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승화하다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는 20세기 한국을 빛낸 최고의 예술가로 통한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국제무대로 진출해 한국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동양의 진주’, ‘반도의 무희’, ‘한국의 이사도라 덩컨’ 등 최승희를 일컫는 다양한 수식은 그의 존재론적 의의를 한층 부각한다.
근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최승희는 한마디로 기념비적 인물이다. 가장 뚜렷한 무용사적 업적은 신무용(新舞踊)이라는 새로운 춤사조의 창출로 귀결된다. 신무용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서구의 모던댄스를 수용, 민족 고유의 전통(춤)과 접목하여 새로운 공연미학으로 정립한 일종의 춤사조를 의미한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신무용은 근대 ‘서구적 충격’의 산물로서 신문화(新文化) 물결에 편승한 신교육, 신문학, 신연극, 신여성 등과 등가를 이룬다. 일제 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가 근대 신여성의 전형이었음은 매우 흥미롭다.
신여성의 표상, 최승희
신여성은 한마디로 근대의 산물이다. 신여성은 ‘새로운 여자들’ 혹은 ‘모던걸’로 불린다. 근대 신여성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근대라는 공간에 투영해 근대성을 구현해가는 일종의 아방가르스트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외모에서 신여성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신여성의 외모는 근대적 자아를 성찰적으로 투사한 대표적 사례로 보인다. 신여성의 외모는 대개 서구적 취향이 짙으며, 반사회적 혹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전통적 인습과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주체적 자아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최승희의 외모에 투영된 신여성 코드는 무엇인가? 우선 서구적 패션 감각에서 감지된다. 큰 키의 최승희는 각선미가 돋보이는 양장을 선호했다. 모던 풍의 양장과 뾰족한 구두, 모자에 이르기까지 최승희의 외모는 근대 신여성이 추구한 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1930년대 서구의 전형적인 아르데코풍의 직선형 원피스를 착용하거나 모피코트를 즐겨 입고, 클러치백을 드는 등 럭셔리한 느낌을 강조했다.
당시 신여성은 대부분 양장 차림에 하이힐을 신었고, 머리는 단발을 선호했다. 단발은 ‘모던걸’을 표상하는 대표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신여성에게 단발은 서구적 이상이자 동경의 지표로서 모더니티(근대성)의 실현으로 읽힌다. 신무용가 최승희 역시 과감하고 도전적인 모습의 단발머리를 했다. 단발은 신여성으로서 최승희의 이미지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숙명여고 시절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모양을 했던 최승희는 10대 중반 단발머리로 바꿨다. 1926년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문하에 입문한 직후 시기로 여겨진다. 1927년 겨울 도쿄 거리에서 찍은 무용연구소 동기생들과 함께한 사진에 단발머리를 한 최승희의 모습이 보인다. 최승희는 1946년 월북하기 전까지 단발머리를 고수했다. 단발은 무용가 최승희의 외모를 표징하는 일종의 트레이드마크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최승희의 단발머리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최승희는 귀밑을 가리는 짧은 단발을 선호했다. 직선의 심플함이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다. 옆 가르마를 하고 정발제로 모발을 깔끔하게 정리해 얼굴라인에 밀착한 모습이다. 서구적 외모의 소유자 최승희와 퍽 잘 어울린다. 기하학적 단순함과 냉철함, 도전적 인상을 강조한 그녀의 단발은 신여성 이미지를 배가하는 데 일조한다.
한편, 근대 도시는 신여성의 소비와 유행의 장이었다. 무용가 최승희의 활동은 근대 모던 생활의 기초가 되는 경성이라는 도시공간에서 전개됐다. 해주 최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경성의 돈화문과 단성사 사이 수운동에서 살았다. 이후 숙명여고 시절 체부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남산 기슭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했다. 문학가 안막과 결혼한 후엔 서빙고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경성공회당, 장곡천공회당 등은 경성 사대문 안에 있었다. 이렇듯 최승희는 근대 도시의 전형적 공간인 경성을 중심으로 무용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근대 신여성의 표상인 최승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단발머리는 “신여성=단발”의 등식을 성립했다. 훤칠한 키와 서구적 용모, 단발머리와 양장의 세련된 차림은 근대 서구적 이상을 동경한 대중들의 감성과 심미안을 자극했다. 전통적 인습과 굴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갈구한 신여성의 자의식은 무용가 최승희의 내면세계를 관통해 그의 실존성을 더욱 가치 있게 빛내고 있다.
승무, 보살춤에 투영된 불교문화
최승희가 동양의 불교문화에 심취해 무용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1930년대 후반 미국, 유럽 등 세계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후 동양적 전통(춤)에 깊은 관심을 둔다. 그의 관심은 조선을 넘어 일본, 중국 등으로 확산했다. 이른바 춤을 통한 아시아적 가치 창출을 모색한 것이다. 특히 불교를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창작했는데, 우선 <승무>가 있다.
<승무>는 한국 민속춤의 백미로 통한다. 불교의 재의식(齋儀式)에서 기원한 <승무>는 두 가지 갈래로 전승됐다. 하나는 무형문화재 차원의 원형 보존 계승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 계승이다. 최승희의 <승무>는 후자에 속한다. 20세기 초반 승무의 명인으로는 내포 출신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이 손꼽힌다. 최승희의 <승무>는 명무 한성준에게 익힌 전통춤 <승무>를 토대로 자신의 창작적 안목을 가미한 결과의 산물이다.
최승희는 1930년대 한성준이 국악인들과 음반 취입차 도쿄를 방문할 때마다 제국호텔에 모셔놓고 전통춤을 체득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승무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5년 최승희의 <승무> 사진이 일본에서 발굴됐다. 이시이 바쿠의 손자인 이시이 노보루(石井登)가 조부, 부친을 거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최승희의 <승무> 사진을 연낙재에 기증해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여기서 최승희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검은색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 흰 고깔을 쓴 채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얼굴의 윤곽선이 또렷이 드러나도록 고안된 고깔, 인체에 밀착된 장삼 자락 등 현대적 세련미가 돋보인다.
불교 소재의 작품으로 <보살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다. 최승희의 <보살춤>은 조선시대의 명화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티브로 형상화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서서 춤추는 <보살춤>은 미세하고 정적인 움직임으로 일관한다. 인체 뒤쪽에서 조명이 비치기 때문에 환영적인 느낌과 더불어 몸체의 실루엣이 그려내는 선적 아름다움은 관객의 시선을 충분히 사로잡을 만하다.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홀로 선 최승희는 한쪽 다리를 약간 굴신한 가운데 엄지와 검지를 활용한 수인의 동작을 부드럽고 유려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불상에 내포된 종교적 경외감과 신비로움을 한껏 표현한 수작으로 손꼽힌다.
그밖에 불교를 소재로 한 안무작으로 <가무보살>, <바라춤>, <석왕사의 아침> 등이 있다. <가무보살>은 일본 가마쿠라시대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창작된 작품으로 구름 속에서 노래와 춤을 추는 보살의 평화로운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최승희는 월북 이후에도 불교에 토대한 작품활동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작 <바라춤>이 대표적이다. 최승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바라춤>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석왕사의 아침>은 함경도의 사찰 석왕사에서 체험한 스님들의 염불하는 모습에 착안해 창작한 작품으로 초기작에 속한다.
내포 불교문화와 최승희
그렇다면 최승희의 불교에 대한 관심의 기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추측하건대, 그의 스승 한성준과의 매개를 통해 불교문화에 침윤된 듯싶다. 주지하듯 최승희에게는 두 명의 춤 스승이 존재한다. 첫 스승은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이다. 1926년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을 관람하고 ‘문화적 충격’을 느낀 최승희는 일본에 유학,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다. 그러나 서양 모던댄스 형식으론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최승희는 조선춤의 명인 한성준에게 입문해 민족 고유의 춤을 사사한다.
충남 홍성 출생의 한성준은 8세 때 춤과 장단, 줄타기 등 민속예능을 익히고 내포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 후 청년기 전국 유랑을 통해 전국의 민속가락과 춤을 섭렵하고 서울 무대로 입성해 명고수·명무로 일가를 이룬다. 특히 1930년대 사라져가는 조선춤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창립해 전통춤을 집대성하고 무대양식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성준의 전통춤은 내포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17세 때 내포의 중심 사찰인 덕숭산 수덕사에 들어가 춤과 장단의 원리를 터득하고 전통 불교 재의식을 접한다. 수덕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손꼽히는 경허와 그의 제자 만공 선사가 법을 펼친 곳으로 근현대 한국 선맥의 종가(宗家)로 불린다. 한성준은 수덕사 시절 경허·만공 선사 등 근대 선불교의 대승들과 교유한다. 나아가 수덕사 대웅전 불사에 시주하는 등 내포 지역 불교문화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한다.
내포의 불교문화는 명무 한성준의 예술세계를 살찌우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양분이 됐다. 이는 한성준에게 춤을 사사한 신무용가 최승희에게로 이월됐다. 최승희는 일제 강점기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을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에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해 세계무대로 진출했다. 천재성과 동양적 감성으로 세계를 휘어잡았다. 이른바 한류 열풍의 선두주자로 손색이 없다. 창작의 자율성과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국제무대에 진출해 한국 춤의 문화적 위상을 높인 최승희의 작품세계 근저에 내포의 불교문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포에 있는 수덕사는 근대 신여성과 관계가 깊은 사찰이다. 예컨대, 개화기 여성운동가로 활약한 대표적 신여성 일엽 스님은 만공 스님 문하로 출가해 수덕사와 인연을 맺었다.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이 있다. 그는 만공 스님 문하에 출가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덕사 입구에 있던 수덕여관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김일엽, 나혜석에서 최승희에 이르기까지 수덕사를 비롯해 내포의 사찰이 근대 신여성과 예사롭지 않은 인연의 끈으로 연결돼 있음을 반추해 본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이자 무용평론가. 서울시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연낙재 관장과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