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지도’를 따라야만 했던 여성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자기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여성도 사람이며 자유로운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때는 개화기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개화기 이전에는 여성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일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에 여성은 주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되지 못했다. 유교 이념을 따르던 조선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됐던 평생 한 남편만을 섬기는 ‘일부종사(一夫從事)’와 어려서는 아버지, 시집간 뒤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 아들을 따르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덕목은 여성을 주체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가문을 잇고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봤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개화의 바람과 함께 조선에 전해진 기독교 신앙은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줬다. 특히 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는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사람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여성들이 정식으로 학교에서 교육받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가장 먼저 교육의 기회를 마련했다. 당시 기독교는 그동안 억압 속에서 살았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특히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여성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했다.
신여성 1세대로 잘 알려진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 또한 기독교 영향을 받았다. 이들 중 나혜석은 개화기 관료였던 아버지와 교육에 깊은 열의를 가진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관련 소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삼일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사립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나혜석은 진명여학교 3학년 때 반장을 하는 등 적극적인 학생이었으며, 최우수로 졸업을 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1896년 나혜석과 같은 해 출생한 김일엽은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귀하게 얻은 딸에 대한 사랑과 강한 교육열을 보이는 어머니 덕분에 남동생들과 함께 정식으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김일엽 역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에서 공부했다.
집회와 출판 등을 허용하지 않던 일본의 무단통치 시기, 젊은 지식층들은 자유와 신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당시 미국과 유럽 등에는 소수의 인원이 유학을 갔으며 대부분은 가까운 일본으로 향했다. 이들이 일본에서 접한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과 자유연애 등은 그동안 억압 속에 살았던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여성 유학생들은 민족해방 문제와 더불어 조선의 억압적 가족제도를 비판했다. 개인의 의사는 무시한 채 가문을 위해 강요되었던 조혼과 같은 결혼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여성이 가문을 위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당시에 유행하던 자유연애 옹호와 실천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신식학문을 익힌 여성들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 ‘신여성’이라 불리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의 모습과 행동, 주장은 조선 땅에 크고 작은 파란을 일으켰다.
‘신여성(모던걸)’은 ‘못된걸’?
‘신여성’이라는 말은 1910년대부터 몇몇 신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신조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용어는 도시의 지식인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됐다. ‘신여성’은 처음에는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점차 양장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당시에 신여성은 단순히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사는 여성들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구자로 찬미됐다. 특히 신여성 1세대라 불리는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1920년대에는 신여성에 대한 찬미가 절정에 이른다.
1세대 신여성들은 그동안 여성들을 억압했던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일본에서 유학한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은 유학시절 접한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남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특히 여성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결혼제도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성의 이중규범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회에서 신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녀들의 주장과 행동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기존의 봉건적 관습과 제도를 유지하기를 원했던 세력들 사이에서 불만과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신여성(모던걸)’을 ‘못된걸’로 표현하며 신여성들에 대한 비판이 절정에 달한다.
‘모던걸’로 불리다가 급기야 ‘못된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신여성들에 대한 담론은 주로 ‘여성 교육’과 ‘성(sexuality)의 자유’에 대한 문제였다.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 개화 사상가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백성들이 무지로부터 깨어나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이 민족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개화 사상가들과 뜻을 같이했던 신여성들은 이에 더해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봉건적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나혜석은 수필 「잡감(雜感)」에서 그동안 여성들에게 미덕으로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던져버렸을 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기꺼이 세상으로부터 욕 먹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김일엽 또한 교육을 통한 여성의 발전과 자유를 주장했다. 그녀의 소설 「자각(自覺)」에는 일본으로 유학 간 남편에게 이혼을 강요당하는 구여성(신여성과 대비해서 당시 구여성이라는 말도 종종 사용됐다)인 아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일본으로 유학 간 남편이 성적 일탈 끝에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용서해달라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이에 그녀는 남편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끈에 맨 돌멩이인 줄 아느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자신이 여자의 몸이기 때문에 환경을 벗어나지 못해 이상에 맞지 않은 남편과 억지로 지냈으며’, ‘뱃속의 아이는 낳는 대로 돌려보내겠다’고 남편에게 답장을 보낸다. 이후 그녀는 ‘노예의 생활에서 벗어나 인제는 한 개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값있고 뜻있는 생활을’ 위한 새로운 출발을 선택한다. 소설에서는 무지했던 구여성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신여성으로 거듭나기를 꿈꾸며 공부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내용이 그려졌다.
그동안 자신의 권리를 찾기보다는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살았던 여성들. 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자 그 비난의 화살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신여성들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신여성들은 1920년 김일엽이 창간한 「신여자」에 필진으로 참여하는 등의 활동으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과 여성의 권리 옹호를 지속해서 주장했다.
몸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신정조관’
초기에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신여성들은 점차 한국의 가족제도와 남녀 차별적인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신여성들은 한국의 가족제도 중에서도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강제됐던 결혼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며 자유연애를 옹호한다. 봉건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장하는 자유연애의 문제는 그동안 여성에게만 강요됐던 정절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동이었으며, 500년 동안 견고하게 유지됐던 가부장제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신여성들의 주장은 비난과 옹호의 엇갈림 속에서 사회적으로 담론화됐다. 여성들에게 ‘미덕’이라는 미명 아래 강요됐던 것 중 하나가 ‘정절’인데, 이에 대해 나혜석은 급진적 주장을 편다. 남편의 친구인 최린과의 스캔들로 이혼을 당한 나혜석은 남성들은 처첩을 일삼으면서도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적 풍습을 맹렬히 비판하며, <신생활에 들면서>라는 글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며 정조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취미’라는 주장을 펼친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남녀 사이에 자유연애가 유행하면서 많은 젊은 남녀들이 자유연애를 실천했다. 그러나 자유연애의 결과는 여성들에게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신여성들과 자유연애를 했던 남성 중에는 자유연애를 한 여성들을 ‘탕녀’라고 극단적으로 지칭하며 문제 삼는 이들도 있었다. 남성들의 이중적 시각 때문에 흠모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 된 신여성의 입장이었던 나혜석은 「신여자」 2호에 현실을 풍자한 글이 담긴 그림을 발표해 이율배반적 행동을 일삼는 남성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나혜석이 봉건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한 정절에 대해 정면으로 맞설 때 김일엽 또한 자기 생각을 글로 써서 발표한다. 그녀는 남성들은 성적 일탈을 일삼으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요하는 성에 대한 이중규범을 강하게 비판하며 ‘신정조관’을 주장한다. 김일엽이 주장하는 신정조관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육체적인 관계보다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처녀와 비처녀의 관점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김일엽의 이러한 주장에는 친구인 김명순이 데이트 중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고 비난받는 일에 대한 안타까움도 일부 담겨있다. 그리고 당시 자유연애를 실천한 신여성 중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경우, 사회적 비난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순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부인이 있는 남자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개탄도 담겨있다. 글이 발표됐을 당시 김일엽은 남성들과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김일엽은 자신을 향한 혹독한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신정조관’ 주장을 이어갔다.
신여성,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물하다
신여성 1세대인 나혜석은 1921년 발표한 <인형의 가(家)>라는 시에서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라고 쓰고 있다. 나혜석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자신만이 진정한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 시대를 살았던 모든 여성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신여성, 그들이 원했던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돼 자유를 누리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그래서 후대인들에게 ‘선각자’로 불리는 그녀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맘 편히 공부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월간 「불광」 569호(2022년 3월호) '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특집 무료 공개 기사입니다.)
류진아
여성학과 국문학을 공부하고 부경대에서 「근대 여성소설에 나타난 여성 폭력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저로 『김명순에게 신여성의 길을 묻다』, 『여성과 문학』 등이 있다. 현재 울산과학대와 부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