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화폭에 담은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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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화폭에 담은 스님들
  • 조정육
  • 승인 2022.05.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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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불교적 삶과 그림
<탁발>, 《단원 풍속도첩》(보물), 지본담채, 24×2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경)는 한국회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가장 뛰어난 화가’ 또는 ‘가장 조선적인 화가’로 불렀고 그를 향해 ‘신필(神筆)’이라 칭송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도는 물론이고 진경산수화, 고사인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분야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도석인물화는 도교와 불교의 예배 대상인 여러 존상(尊像)들을 대상으로 그린 인물화다. 이 글에서는 김홍도의 불교회화 중 스님과 관련된 그림을 그의 생애와 관련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원아집도>, 견본담채, 각 47.9×1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단원이 34세 때인 1778년에 중국의 유명한 ‘서원아집(西園雅集)’ 관련 이야기를 그린 여섯 폭 병풍이다. 
소나무와 암벽의 필치는 단원이 30대에 정립한 독특한 표현법이고, 건물 및 기구 등은 자를 사용해 정밀하게 그린 것이다. 대체로 필선이 명료하고 세밀해 화려하고 말끔한 느낌을 준다.

풍속화 속의 스님의 모습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에 김해 김씨 무반 집안의 서얼로 태어났다. 그는 10~14살 무렵에 안산에 사는 강세황(姜世晃)에게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은 당시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 시·서·화 세 가지가 모두 뛰어난 사람)’로 알려졌는데 그와의 인연은 평생 지속됐다. 김홍도는 심사정(沈師正)에게도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10대 시절을 두 대가에게 그림을 배운 후 20세가 되기 전 도화서 화원으로 임용됐다. 그는 20대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29세 때(1773)는 어용화사가 되어 영조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어진 제작 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종6품 주부직에 임용되었고 이어 별제직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김홍도는 주로 ‘사능(士能)’이라는 자(字)를 썼다. 30세(1774)에는 사포서 별제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스승인 강세황과 6개월 정도 함께 근무했다. 이 무렵에 그는 도교의 신들을 그린 <군선도(群仙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제작했다. 32세(1776)에는 종6품 울산 감목관 자리로 발령받았고, 영조의 승하로 보불(黼黻) 작업을 위해 한양에 오가는 등 관직 생활과 그림 작업을 지속했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37세(1781)까지 4년 동안 관직 없이 지냈다. 

40세가 되기 전까지 김홍도는 특별하게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이 시기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탁발>을 보면 스님을 그리되 특별한 예경심을 담았다기보다는 당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속의 한 장면으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탁발>은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이 화첩에는 <타작>, <씨름>, <주막>, <새참> 등 우리가 많이 보았던 풍속화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탁발> 또한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다채롭게 표현한 한 장면으로 포함됐을 뿐이다.

이런 추측은 그가 35세(1778)에 그린 <서원아집도6폭병풍>과 부채에 그린 <선면서원아집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는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에 있는 왕선(王詵, 1036~1089)의 정원인 서원(西園)에서 1087년에 소식(蘇軾), 이공린(李公麟), 미불(米芾) 등의 문인들과 도사 진경원(陳景元), 원통(圓通) 스님 등 당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모여 아회(雅會, 글 짓는 모임)를 열었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서원아집도는 아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시서화를 즐기고 음악을 연주하고 고동서화(古董書畵, 골동품과 글씨·그림)에 빠진 모습을 통해 당시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반영했다. 

두 작품 중 <서원아집도6폭병풍>에는 맨 왼쪽 끝에 스님이 유자(儒者)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스님의 모습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는 기존에 내려오던 서원아집도의 형식을 답습해 큰 변화 없이 인물을 배치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작품 또한 <탁발>과 마찬가지로 30대의 김홍도가 불교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울산에서 상경한 김홍도는 4년간 관직 없이 지내면서 창작에 몰두했는데 강희언(姜熙彦), 신한평(申漢枰) 등 동료 화가들과 함께 공적, 사적 수응화(酬應畵, 사람들의 요청으로 그려준 그림)를 그렸다. 또한 홍신유(洪愼猷) 같은 여항시인(閭巷詩人), 후기의 최대의 수장가 김광국(金光國), 성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이용휴(李用休) 같은 문인사대부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이용휴는 김홍도를 “인품이 매우 높아 고상한 선비와 운치 있는 시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인생의 황금기였던 단원(檀園) 시절의 그림 

4년간의 칩거 생활을 끝낸 김홍도는 37세가 되던 1781년 8월 26일부터 9월 16일 사이에 거행된 정조의 31세 어진도사의 동참화사로 참여한다. 작업을 마친 후 그에 대한 포상으로 동빙고 별제를 제수받았고, 2년 2개월가량 근무한 다음 39세(1783)에 안기 찰방에 임명됐다. 안기 찰방으로 2년 5개월간 근무했는데 이때부터 20대에 쓰던 ‘사능(士能)’ 대신 ‘단원(檀園, 박달나무 정원)’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단원’은 ‘선비만이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고 변함없이 올곧게 처신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는 명나라 말기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였는데 김홍도가 그의 인품과 화풍을 존경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 김홍도가 이유방처럼 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안기 찰방을 마치고 42세(1786) 여름에 상경해 도화서의 화원(畫員)으로 재직했다. 정조는 궁궐에서 필요한 그림을 김홍도에게 주관하도록 했다. 김홍도는 어람용 그림을 도맡아 하면서 40대 중반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1인자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신광하(申光河)가 쓴 글에 의하면 김홍도는 “궁궐 문에서 입시하여 불시의 부르심을 기다리니 집에 있을 때보다 궁 안에 있는 적이 많았다”고 전한다. 강세황은 이때의 김홍도를 “미천한 자신을 멀리하지 않은 군왕의 각별한 배려에 몰래 감읍하며 어떻게 보은해야 할지 몰라 애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인 1800년까지는 김홍도 인생의 전성기였다. 그는 어람용 그림의 전담 화사로 경화사족(京華士族, 한양 일대에 거주하는 사족)들의 아회에 참석해 문예적인 풍류를 즐기며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44세(1788)에는 정조의 명을 받아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영동 9개 군과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며 《금강사군첩》을 제작했다. 이 화첩에는 <묘길상>처럼 금강산의 불교 유적지를 감상하는 스님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탁발>에서와 마찬가지로 풍속화의 한 장면으로 그렸을 뿐 특별한 신심이 우러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홍도가 불교에 대해 신앙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46세(1790) 때 용주사 건립과정에서 정조의 명으로 대웅보전의 후불탱 주관자로 제작하면서부터였다. 용주사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수원 현륭원 묘소의 원찰이다. 김홍도는 이명기(李命基), 김득신(金得臣)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들과 함께 후불탱의 제작에 참여했다. 한편 김홍도는 이 시기에 대구의 남지장사(南地藏寺) 중창불사에도 시주자로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창불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숭보기(崇報記)』에는 김홍도가 ‘앞장서서 모금하여 남지장사를 중수했다’라고 적혀 있어 그가 사찰의 시주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할 만큼 불심이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하노승>, 24.8×21.3cm,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 소장

김홍도는 47세(1791)에 세 번째로 정조 어진을 그리고 그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을 제수받았다. 그는 부임 후 상암사(上庵寺)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 녹봉을 털어 시주한 후 48세라는 늦은 나이에 아들 김양기(金良驥)를 낳았다. 김양기의 어릴 적 이름 연록(延祿)은 ‘연풍 현감의 녹을 받을 때 얻은 아들’이란 뜻이다. 김홍도가 용주사 불화 제작에 참여한 사건이 불교 세계를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다면 연풍 현감 시절에 경험한 개인적인 체험은 불교를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홍도는 3년간의 연풍 현감 업무를 끝내고 51세(1795)에는 한양으로 돌아와 궁중 화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원행을묘정리의궤』 삽도 제작의 주관자로 선정됐으며 52세(1796) 5월에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삽도를 그렸다. 이때 역관 출신의 거부 김한태의 주문을 받아 김홍도 작품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을묘년화첩》을 제작했다. 대내외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였다. 그의 인생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작품에는 모두 ‘단원’이라는 호가 적혀 있다. 즉 <남해관음>, <지단관월>, <선상고사> 등이 모두 이때 제작됐다. 

<혜능상매>, 지본담채, 49.5×28.4cm, 개인 소장

김홍도는 화보(畵譜)를 통한 선승들의 종교 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듯 여러 점의 관련 작품을 남겼다. 화보와 관련된 작품으로는 <혜능상매(慧能賞梅)>와 <고승기호(高僧騎虎)>가 주목받는다. <혜능상매>는 명대에 간행된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縱)』 권6의 ‘혜능대사(慧能大師)’를, <고승기호>는 같은 책의 ‘풍간선사(豊干禪師)’를 참고로 했다. 그중 <혜능상매>는 당나라의 선승이며 선종의 6대조인 혜능대사가 매화를 감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혜능대사는 괴석과 나무를 배경으로 좌복 위에 앉아 있고, 주변에는 향로와 두루마리로 된 경전과 나무를 심은 화분이 보인다. 그림 좌측에는 ‘그윽한 향기가 구름처럼 온 하늘에 가득하다(暗香浮雲於諸天)’라는 제시를 적어 혜능대사의 법향이 매화 향기처럼 널리 퍼져나감을 표현했다. 

혜능대사를 그리면서 『홍씨선불기종』에는 없는 매화를 굳이 그려 넣은 이유는 혜능대사가 수행한 장소가 황매산(黃梅山)임을 암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18세기 중반 서울에서 경화세족과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매화를 감상하고 매화에 관한 시를 짓는 모임이 활발히 전개됐던 분위기도 반영했다. <혜능상매>와 비슷한 작품으로 <송하노승>을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김홍도가 선불교를 이해하고 조사들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화원이 됐다. 화원이 되어서는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어용화사로 최고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인생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김홍도 또한 56세에 큰 시련을 겪으면서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의 그림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승기호>, 지본담채, 31.8×35.7cm, 간송미술관 소장

 

참고문헌
조정육, 『조선 최고의 풍속 화가 김홍도』, 미래엔아이세움, 2016.
『간송문화』43,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5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문학박사로 동양화에 관련된 글과 강의를 한다. 『시절인연 시절그림』(2020),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2015),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2003) 외 2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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