연못이 있고, 이 연못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극락에 태어나고 있으며, 좌우로는 높은 누각이 세워져 있다. 선원사지 두 번째 석단 앞의 움푹 파인 곳도 혹시 연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좌우로 누각이 솟아 있었다면 그야말로 고려불화 <관경16관변상도>의 극락세계와 유사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불화를 그린 화가가 강화의 선원사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고려 말 당시 선원사지는 송광사와 더불어 2대 선찰로 위세를 떨쳤으니 그럴 만도 하다.

<관경16관변상도>, 고려 13세기경, 일본 사이후쿠지 소장 

단 위에 자리 잡은 넓은 중정은 수로로 에워 쌓여 있어, 작은 돌다리로 건너야 한다. 아마도 선원사의 뒤에서 샘솟은 물이 이렇게 공간을 감싸며 흘러내리도록 설계됐던 것 같다. 그만큼 물이 풍부한 섬이었다는 뜻이 아닐까.

여기서 한 단 더 올라가면 금당터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 자리였다. 흥미롭게도 해인사 역시 주불전이 대적광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왜 선원사와 해인사 모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을까? 해인사는 법보종찰로서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경전을 상징한다. 선원사 역시 같은 의미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던 것이 아닐까? 

이와 함께 금당 좌우측에 돌출된 부분이 있어 눈에 띈다. 왜 이런 구조가 필요했을까? 흥미롭게도 해인사 대적광전은 정면에만 현판이 달린 것이 아니라 사방에 돌아가며 법보단,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란 현판을 달았다. 선원사의 비로전도 정면뿐 아니라 좌우, 그리고 뒷면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렇게 좌우로 돌출된 별도의 단이 설치됐던 것이 아닐까? 

이 비로전 안에 원래는 본존불상이 부석사나 마곡사처럼 법당 한쪽에 치우쳐 봉안돼 있었는데, 고려 제27대 충숙왕 시절에 크게 확장하면서 중앙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태조금강산예불도>를 그린 노영이라는 화가가 금당 안쪽의 정면에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55선지식의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상상으로나마 당시의 장중했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 윗단에는 몇 채의 건물을 ‘冂(경)’ 혹은 ‘ㄷ’자 형으로 배치했다. 이 건물지들이 대장경판을 봉안했던 곳이었을까? 선원사에는 팔만대장경판 외에 거란대장경도 봉안했는데, 팔만대장경을 새로이 조성할 때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려 상자 200여 개 분량의 거란대장경은 후에 송광사로 이운됐지만, 그전까지는 선원사에 상당한 보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략으로 불에 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방화나 화재에도 각별히 신경 썼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몇 개의 석단으로 층층이 쌓은 곳에 대장경을 보관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석단들을 각각의 방화벽으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선원사지
석단이 계단식으로 점차 높아지는 선원사지의 가람 구성은 해인사와 닮았다. 장중한 첫 번째 석단의 계단을 오르면 두 번째 석단은 가운데에 계단을 두고, 좌우에도 역시 계단이 설치된 돌출부가 보인다. 또한 가운데 계단과 좌우 계단 사이는 땅이 약간 움푹 파여 있다.

고려 말인 1360년에는 왜구들이 몰려와 선원사와 용장사에서 300여 명을 죽이고 쌀 4만 석을 노략질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선원사가 큰 타격을 입고 쇠락했기 때문인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퇴위하기 불과 4개월쯤 전인 1398년 5월 10일에 선원사의 대장경판을 한강을 통해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라는 절로 옮겨왔다. 2,000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이송 작전이었다. 이후 현재의 해인사로 보내진 것이다.

선원사지 유물전시관에는 특히 1341년에 ‘삼한국대부인 이씨’가 선원사에 시주했다고 전해지는 옥등의 모형이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이처럼 반투명의 옥등 아래는 어둡지 않았으리라. 고려시대 최고의 도서관에는 이런 등불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정원년」이 새겨진 옥등, 고려시대, 높이7cm×입지름14.8cm×안지름12.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강화도 사찰에는 옥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 말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사찰명을 전등사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원사에도 옥등을 시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전등사 대웅보전(보물)
이 건물을 짓는 동안 목수의 아내가 바람이 나 도망가는 바람에 목수가 아내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자신이 지은 법당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해 넣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전등사 대조루
지금은 사라진 정족산사고나 선원각 역시 이런 견고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혹시 고려시대 이런 누각 안에는 팔만대장경판으로 찍어낸 대장경이 왕실용으로 봉안돼 있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

강화도를 크게 남·중·북단 셋으로 나누면, 중앙에 혈구산과 진강산, 남쪽에 정족산과 마니산, 북쪽에 고려산과 별립산이 솟아 있는 형세로 볼 수 있다. 남쪽의 정족산에는 전등사, 마니산에는 정수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중 전등사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사찰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다. 

사찰 창건 연기에 의하면 전등사는 소수림왕 11년(381)에 세워졌다고 한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이 소수림왕 2년(372) 순도 스님에 의해서였고, 2년 후 아도 스님이 뒤따라 고구려에 들어왔다고 하니, 374년 무렵이었을 것이다(이 아도 스님은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 스님과는 동명이인이다). 이때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첫 사찰이 건립됐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381년이면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니 고구려 사찰로서 불교 전래 초창기에 세워져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로서는 전등사가 가장 오래된 셈이다. 그러니 ‘법등을 전한다’는 뜻의 전등사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전등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웅전 처마 네 모퉁이를 받치고 있는 소위 나부(裸婦) 조각상에 얽힌 전설이다. 이 전설이 너무 유명해서 자칫 전등사의 더 큰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놓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호류지 오중탑(五重塔)의 하앙(下昻)을 받치고 있는 도깨비
전등사 대웅보전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인물상들은 호류지 오중탑(五重塔)의 하앙(下昻)을 받치고 있는 도깨비처럼 고대 건축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더불어 사방의 역사 모습도 제각각으로 다양하게 변화를 주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가 산성의 성문인데, 원래 삼랑성이라고 불렸던 이 정족산성은 그 안에 고려의 가궐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및 왕실의 족보를 봉안한 선원각을 품은 중요한 산성이었다. 정족산사고는 현재 전등사 뒤편에 복원돼 있다.

정족산사고 선원보각(璿源寶閣) 현판
고려와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및 문서를 보관했던 전각으로 현재 전등사 뒤편에 복원돼 있다.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대조루는 판문을 굳게 닫고 견고한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이 대조루를 지나 마주하는 대웅보전은 평범한 정면 3칸에 팔작지붕의 법당이지만, 세부를 들여다보면 이곳만의 특징이 빼곡하다. 우선 처마 아래의 인물상은 건축적으로 보면 매우 오래된 전통을 지닌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의 하나인 일본 호류지(법륭사) 오중탑(五重塔)의 1층 처마에도 도깨비 같은 역사상이 하앙(下昻)이라는 부재를 머리에 이고 있다. 고구려 무덤인 장천1호분의 모죽임천장 모퉁이에도 도깨비 같은 역사가 천장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이렇게 처마의 추녀를 도깨비 같은 신장상이 받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전등사 대웅보전은 조선 선조와 광해군 연간의 화재로 손상을 입어 1621년에 중건될 때 추녀를 역사가 받치게 하는 삼국시대의 오랜 전통을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전등사가 우리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자부심을 남겨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등사 대웅보전 대들보 끝단의 조각들은 전부 다르게 조각됐다. 도깨비, 용, 호랑이 등의 얼굴들을 조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웅보전 지붕 아래로는 대들보를 밖으로 빼면서 그 끝단을 동물 얼굴 모양으로 조각한 것이 튀어나와 있는데, 보통은 이런 장식을 동일한 용 형상으로 조각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도깨비, 호랑이, 용 등으로 다양하게 장엄했다. 마치 조각가 스스로가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법당 내부의 용과 천장을 날고 있는 극락조들도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전등사 대웅보전 내부에는 천장을 날고 있는 극락조들이 정교하고 생동감 넘치게 장엄돼 있다.

대웅보전 옆의 약사전도 보물로 지정된 건축이다. 영조는 1726년에 전등사를 방문한 바 있고, 1749년에 직접 목재를 시주하여 중수했는데, 그래서인지 약사전에는 주상·왕비·세자를 축원하는 문구가 단청돼 영조를 기리는 듯하다.

전등사 약사전 창방에 보이는 삼전하축수문 중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

건축뿐 아니라 대웅보전 안에 모신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명부전에 모신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각승 수연 스님이 대웅보전 삼존상을 1623년 조성했고,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636년에 다시 명부전 지장시왕상을 조성했다. 때문에 한 자리에서 한 스님의 조각 양식이 13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볼 수 있어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 그 밖에 유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대웅보전 불단, 수원 용주사의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후불탱화와 유사한 화풍의 후불탱화, 종각 안에 걸린 보물로 지정된 중국 범종 등도 전등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성보문화재들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조선 광해군 15년(1623)에 수연(守衍) 스님이 수화승(首畵僧)으로 참여해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원만한 상호와 양감·균형감·조각 솜씨가 뛰어난 목조불상이다.
전등사 명부전의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보물)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됐다. 

 

독특한 모양의 법당을 볼 수 있는 정수사

정수사는 강화도 남단 마니산에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기암괴석이 멋들어지게 솟아 있는데, 정수사는 이런 바위와 물, 그리고 건축이 조화를 이룬 절이다. 입구의 바위를 돌아서면 정면에 보물로 지정된 정수사 대웅보전과 마주하게 된다. 

언뜻 정면에서 볼 때는 평범한 3칸짜리 맞배지붕 법당이지만, 조금만 옆에서 보면 법당의 정면으로 발코니처럼 툇마루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이 튀어나온 부분을 전퇴(前退)라 하는데, 이곳 외에 안동 개목사의 원통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이런 모습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대성전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어서, 말하자면 유교식 사당의 개념으로 사찰 법당을 조성한 독특한 경우다.

정수사 대웅보전(보물)  
지붕을 앞쪽으로 더 길게 빼면서 앞뒤가 비대칭인 독특하고 날렵한 실루엣을 보이는데 마치 파도가 앞으로 밀려가는 듯한 형상이다.

정수사는 원래 신라 선덕여왕 무렵에 세워졌고, 조선 세종 연간에 함허당 기화(1376~1433) 스님이 고쳐 지었다. 함허당 스님은 무학대사의 제자로서 선사이면서도 교학에 능했고, 나아가 유·불·선의 삼교일치를 주장한 최치원의 사상을 계승해 억불숭유 초창기였던 조선 초기에 불교계를 지켜나간 큰 기둥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이곳 법당을 마치 유교의 사당과 같은 모습으로 중건한 것이 아닐까? 

법당 가운데 우물천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은 비스듬하게 판벽을 달아 부재들을 안 보이게 마감했다. 전체적으로 깔끔함을 넘어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이 판벽에는 용과 주작, 학 등이 어우러져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렸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거대한 조각 같은 건축이라면, 정수사 대웅보전은 파노라마로 구성된 그림 같은 건축이다.

정수사 대웅보전의 꽃살문. 가운데의 네 짝으로 구성된 문은 화병에서 꽃이 자라는 모습을 조각했는데, 마치 모란 병풍을 펼쳐 놓은 듯 회화적인 꽃살문이다. 제각각 개성 있는 꽃병 위로 펼쳐지는 꽃은 마치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기하학적이다. 또한 반복적인 도안으로 기묘한 운동감을 불러일으켜 옵티컬 아트를 연상케 한다. 이 꽃살문은 법당 안에 들어가 보면 햇빛으로 실루엣이 드리워지는데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는 것 같다.

대웅전의 서쪽으로는 정수사라는 절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약수가 흐르고 있는데, 원래는 냉천수로서 시원하기로 유명했고, 차를 끓여 마셔도 일품이라 명성이 높았는데, 아쉽게도 근래는 무슨 일인지 마시는 물이 아니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 물은 맑았고, 만져보니 명성대로 차가웠다.

대웅전 동쪽의 오백나한전 옆으로 단 계단을 따라 내려가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함허당 기화 스님의 사리탑이 모셔진 언덕에 다다른다. 마치 부처님의 사리를 여덟 군데에 나눠 모셨듯이 함허당 스님의 사리도 몇 군데에 나눠 모셨는데, 문경 봉암사, 가평 현등사, 평안도 자모산 연봉사와 함께 이곳 강화 정수사까지 총 4곳이었다. 그만큼 제자들로부터 존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의 사리탑은 바람이 시원한 양지바른 언덕 위에 세워졌는데, 그 주변으로 큰 아름드리나무가 은은한 그늘을 만들어 감싸고 있어 마치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수행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무찰린다 용왕이 부처님을 뒤에서 보호하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수사 함허당탑. 언뜻 이 탑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사리탑 형식인 오륜탑을 닮기도 했는데, 이 탑 역시 지·수·화·풍·공을 상징하는 요소들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역시 함허당 스님다운 발상이 아닐까?

 

고려산 백련사와 봉천산 봉은사지

강화도 북쪽 고려산에 자리 잡은 백련사로 발길을 옮겨본다. 고려산에는 이외에도 청련사도 있고 황련사지라는 절터도 있는데, 원래는 오련산이라 불렸다. 전해오기로는 삼국시대에 인도에서 온 스님이 이곳에 도착해 오색 연꽃이 핀 연못을 발견했는데, 이 오색 연꽃을 날려 꽃이 떨어진 각각의 자리에 연꽃의 색을 따라 이름을 붙인 절을 세워 오련산이라 했다고 한다. 

백련사 대방은 정면을 구성하는 팔작지붕의 5칸 규모 극락전과 그 오른쪽에 요사채가 ‘丁’자형으로 결합한 형태다.

백련사는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조선 초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돼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전각이고, 극락전으로 사용하는 대방 건축만 조선 후기의 것이다. 대방이란 조선 후기에 등장한 법당의 한 형태로서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일체형으로 결합한 일종의 복합 건축이다. 백련사 대방은 정면을 구성하는 팔작지붕의 5칸 규모 극락전과 그 오른쪽에 요사채가 ‘丁’자형으로 결합한 형태이며, 그 뒤에 다시 ‘ㄴ’자형의 선방이 달린 복잡한 평면 구성을 지니고 있다. 이 ‘丁’자형 평면에서 앞으로 돌출된 부분은 누각처럼 떠 있고, 그 아래는 창고로도 쓸 수 있어 공간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극락전에는 선정인을 결한 아미타불좌상과 관음·지장보살협시 삼존상을 모시고 있는데, 본존인 아미타불좌상은 원래 1989년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철불이었으나, 그해 12월에 도난당하고 말았다. 매우 통탄할 일이다. 하루빨리 되찾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현재의 아미타불은 도난당한 철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제품이다. 

백련사에서 사라진 철불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이번에는 봉천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하점면 장정리 보물 석조여래입상을 찾아 나선다. 백련사에서는 차로 10분 정도 거리다. 이 불상은 마치 광배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불상이다. 원래는 더 입체적인 불상을 조성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1106년 3월 7일(전설치고는 날짜까지 정확하다)에 한 노파가 연못가에서 빨래하는데 옥함이 떠올랐고, 그 안에서 사내아이를 발견해 조정에 바쳤다. 후에 이 아이는 임금으로부터 ‘봉우’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으니 하음 봉씨의 시조다. 이 석조여래입상 뒤편의 무덤이 바로 봉우의 무덤이다. 이 불상은 봉우의 5세손인 봉천우가 시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불상이라고 한다. 산의 이름이 봉천산인 것도 이 봉씨 집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설화가 사실이라면 봉천우는 14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인물이므로 이 불상의 조성연대도 그 무렵이 된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봉천우는 불상 외에 산 너머 봉은사라는 절도 창건했는데, 이 절이 1234년에 고종이 행차해 개경에서처럼 연등회를 했다고 전해지는 봉은사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이 봉안된 석상각
장정리 석조여래입상(보물). 고려시대 석조불상으로 두꺼운 화강암 판석에 돋을새김했다. 현재는 전각을 만들어 그 안에 모시고 있다.

이런 특이한 형태의 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뭘까. 이처럼 큰 불상의 청동상 주조가 어려웠고, 또 개인 발원의 사찰이다 보니 법당이 크지 않아 이런 부조 형태로 모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신 부조로 조성된 만큼 조각인데도 불화를 보는 것처럼 회화적이다. 옷자락이 하늘거리는 모습이나 손가락의 정교한 움직임, 수더분한 얼굴까지 매우 생동감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산능선 건너의 봉은사 터에는 멋진 우물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다 무너진 이 탑이 왜 보물인가 싶겠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 머무는 동안 꾸준히 연등회를 이곳에서 베풀었다고 하며, 더군다나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강화도의 유일한 고려시대 탑이다. 강화도 도읍기에 정말로 이 석탑 1기뿐이었는지, 아니면 더 있었는데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화 도읍기 동안 이곳을 대표하는 석탑으로 남아 있으니 어찌 아니 중요할까.

또한 기록에는 봉은사에 칠층의 보탑과 하음노구석상탑(河陰老嫗石像塔)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음은 이 지명이고, 노구는 할머니이므로 틀림없이 처음 하음 봉씨 시조 봉우를 발견한 할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할머니를 기리는 석상탑이라고 하니, 혹 탑 안에 할머니 석상을 모셨다는 뜻일까? 아니면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이 이 할머니 석상이고, 이 상을 목탑으로 덮었다는 뜻일까? 전설만큼이나 신비로운 석탑과 석상이다.

 

강화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는 1928년 마애관음보살상을 새기면서,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자리 잡았다. 

근대 강화도의 성지화, 석모도 보문사

강화도에는 섬이라는 장소가 무색하게 많은 절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물과 농산물이 풍부해 시주를 받아 운영되는 사찰들이 들어서기에 좋은 수행환경을 제공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강화도의 대표적인 사찰들 외에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석모도의 보문사를 빠뜨릴 수 없다. 

강화도에는 아도 스님의 창건, 인도 스님의 창건, 하음 봉씨의 시조설화 등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마니산의 참성단을 비롯해 이곳이 좋은 기운이 감도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전설도 많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 곳이기에 불교계에서는 근대기인 1928년 석모도 보문사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상을 새겨 동해의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에 대응하는 서해의 관음성지 보문사를 만들어냈다. 비교적 최근에는 마애불 옆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도 보문사 정비에 후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처님이 마군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었던 보드가야의 기운이나, 세계 최강의 몽골군과 맞서 싸울 용기를 제공한 강화도의 신비로운 기운은 서로 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치 좋고 먹거리 많고 무엇보다도 이처럼 풍부한 역사를 가진 강화도를 순례한다면, 지치고 힘든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활력이 생길 것이다.  

 

사진. 유동영

 

주수완
불교미술 사학자이자 우석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인도와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미술 도상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불꽃 튀는 미술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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