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용문사 가는 길에 예천 권씨 초간공파 종택에도 들렀다. 종택은 임진왜란 이전 건물로 초간 권문해(1534~1591)의 조부인 권오상 선생이 지었다 한다. 십승지지의 하나인 금당실 벌판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사랑채와 사랑채보다 지대가 약간 높은 안채가 특이하다.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집을 앉힌 구조다.
예천 권씨는 원래 흔(昕)씨 였으나 고려 충목왕의 이름이 왕흔(王昕)이어서 예천 권씨로 바꾸게 되었다. 종택도 민속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고 권문해가 쓴 <초간일기>와 백과사전 격인 <대동운부군옥> 책판도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왕건이 고창(지금의 안동) 가는 길에 이름 높은 두운 스님의 초암을 찾아가니 동구의 바위에 용이 나와 앉아 있었다. 길조였다. 절의 이름은 용문사가 되었다. 견훤이 상주를 차지하고 고창마저 빼앗으면 고려와 신라는 통로가 끊어지고 삼국통일은 물 건너가는 상황, 왕건은 하회마을 인근 병산전투에서 고창 땅 세 호족의 지원을 받아 견훤에게 대승해 팔공산 대패를 설욕하고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930년의 일이다.
결국 5년 뒤인 935년, 왕건은 삼국을 통일했다.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으로 고창을 안동(安東)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 호족에게는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하사했다. 안동 김씨, 권씨, 장씨는 이렇게 탄생했다. 936년 왕건은 용문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일 년마다 쌀 150석을 내렸다.
승용차 뒤로 보이는 작은 문이 안채의 정문이다. 2단으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특이한 구조다. 왼편의 건물은 백승각으로 책판과 종가문적을 보관했다.
종택의 사랑채 건물로 누각형이다.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접대공간을 염두에 둔 건물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이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에 올라보면 부재에 덩굴무늬 초각이 보인다. 고려건축물에 보이는 양식이다.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대공도 아래쪽에서 둥글게 퍼진 연잎 모양이다.
권문해는 퇴계 밑에서 유성룡, 김성일과 함께 공부한 사람이다. 이 초간정도 그가 1582년에 지었고 여러 번 소실된 것을 1870년에 새로 고쳐 지었다.
일주문은 “중생과 부처가 하나며 만법은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문에서는 헛된 분별심을 버리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용문사의 대장전과 내부의 윤장대 2기는 하나로 묶인 국보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처음 지어졌으며 조선 현종 11년(1665)에 중수했다.
조선시대에 중수하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없었던 청룡, 황룡 조각이 나타났다. 동쪽 귀퉁이 기둥 위 측면 부재에 청룡조각을 했다.
역시 같은 기둥 위 정면에는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의 정면상 목판을 설치했다. 물에 살고 있는 수룡이니 화마는 얼씬도 말라는 뜻이 되겠다.
연잎과 연꽃봉오리 조각도 여러 곳에 베풀었다. 물에서 연꽃이 자라고 있다는 의미다. 천장에 연꽃줄기와 물고기조각을 설치할 수 없으니 외부에 조각했다.
앞의 삼존불이나 뒤의 후불목각탱은 모두 조선 숙종 10년(1684)에 같이 조성된 것이지만 각각 보물로 지정됐다. 가장 이른 시기의 목각탱이다.
윤장대는 안에 경전을 보관하지만 전체를 돌릴 수도 있다. 그래서 윤장대(輪藏臺)라 부른다. 국내에 오직 용문사에만 있으며 1173년에 조성된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 절에 내려오는 부역은 많고 동학운동, 갑오경장, 민비시해, 의병활동으로 사찰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 그때 절에 다녀간 이들의 낙서.
윤장대는 팔정도를 의미하는 팔각으로 만들어졌는데 책장 아래쪽 바로 아래에 돌아가며 지킴이 도깨비를 그렸다. 법당 수미단 하단과 같은 양식이다.
명부전에는 본래 14구의 동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1989년 4월 5일 9명의 동자가 도난당했다. 시중의 동자 조각상은 거의 사찰에서 잃어버린 것이다.
명부전의 장군은 원래 도교의 장군으로 명부를 지키는 문지기다. 장수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표범가죽을 허리에 둘러 그 위력을 뽐내는 중이시다.
명부는 죽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장군은 허리에 악어가죽(?)을 둘렀다. 사천왕 장식에서도 가끔 보이는 동물이다. 어쨌든 힘센 장군!
시왕의 총사령관 염라대왕이시다. 『금강경』을 좋아해 평소에 『금강경』을 독송한 망자를 다시 살려 보내기도 한다. 아, 관 위에 얹은 책이 『금강경』이네.
한 대왕님은 몹시 화가 났다. 죄인이 이실직고하기는커녕 끝까지 잡아떼고 죄가 없다고 버틴다. 너 같은 놈 때문에 내가 골이 아파. 너는 가중처벌이야.
또 한 대왕은 몹시 흐뭇한 표정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참회하며, 판결대로 따르겠다고 하니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래, 너는 정상참작이다.
명부의 하급관리 세 명이 줄줄이 서 있다. 죄인의 조서를 종합해 보고하는 판관, 판결내용을 모두 기록하는 서기인 녹사, 죽은 이를 데려오는 저승사자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