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은 법현 스님에게 고향이다. 태어난 곳은 전남 화순이지만 어릴 적 평택으로 이사해 대학 입학으로 서울로 옮길 때까지 있던 곳이다. 평택 명법사는 불교와 지중한 인연을 맺은 곳이다. 고향 같은 평택에 40년 만에 돌아와 터를 마련했다.
평택 보국사(輔國寺)
“평택에서 학교 다닐 때 명법사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대입 시험을 앞두고 시험 당일에는 못할 것 같아서 전날 미리 해놓고 시험을 보러 갔어요. 대학에 입학해서는 매주 내려오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때는 오려고 노력했지요.”
그사이 평택은 많이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대규모 미군기지가 들어선 것이다. 보국사와는 담 하나를 두고 비행기 활주로가 들어서 있다. 인터뷰하는 날도 전투기가 수차례 이륙과 착륙을 반복한다. 스님은 어떻게 평택에 자리 잡게 됐을까.
3년 전 인연이 돼 보국사에 자리 잡았다. 절은 100년 남짓 됐다고. 오래된 법당, 안에 모셔진 탱화가 그즈음의 세월을 보여준다. “나라 국(國)자가 들어갔으니 우리 역사와 관련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고.
포교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스님이 계시기엔 전각이 좁아 보인다. 절 담장 밖에 있는 나대지(지상에 건축물이 없는 땅)를 포크레인으로 갈아엎고 있었다. 제대로 된 법당을 지을 여력이 아직은 없기에 가법당을 지어 법회를 규모 있게 할 생각이다. 가법당에 붙어 있는 담장을 건너면 미군기지이다.
“주변에 계신 분 중 미군기지 이전으로 상처 입은 분들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평택은 미군기지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가야지요.”
미군기지에 군종 스님이 계시는데 같은 종단 소속이란다. 조만간 안팎으로 함께 할 일이 생길듯하단다.
열린선원은?
법현 스님은 저잣거리에 열린선원을 세운 스님으로 많이 알려졌다. 몇 년간 열린선원과 스님 주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언젠가 일본 나가노에 있는 금강사를 운영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곧이어 평택 보국사도 운영하게 됐다. 근래에는 열린선원에 반갑지 않은 소식이 바람결에 들리곤 했다.
“근처가 재개발된다고 하니 어쩔까 싶었네요. 열린선원을 평택으로 이전할까도 생각했지만, 다들 서울에 계시고 이제는 나이도 들었어요. 사찰음식을 하시던 조계종 스님이 아무 조건 없이 내놓은 인연으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하게 됐습니다.”
2005년에 열린선원을 개원했으니 횟수로 17년을 넘어섰다. 그즈음이면 어였한 법당을 만들 수도 있지 않냐고 물었더니, 가까운 지인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나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만 안다. 그 외의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당신이 메이크 머니(make money)해서 나를 도와달라”라고 했단다. 이사를 하는 곳도 월세로 들어간다.
스님은 자신을 ‘참선 수행자’로 생각한다고. 대불련 활동, 졸업하고는 불교레크리에이션, 종교 간 대화, 태고종 종단 집행부(부원장 소임까지 했다), 종단협의회 사무국장 활동까지 했지만, 참선을 놓은 적이 없다.
스님은 저잣거리에서,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열린선원(禪院)’을 시장 한 가운데 세웠다. 열린선원을 세우면서 스님은 수행과 불법을 통해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우리 절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성도재일 전날 밤새 참선만 한다고 공지합니다. 다른 절은 참석자들의 편의를 위해 시간도 조정하고, 기도와 절, 참선을 병행하지만 우리는 밤새 참선만 합니다. 열린선원을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정진하는 곳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스님은 포교를 위해서 레크리에이션 교육도 YMCA에서 받았으며, 교회며 성당을 뛰어다니며 종교 간 대화도 진행했다. 종교가 다르지만 대화는 깊었다. 곤란한 일을 겪기도 했다. 어떤 교회에 축하할 일이 있어 ‘축사’를 하게 됐는데, 목사님께 “어떻게 사탄에게 축사를 맡기냐”라는 항의도 있었다고. 스님은 그 시기에 짬이 나면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절에 들어가서 참선을 지속했다. 태고종 사찰보다 조계종 소속 사찰에 많이 있었다며 껄껄 웃는다.
서울, 인천, 일본에서 평택으로 흐르는 법法
스님의 이력에 빠진 것이 하나 더 있다. 코로나19로 중지했지만, 인천공항 터미널에 법당 운영도 했다. 서울 열린선원, 일본 금강사, 평택 보국사까지 어떻게 운영할까 궁금했다. 코로나 전에는 일본 금강사를 한 달에 한 번 갔었는데 다른 스님에게 부탁해 놓았고, 지금은 서울과 평택만 오간다고.
평택 보국사에 와서 제일 먼저 부처님오신날 연등 행사를 진행했다. 아는 사람 없는 곳이었지만 몇 분의 신도들과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어찌어찌 소식을 알게 된 분들이 함께해 성대히 치렀다. 그때부터 평택에서 자리 잡은 듯하다고.
평택에는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위해 걸어갔던 흔적이 있다. 평택의 여러 사찰과 이를 잇는 일도 하고자 하고, 평택이라는 공간이 군사와 관계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에 맞춘 활동도 구상 중이다. 하지만, 스님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일구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중심이다.
“고등학교 때, 명법사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밤새 참선법회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환희심을 잊지 못하죠. 인생을 살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상처도 받지만, 그때부터는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명상의 힘이 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당신은 돈하고는 큰 인연이 없는 듯하다고. 하지만 그래야만 수행자로서 본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도 던진다. 어렵지만 열린선원에서 부처님 법이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듯, 보국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