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 일선으로
스님은 1995년 선운사 참당암으로 돌아와 먼저 시작한 일이 선원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여러 선원을 돌아다니며 수행했고, 부산에서 포교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스님이 참당암으로 돌아왔을 때 스님이 출가한 선운사는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근본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마음에서 선원을 먼저 시작했다. 2007년 선운사 주지 소임을 운명적으로 맡았다. 두 번의 주지 임기를 마친 2015년, 여러 인연으로 맡던 내외부의 소임을 모두 내려놓고 참당암에 머물고 있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
생존의 문제 기후위기
3년 동안 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직을 맡았고, 2019년부터 상임대표 활동을 하고 있다. 불교환경연대도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다. 불교환경연대를 사실상 이끌던 수경 스님의 빈자리가 컸던 시기다.
조계종 교구본사 주지라는 자리는 정부 체계로 따지자면 광역지방자치단체의 도지사급이다. 즉, 도지사를 마치고 시민단체의 대표가 된 격으로 조금은 예외적인 선택이다.
이점이 제일 궁금했다. 교구본사 주지를 마치자마자 시민단체의 대표가 될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을까. 주지 소임을 마친 얼마 후 참당암으로 여러 사람이 찾아와 설득했고, 고민 좀 하다가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고.
“사실, 제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선운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던 시절, 한반도 대운하 반대 운동도 했죠. 환경운동이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고 불교가 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어요. 특히 기후위기 시대에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2021년 6월, 10여 명의 스님과 시민단체들이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 모였다. 동물 살처분으로 희생된 동물들을 추모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기도회를 불교계 주도로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법만 스님은 상임대표 자격으로 발원문을 낭독하고 집회를 함께했다.
스님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로 책임감 있게 일을 진행하고 있다. 불교계 시민운동단체 중 지역 지부를 꾸리고 회원과 함께하는 단체는 몇 없다. 불교환경연대는 불교 시민운동을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스님은 최근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기후위기’에 불교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후위기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성장해 왔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편리함과 풍요만 추구해 왔죠.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무한할지라도 지구의 자원은 유한합니다. 자연은 용서를 모릅니다. 그런 반성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이 연기와 중도이고, 실천적으로는 자비와 생명 존중 아니겠어요? 불교에는 이미 있는 것이고,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환경선언으로 이해합니다.”
스님은 우리 시대의 화두인 기후위기에 불교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소욕적인 삶의 양식, 불교가 추구하는 방식 아니겠냐고 되묻는다.
수행복지·교육문화라는 화두
스님이 선운사 주지로 있는 8년 동안 선운사는 말 그대로 ‘급’이 달라진 사찰이 됐다. 조금 과장하면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의 ‘동백꽃’만으로 유명했다. 당시 법만 스님은 최연소 교구본사 주지였다. 선운사 도량을 일신했지만, 불교계에서 스님의 공력을 인정받은 것은 ‘선운사 노후 수행마을’이다. 다들 필요로 했지만 방법을 찾고 있을 때, 교구본사 최초로 연로한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선운사 지척에 건립했다. 선운사 스님들과 불자, 일반 시민들이 그야말로 전력을 기울였던 사업으로 아무 조건 없이 선운사를 재적으로 출가한 지 30년이 지난 스님들은 방사로 들어올 수 있다. 주거와 의료를 보장해드리고 적지 않는 수행연금도 지급하고 있다. 여러 교구본사 사찰뿐 아니라 불교계보다 몇 수 앞섰다고 평가받는 가톨릭 신부들도 찾아와 답사하고 부러워했다고.
스님은 석전 스님 등 선운사를 인연으로 하는 고승 선양 작업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새삼스럽지만 선운사는 문학과 예술의 자취가 흠뻑 젖어 있는 사찰이다.
주지 소임 회향 이후 처음으로 선운사 직책을 하나 맡았다. 고창읍 중심에 있는 ‘선운교육문화회관’ 관장 소임을 2020년부터 시작했다. 고창읍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대지가 3,967m2(1,200여 평)에 3층 건물이다. 보조금 없이 오로지 선운사 자부담으로만 충당했다.
“선운사 소임을 맡으며 두 가지를 생각했죠. ‘수행마을’을 필두로 한 복지사업이 첫 번째고, 청소년 등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문화 사업이 두 번째였죠. 선운사는 10여 개의 복지시설을 운영하거나 위탁하고 있습니다. 교육문화회관 건립으로 문화 사업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개원 초기여서 부득이 스님이 관장을 맡기로 했다. 자리 잡힐 때까지만 할 생각이다. 갤러리, 육아 나눔터, 담마카페, 명상학교, 로컬푸드 등 고창읍 내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사업이 펼쳐진다.
얼마 전,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여기서 나온 수익으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개원하자마자 ‘코로나 19’가 벌어져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궤도에 오른 것 같다고.
참당암에 모셔진 지장보살
이야기가 참당암으로 옮겨지자 스님의 눈빛이 커지고, 목소리가 올라간다. 참당암에는 두 분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지장전에 모셔진 고려시대 지장보살이 한 분이고, 명부전에도 한 분 계신다. 명부전에 모셔진 시왕은 오래전 경주에서 나는 돌로 조성해서 모셨다.
“애초에 선운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도, 도솔암에 모셔진 지장보살님도 참당암에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선운사 지장보살님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다시 돌아왔죠.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한 분은 선운사로, 한 분은 도솔암으로 모셨죠. 참당암 지장보살님만 돌로 조성돼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허허.”
스님은 참당암 선원에 주력하고 있다. 여러 일이 있지만, 불교의 근본은 수행이라는 오랜 생각은 변함없다. 번잡스러운 바깥일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고. 1995년 참당암에 올 때 시작한 선원, 뿌리내린 선의 기운이 봄날을 맞기 시작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