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골골[谷谷]마다 불상
상태바
[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골골[谷谷]마다 불상
  • 주수완
  • 승인 2022.04.28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주 남산의 불상과 화강암 예술의 궤적

남산에 수많은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이 불상들이 동시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남산을 걷는다는 것은 ‘산’이라는 공간을 걷는 것임과 동시에 ‘신라’라는 시간을 걷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 조각사에 있어 화강암 조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금동이나 목조, 소조와 달리 석조는 돌의 재질에 따라 조각기법에 큰 차이가 있는데, 무엇보다 그 돌이 얼마나 단단한 재질인가에 좌우된다. 돌이 단단할수록 정교한 조각은 어려워진다. 화강암은 그러한 돌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축에 들어 조각이 여간 힘들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조각이 덩어리처럼 뭉쳐있는 단순한 형태에서 점차 평면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표현기법으로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발전과정을 보인다. 남산은 불상에서 그러한 과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곳이다. 

이 글에서는 남산의 많은 석조불상 중에서도 특히 예술적으로 주목해야 할 대표적인 작품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불곡 마애여래좌상(감실불상)

이 불상은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 중 하나로서 ‘할매불상’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밭일하는 할머니가 햇볕을 막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걸치고 일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불교도상에서 이처럼 두건을 걸친 경우 보통은 지장보살로 보기도 하지만, 이 불상이 삼국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을 생각해보면 아직 지장보살 도상이 유행하기 전이고, 나아가 정수리 부분에 육계처럼 솟은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부처를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손의 모습이 부처의 수인인 선정인도 설법인도 아닌, 마치 양손을 포개어 소매에 넣은 듯한 모양이라 일반적인 부처님의 모습은 아니다. 가부좌도 오른발이 앞으로 내려와 있는 모습이어서 완전한 결가부좌가 아니다. 이러한 좌법은 충주 봉황리의 마애불상군에서도 보이는 좌법인데,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삼국시대 6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기에 서로 유사한 표현을 지닌 감실부처님도 조성 시기를 그만큼 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감실부처님으로 ‘할머니부처’라고 불린다. 명상에 잠긴듯 편안히 쉬고 있는 모습이다. 남산의 석불 중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꼽히며 석굴사원의 선행 양식으로 일컫는다.

부처님의 얼굴 부분만 입체적으로 조각하고, 몸은 평면적이면서 옷주름은 선각으로 처리한 데에서 화강암 조각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손을 소매가 감춘 것도 복잡하고 정교하게 표현되어야 할 부분을 교묘하게 생략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더구나 감실 안에 있어 조각가는 작업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을 묘사한 것일까? 두건을 쓰고 계신 것일까, 아니면 머리카락과 귀 부분이 명확히 나뉘지 않아 그저 두건처럼 보이는 것일까? 만약 머리 위에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이 맞다면, 마치 김명국의 <달마도>에 보이는 달마대사처럼 가사로 머리를 덮고 동굴 속에서 면벽수행(面壁修行)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나 이 불상은 일부러 동굴처럼 감실을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석굴 수행, 전정각산 유영굴 수행과 같은 동굴수행을 염두에 둔 것으로 참선 수행자로서의 부처님의 모습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남산 기슭, 삼릉으로 향하는 입구에 자리 잡은 선방사터의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본격적인 입체적 화강암 불상의 선구적인 사례다. 이전에 조성된 백제의 예산 화전리 사면불상이나 태안 및 서산의 마애삼존불상은 마애불, 즉 부조(浮彫, 평평한 면에 도드라지게 새김) 형식이었다. 이후 백제에서는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과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등에서 본격적으로 완전한 환조(丸彫, 재료의 사방을 모두 조각함) 석불상을 조성했다. 그와 거의 유사한 시기에 혹은 조금 앞선 시기에 신라에서 조성된 것이 배동 삼존불상이다.

경주 남산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본존불과 좌협시 보살은 7세기 중엽, 우협시 보살은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고신라불상의 대표작이다. 삼릉으로 향하는 입구, 삼불사 옆에 있는 이 석불은 흩어져 묻혀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운 것이다. 본존불 높이는 2.75m이며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각각 높이 2.28m, 2.2m다. 

언뜻 배동 삼존불상은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환조의 화강암 조각에서 신체를 날씬하게 묘사했다가는 자칫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균열이 생기거나 조각 과정에서 물리적 압력을 받아 구조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존불상은 팔과 손을 완전히 몸에 밀착시키고 목도 움츠린 듯이 표현해 단단한 덩어리 형태로 조각했다. 또한 굵은 융기문(隆起文, 돋을새김 무늬)으로 표현한 옷주름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조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것인데, 이는 조각을 위해 투입하는 공력에 비해 그 효과가 작을 뿐 아니라 그다지 사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중국조각에서 두 줄의 선각으로 옷주름을 표현하던 것을 융기문의 입체로 잘못 이해하고 접근한 결과로 보인다.

이 본존불상이 신라 석조각의 역사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임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은 오른손이다. 원래 오른손은 몸 앞으로 돌출돼 있어야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가슴 부분에 밀착해 부조처럼 조각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오른쪽 어깨에 걸친 가사자락이 오른 손바닥보다 더 앞으로 돌출돼 있다. 실제로는 어깨에 걸친 얇은 옷자락이 오른손보다 더 튀어나올 수는 없다. 아마도 조각가가 작업할 때 이러한 높이차를 제대로 염두에 두지 않고 조각에 들어갔던 것 같다. 비록 계산상으로는 착오였지만 단순한 부조가 아니라 환조의 입체로 이 불상을 조각하려고 시도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반면 좌우의 보살상은 이에 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양팔을 몸에 밀착시키지 않고 팔꿈치와 소매에서 늘어진 옷자락을 몸에서 띄워 분리하려고 한 시도가 돋보인다. 다만 이렇게 분리된 팔꿈치나 옷자락은 파손되기 쉬워서 보다 두껍게 만드는 과정에서 비례적으로 둔중한 조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본존불에서와 같은 덩어리 조각에서 벗어나 팔을 입체적으로 분리하고자 노력한 것은 조각적으로 굉장한 모험이자 시도였다. 

혹자는 좌우의 협시보살상이 양식적으로 차이가 나서 원래의 짝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좌협시보살상의 경우 보관에 화불이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생각된다. 양쪽의 협시보살상이 각각 뚜렷한 개성을 지닌 보살임을 강조하기 위해 좌협시는 신체가 강조된 육감적인 모습으로, 우협시는 화려한 장엄을 한 모습으로 차별화해 묘사하는데, 이는 조각이 조성된 7세기 초반의 도상학적 특징이며 그만큼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칠불암 마애불상군

배동 삼존석불보다 더욱 발전된 조각기법을 보이는 불상이 삼화령 삼존석불(석조미륵삼존불)인데, 굳이 팔과 다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이며, 옷주름 역시 더욱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인체를 강조하는 방법을 터득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만 현재는 남산의 원위치에 있지 않고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여기서 더 발전된 칠불암으로 발길을 돌려보려고 한다.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보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가운데 본존의 자세가 특이한데, 이처럼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倚子座]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유일하다. 본존미륵불 높이는 1.6m이며, 좌우 두 협시보살은 입상으로 높이가 1m 남짓한 아담한 체구에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칠불암은 여러모로 석굴암의 프로토타입이라 할만하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전반에 조성된 칠불암은 사방불이 새겨진 석주와 삼존불이 새겨진 마애불로 구성돼 있는데, 모든 불상은 부조이지만 입체적이며, 단순함 가운데 정교함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마애불을 구성하는 삼존불의 좌·우 협시보살입상을 보면 옷주름을 표현한 돋을새김은 몇 줄 되지 않는 단순한 형태이고 평행선에 가까운 간단한 패턴이다. 신체 역시 양감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공력을 기울이지 않은 듯 무심하다. 그러나 이 간단한 천의 자락은 이전의 선방사 삼존불상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마치 꽈배기처럼 보살의 팔뚝과 허벅지를 휘감으며 돌아간다. 이를 통해 마치 천의와 몸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 같은 육감적인 표현을 읽을 수 있다. 삼화령 불상에서 옷자락으로 인체의 실루엣을 은은히 드러내는 기법의 완성된 표현이라 할만하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동남산에서 깊은 골짜기로 꼽히는 봉화골에 있다. 앞에는 단을 쌓아 사방불을 새겼다. 뒤에는 높이 5m, 너비 8m의 바위면에 돋을새김으로 삼존불을 새겼다. 

특히 본존불이 오른쪽 가슴을 드러낸 편단우견의 착의법에 보드가야에서의 정각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의 수인을 결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것은 바로 석굴암 본존불상의 도상과 같다. 삼국시대 조각사에서 이처럼 가슴을 드러낸 부처님의 모습은 극히 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파격이라 할만하며, 특히 시무외인과 같은 설법의 자세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에 반해 항마촉지인을 결한 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도상은 아마도 의상대사에 의해 화엄종이 신라에 전래하면서 『화엄경』의 주요 무대가 되는 보드가야를 상징하기 위해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나 석주 같은 기둥 네 면에 사방불이 새겨진 것은 칠불암이 일종의 석굴사원과 같은 구조로 조성됐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석굴사원의 한 형식으로서 중심주굴이라는 것은 석굴 가운데 이와 같은 네모난 기둥을 두어 석굴 천정을 받치고, 기둥 네 면에 불상을 새겨 그 둘레를 도는 요잡(繞匝) 의식을 할 수 있도록 한 구조를 말한다. 칠불암도 그러한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 바위를 뚫고 들어간 석굴이 아니라 벽돌 형식으로 쌓아서 벽을 만들고 그 위는 지붕을 덮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벽면은 판석에 불교 경전을 새긴 ‘석경’으로 마감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감실부처 역시 석굴에서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었고,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간 삼화령 삼존석불 역시 판석으로 짜인 석굴 구조 안에 봉안돼 있었다. 그리고 칠불암 역시 벽돌식 석굴로 구성됐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굴착식, 판벽식, 조적식이라는 다양한 석굴이 이곳 남산에서 모색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완결판이 토함산에 조성됐으니, 남산은 신라 석굴사원의 실험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신라인들이 이렇게 석굴사원을 염원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이 단단한 화강암이야말로 후세에 영원히 전할 수 있는 불상과 사원을 조상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그 덕분에 영원까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천수백 년을 용케 버티며 지금 우리 앞에 부처님들이 옛 모습 그대로 현현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은 『삼국유사』의 「현유가 해화엄」조에 등장하는 미륵장육상으로 추정된다. 원래 장육상은 불상 자체의 높이가 16척인 상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대좌의 높이까지 합한 높이를 말했던 것 같다. 원래 대좌의 높이가 포함된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이 창의적으로 독특한 대좌 앞에서 무색한 질문이 되어 버린다. 「현유가 해화엄」에 의하면 유가종의 고승 태현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미륵장육상 주변을 돌면 미륵부처님이 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쉽게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마치 세 개의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이 3단의 윤형대좌를 보면 왜 부처님이 고개를 돌리셨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만약 이 불상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만 남아있었다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로만 간주돼 무심코 넘어갔겠지만, 다행히 그러한 전설의 원인이 되었던 불상이 현존하고 있다. 이 불상을 통해 전설이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게 된 셈이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한다. 높이 3m의 삼륜 대좌 위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조각사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석굴암 이전과 이후로 나눠볼 수 있다. 남산의 불상 중에서 칠불암이 석굴암 이전을 대표한다면, 용장사지의 미륵장육상은 이후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화강암 조각이 최고조로 발달했던 8세기 후반 이후에는 화강암이 원래 물렁물렁한 재료였던가 싶게 조각이 부드럽고 입체적이다. 이 불상의 흘러내리는 옷자락은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견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품고 있다. 신라의 조각가들은 화강암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있어 더 이상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았던 것만 같다. 

이상 살펴본 네 불상이 남산의 가장 대표적인 불상인가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짧은 지면 안에서 조각기법의 발전에 초점을 맞춰 이를 잘 보여주는 불상들을 추렸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남산의 다른 불상들을 살펴본다면 신라의 조각가들이 화강암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또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재료로서 남산의 화강암을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유동영

 

주수완
불교미술사학자이자 우석대 조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인도와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미술 도상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불꽃 튀는 미술사』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