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안동 천등산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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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안동 천등산 봉정사
  • 노승대
  • 승인 2022.08.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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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천등산 봉정사는 큰 사찰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통도사, 선암사, 대흥사, 마곡사, 법주사, 부석사 등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곳 중의 하나로 당당하게 그 이름을 올렸다.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은 13세기 초 고려시대에 지은 전각이고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건물이다. 둘 다 국보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중기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 만세루가 있고 후기건물인 영산암도 있다. 고금당, 화엄강당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한 사찰에서 이처럼 시대별 건물을 다 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큰 행운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다. 젊은 수행자가 정상 부근 석굴에서 수행하다가 옥황상제의 시험을 이겨내자 하늘에서 수행자를 위해 석굴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니 산 이름도 천등산(天燈山)으로 바뀌었다. 석굴도 천등굴로 부르는데 지금도 그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수행자의 법명은 능인(能仁) 스님으로 의상대사의 제자였다.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려 보내니 지금의 절터에 내려앉았다. 절을 창건한 후 봉정사(鳳停寺)로 부르니 봉황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이다. 682년의 일이다.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유묵도 봉정사에서 만날 수 있다. 동농은 시와 서예에도 조예가 있었지만 과거시험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1886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문과급제했다. 여러 관직을 거치다 1910년 국권피탈되자 실의해 칩거했다. 1919년 3·1운동 후 심기일전해 상하이로 망명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조선총독부는 “남작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일본의 수치”라며 밀정 정필화를 파견, 동농을 귀국시키려 공작했으나 김구가 체포해 교수형으로 처단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결국 77세로 상하이에서 운명했다. 해방 후 동농은 일본의 남작 작위를 받았었던 행적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특히 며느리 정정화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녹두꽃>이라는 회고록을 남겼고 이를 토대로 그녀를 소재로 한 여러 연극이 공연됐다.

 

봉정사 초입 왼쪽의 명옥대는 퇴계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장소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름다워 명옥대(鳴玉臺)라 했다. 1665년에 처음 지었다.

 

몇백 년을 버틴 나무들이 고단한 중생을 맞이하며 말한다. “세상사 별거 아니야, 우릴 보렴” 그 숲길을 지나며 세속의 번다한 일은 저절로 잊힌다.

 

급경사 계단길이 누각 밑으로 곧게 뻗었다. 자연석 계단은 울퉁불퉁해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발길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진다. 몸과 마음을 낮추는 것이다.

 

천등산봉정사 현판은 동농 김가진이 1913년에 쓴 글씨다. 이 만세루를 덕휘루(德徽樓)라고도 하는데 이 현판도 동농이 썼다. 부드럽고 유한 글씨체다.

 

옛글에 “덕이 빛나는 곳에 봉황이 내려온다”하니 봉정사에 맞는 이름이다. 아래로 휜 문지방을 지나 오르면 대웅전의 앞 뜨락, 멀리 부처님이 미소 짓는다.

 

대웅전 왼쪽의 화엄강당은 한때 강당이었을 것이다. 기둥이 짧고 지붕이 무거워 보이는 것은 화엄강당 지붕이 대웅전 아래로 맞물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고금당(古金堂)은 예전에 이 건물이 금당(법당)이었기에 옛 금당이라 부른다. 1616년에 중수한 조선 중기의 건물이지만 조선 초기의 양식도 가지고 있다.

 

극락전은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1200년대 초에 세워진 건물로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최고 오래된 고려 건축물이다.

 

역시 맞배지붕 양식이어서 측면의 목조가구가 다 드러나 있다. 고려 건축물의 특징으로 두 손을 합장한 듯한 솟을 합장이 뚜렷이 보인다. 소박하고 세련됐다.

 

위의 부재를 받쳐주는 화반도 특이하다. 연꽃봉우리 모양을 기본으로 했는데 가운데에는 동자기둥을 세워 위쪽의 소로를 받게 했다. 고려의 독특한 양식.

 

내부 불단에는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닫집을 얹은 후 그 아래에 부처님을 모셨다. 내부 천장은 서까래가 모두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고려양식의 하나다.

 

극락전 왼쪽의 낮은 언덕을 오르면 큰 느티나무 뒤쪽으로 조그만 삼성각이 자리 잡고 있다. 봉정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 원래는 산신각이었을 것이다.

 

대웅전은 세종 17년(1435)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해 예배공간을 넓혔다. 그만큼 중생들의 의지처가 됐다는 뜻이다.

 

공포 역시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소의 혀처럼 앞쪽으로 돌출된 쇠서는 초기양식일수록 짧고 수직으로 끊겼다. 후기로 갈수록 길어지고 장식성이 가미된다.

 

대웅전 외부 서까래와 부연은 새로 단청을 올렸다. 그러나 퇴색된 맛이 나게끔 단청을 해서 고풍스러운 맛이 살아있다. 이를 고색(古色) 단청이라 한다.

 

공포와 공포 사이의 일부 벽화도 다시 채색했는데 고려양식의 연꽃과 모란이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화이고 모란은 꽃 중의 왕이어서 두 꽃을 주로 썼다.

 

대웅전 삼존불 뒤의 후불탱화는 1713년에 그려진 것이다. 탱화 뒤의 벽에서도 조선 초기의 후불벽화가 발견됐다. 두 점 그림은 각각 보물로 지정됐다.

 

삼존불 위 천장은 안쪽으로 깊이 판 후 작은 공포를 설치하고 용 두 마리를 그렸다. 보개천장이라 한다. 차츰 돌출되어 아래로 내려오니 닫집의 원조다.

 

삼존불 뒤 양쪽 기둥에는 각각 청룡, 황룡이 기세 좋게 감고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옛 법당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으로 대웅전의 연륜을 말해준다.

 

삼존불이 앉아있는 목조불단의 내부에서 “1361년에 탁자를 조성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연꽃이나 연잎 문양만을 장식한 불단은 고려시대에 유행했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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