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산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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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산사 가는 길
  • 김남희
  • 승인 2022.05.2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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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처럼 불법에 깃들다

지팡이를 짚은 노승이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멈춰 서서 숨 고르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다시 걸음을 옮긴다. 절경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힘겨운 걸음 끝에야 부처를 만날 수 있다. 수문장처럼 우뚝 솟은 바위 사이로 드러난 사찰의 위풍이 당당하다. 이제 노승의 발걸음도 가볍다. 여기가 바로 극락세계, 신광사(神光寺)다. 

만년에 ‘신광사 가는 길’을 밟다

신광사는 황해도 해주 북숭산(北嵩山)에 있는 사찰이다. 지금은 폐사가 되었지만 단원(檀園) 김홍도가 남긴 작품에서 당시 사찰의 위세를 실감한다. <신광사 가는 길>은 김홍도의 무르익은 필치가 농축된 만년작이다. 신광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에 923년(태조 6)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을 가져와 절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신광사의 창건연대는 그 이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신광사가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지정(至正, 1341~1370) 2년(1342)에 원나라 순제(順帝)의 원찰(願刹)이 되면서다. 순제가 세자 시절, 서해의 대청도(大靑島)에서 귀양살이하던 중 해주를 둘러보다가 북숭산에 이상한 기운이 치솟아 그곳으로 가보니, 수풀 속에 있는 부처를 발견했다. 상서로운 기운에 이끌린 그는 황제가 되면 부처의 가피에 보답할 것을 다짐한다. 그 후, 황제가 되어 신광사를 화려하게 중창했다. 법당에는 금 글씨의 편액을 달았고 찬란한 단청은 번쩍였다. 많은 대중이 수행하며 정진하는 대가람의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신광사는 1677년 큰 화재로 전각과 불상이 전소된다. 이듬해에 복원했다는 기록과 함께 18세기 후반 김홍도의 작품에서 사찰의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는 신광사오층석탑과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만 남아 있다.

<신광사 가는 길>, 지본수묵, 32.7×28cm, 김홍도미술관 소장

<신광사 가는 길>은 험준한 바위에 둘러싸인 대가람을 묘사한 작품이다. 규모가 크고 건물의 위세가 화려해 궁궐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누각을 이어 종을 배치했다. 종루를 지나면 사찰로 이어진다. 잣나무, 소나무가 울창해 아름다운 풍모를 과시한다. 

왼쪽 화면에는 짙은 먹으로 거대한 바위를 그렸고, 단풍이 든 나뭇잎은 바람 불면 훅 떨어질 것만 같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스님의 모습이 단아하다. 오른쪽 바위는 농묵으로 대담하게 점을 찍어 거칠게 표현했다. 바위를 등지고 사찰이 비스듬히 높게 배치돼있다. 화면 중앙에는 농묵과 담묵으로 원근감을 주어 넓은 공간을 조성하고, 물기가 적은 갈필로 가을의 정취를 살렸다. 울창한 숲은 사찰의 크기를 추측하게 한다. 중앙에 있는 제발(題跋, 발문)은 글씨가 탈락돼 잘 알 수 없지만 김홍도의 낙관이 있어 그의 진품임을 증명한다.

학자들의 노력으로 탈락된 제발의 글씨를 복원해보니, 1631년 편집한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저서 『석주집(石洲集)』에 수록된 <신광사>에 관한 시였다. 김홍도는 권필의 시 3, 4번째의 구절 ‘가을바람에 붉은 단풍잎은 찬 시냇물에 떨어지고(秋風赤葉寒溪水)/지는 달빛에 성근 종소리는 옛 산사에서 들린다(落月疎鐘古寺樓)’라고 적어놓았다. 시를 보니, 신광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관령을 넘어 낙산사에 안기다

김홍도는 정조(正祖, 1752~1800)의 명으로 많은 일을 한다. 명승지를 그리거나 의궤며 불화를 그렸다. 대마도에 가서는 대마도 지도를 그려왔다. 또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 1742~1789)과 함께 정조의 명을 받고 50일간 봉명사경(奉命寫景)을 떠나기도 했다. 

<대관령>, 《해동명산도첩》 중에서, 김홍도미술관 소장
<대관령>, 《금강사군첩》 중에서, 견본담채, 43.7×30cm, by 김홍도, 공유마당, CC BY<br>
<대관령>, 《금강사군첩》 중에서, 견본담채, 43.7×30cm, by 김홍도, 공유마당, CC BY

1788년 9월,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대관령을 지나 관동팔경을 두루 사생하고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린다. 동해안을 따라 연결된 관동팔경은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이 그곳이다. 화가들이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기유도(紀遊圖)’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행의 폭이 넓어져 유람한 후, 그림첩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김홍도는 월정사에서 그림을 그린 후, 대관령을 넘는다. <대관령>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산을 따라 경포대와 동해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산맥의 골을 짙은 미점으로 처리하고, 먹의 농도를 조절하여 원근감을 줬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잇닿아 있다. 사실적이면서도 회화적인 조화가 광활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낙산사>, 《금강사군첩》 중에서, 견본담채, 43.7×30cm, 개인 소장, by 김홍도, 공유마당, CC BY

이어서 관동팔경 중 양양 낙산사로 향한다. 낙산사는 신라 671년(문무왕 11)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영험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사찰로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은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구원을 구하는 중생에게 대자비를 행한다.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천수천안은 한량없는 손으로 중생을 어루만져주며, 헤아릴 수 없는 눈으로 중생의 마음을 굽어살피는 원력을 지닌 보살이다. 김홍도의 <낙산사>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대지를 3분의 1 크기로 배치하고 나머지는 바다로 탁 틔운 대범한 구도가 돋보인다. 왼쪽에는 낙산사의 대가람을 묘사하기 위해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다. 마치 카메라가 장착된 드론으로 촬영한 ‘드론 쇼트’ 같다. 소나무 사이로 사찰의 전각이 배치됐고, 기세 좋은 뒷산이 절을 수호한다. 바다는 잔잔하고 수평선 끝에 해를 그려서 시각적인 변화를 줬다. 바다가 한량없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로 펼쳐진다. 화가의 진심이 담긴 낙산사를 보면서 부처의 가피를 느낀다.

<장안사>, 《금강사군첩》 중에서, 견본담채, 43.7×30cm, 개인 소장, by 김홍도, 공유마당, CC BY

 

장안사의 마지막 초상을 그리다

김홍도와 김응환은 관동팔경을 두루 사생하고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회양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김홍도의 스승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회양 부사로 있던 큰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금강산 기행에 나서서, 먼저 장안사(長安寺)에 짐을 풀었다. 강세황은 당시 행적을 담은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장안사는 예전에 명찰이었지만 지금은 상하고 부서져서 다리는 무너지고 누각은 퇴락하여 주인은 없고 다만 남은 종복 몇 명이 서로 의지하며 간수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감개가 깊었다”며 쇠락해진 장안사를 묘사하면서 안타까운 소회를 덧붙였다.

장안사는 555년(양원왕 11) 고구려의 혜량(惠亮)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 있다. 장안사의 내력은 대가람의 전설만큼 크고 깊다. 수려한 전각에 불상을 조성한 것을 보니, 금강산을 대표할만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대대로 왕의 관심 아래 중건과 보수를 거듭했지만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김홍도가 그린 <장안사>는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속에 편안하게 가람이 배치된 모습이다. 깊은 계곡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기암괴석이 드러낸 산의 장엄한 풍광이 웅장하다. 원경의 촛대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금강산의 위용을 자랑한다. 표훈사에 이르러, 강세황은 회양 관아로 돌아가고, 김홍도와 김응환은 외금강을 두루 거친다. 10여 일 뒤, 다시 두 사람을 만난 강세황은 그들의 그림첩을 감상하며 실경을 본 듯 감탄한다. 김홍도와 김응환은 긴 여정을 마치고, 정조에게 70여 점이 장첩된 『해산첩(海山帖)』을 바친다. 

정조는 명승지를 유람하듯이 『해산첩』을 구경했다. 두 화원이 호흡했던 월정사를 둘러보고, 굽이굽이 가없는 대관령을 넘었다. 발아래 펼쳐진 강릉을 굽어보며 낙산사로 향했다.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아스라한 일출을 맞이했다. 일만이천봉의 금강산에 둘러싸인 장안사와 표훈사, 유점사 경내를 천천히 거닐었다. 70여 점의 감동이 그득했다. 지상(紙上) 기행을 마친 정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해산첩』은 그러나 애석하게도 순조 때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다행히 당시 초벌 그림 60폭을 묶은 『금강사군첩』이 전해져 김홍도의 빼어난 관찰력과 필력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림이 시간의 품에서 완성하듯이 화력도 연륜을 먹고 깊이를 더한다. 금강산을 사생한 경험은 김홍도 만년의 <신광사 가는 길>을 그리는 디딤돌이 됐다. 그리고 김홍도는 신광사로 향하는 노승처럼 불법에 귀의해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참고문헌
유홍준, 『화인열전 2』, 역사비평사, 2001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강산을 그리다』, 국립중앙박물관, 2019

 

김남희 
계명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조선시대 감로탱화에 나타난 시간성과 공간성 표현에 관한 연구」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옛 그림을 본다는 것』(2021), 『야단법석 괘불탱화』(2020), 『옛 그림에 기대다』(2019), 『극재 예술혼에 취하다』(2018), 『조선시대 감로탱화』(2018), 『일본회화 특강』(2016), 『중국회화 특강』(2014), 『한국미술 특강』(201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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