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서 왔을까? 어느 시인은 “봄은 ‘본다’에서 온 계절 이름”이라고 했다. 봄에는 만물소생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사실 불확실한 어원이다. 그러나 계절은 확실하다. 겨우내 극성이던 찬바람도 어느 순간 얼굴색을 바꾼다. 때가 됐다는 뜻이다. 봄을 부르는 것이다.
2월이면 한반도 남쪽에서부터 봄소식이 들린다. ‘봄의 전령’이 봄을 알리고, 3월이면 곳곳에서 만개한다. 매화다. 예부터 매화는 일찍 꽃을 피운다고 해서 조매(早梅), 한매(寒梅), 설중매(雪中梅) 등 별칭으로 불렸다. 홍매, 백매, 청매 등 색에 따라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봄이 오기도 전에 성급하게 첫 꽃을 피우는 매화도 있다. 그러다 날이 추워지면 금세 움츠러드니, 헛걸음하는 상춘객(賞春客, 봄의 경치를 즐기러 나온 사람)이 적지 않다. 오고야 마는 봄처럼 확실한 ‘봄의 전령’ 매화를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무풍한송로 끝에 피는 자장매
거제에는 구조라 초등학교 교정에 4그루 매화가 있다. 시기적으로는 매년 1월 10일경 꽃망울을 맺고, 입춘(2월 4일) 전후에 만개하는 거제 춘당매는 비교적 빨리 피는 매화로 알려졌다. 비슷한 시기에 ‘봄의 전령’을 자처하는 매화가 있다. 통도사 자장매다. 통도사를 창건한 스님인 자장 율사의 지계 정신을 기려 자장매(慈臧梅)라고 했단다. 1643년에 심었다 하니 올해 379살이다.
영축총림 양산 통도사에 금강계단과 자장매만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자장매를 보려거든 통과의례가 있다. ‘소나무들이 춤추듯 구불거리는 길’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를 거쳐야 한다. ‘아름드리 노송들이 춤추듯 구불거리고 항상 푸르름으로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길’인데, 누군가 화폭에 붓으로 소나무들을 휙휙 그어놓았다. 나이를 100~200살 먹은 소나무 사이로 바람마저 구불구불 흐를 것만 같다. 전국의 좋은 소나무를 베어가기에 혈안이었던 일제 강점기, 구하 스님과 경봉 스님의 지혜를 떠올려도 좋다. “다 베어갈 거면 통도사 저 안쪽부터 해라.” 영축산 중턱부터 소나무를 베어갔으니, 통도사 입구 소나무는 살아남았다. 2018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됐고, 통도사 8경 중 제1경이고, 매표소에서 부도전까지 1.6km 거리라서 걷기 좋으니 거를 이유가 없다. 자장매는 이름만큼 유명한 홍매다. ‘우리나라 홍매의 표준’이라 불린다. 만첩홍매나 분홍매 보다 크고 화려하다. 초행길이라면 흔히 극락전 옆에 나란히 피는 홍매와 청매를 자장매와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자장매는 단 한 그루뿐이다. 옛 스님들 진영 60여 점이 봉안된 특별한 공간인 영각(影閣) 앞에 있다. 일주문 지나 영산전과 극락전, 약사전을 천천히 돌다 보면 자장매가 홀로 서 있다. 2월 10일 찾았을 땐, 성급한 상춘객에게 조금 이르다며 한두 송이만 피웠다. 2월 말이나 3월 초면 그 자태와 진한 향기를 만날 수 있겠다.
4대 매화와 호남오매湖南五梅
우리나라에는 4대 매화가 있다. 단 4그루뿐인 천연기념물 매화로 강릉 오죽헌 율곡매(제484호), 구례 화엄사 백매(제485호), 장성 백양사 고불매(제486호), 순천 선암사 선암매(제488호)를 말한다. 안타깝게도 율곡매는 90% 이상 고사한 상태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해제 예고가 됐다. 올해 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천연기념물 율곡매’는 볼 수 없다. 국내 4대 매화 중 으뜸은 고불매다. 천연기념물 중 유일하게 홍매다. 선암매와 함께 호남오매(湖南五梅)이기도 하다. 축령산 편백림, 장성호 수변길, 남창계곡과 함께 ‘장성4경’으로도 꼽힌다. 고불매는 백양사 스님들이 심고 가꾼 홍매다. 철종 14년(1863) 백양사가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함께 옮겨 심은 매화 가운데 350년 넘게 살아남은 나무가 고불매다. 1947년 만암 스님이 고불총림을 개창하면서 고불매라는 이름이 생겼다. 고불매는 대웅전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우화루 옆에 있다. ‘꽃이 비처럼 내린다’라는 우화루 옆에 있으니 더 운치 있다. 3월 말이면 가지마다 유난히 많이 붙어 탐스러운 담홍빛 홍매의 깊은 향기가 비처럼 도량을 장엄한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순천 선암사는 오래된 전각들과 고즈넉한 풍경 그리고 다양한 꽃들로 유명하다. 3월 중순부터 핀 청매가 지면 4월엔 홍매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진달래, 개나리가 도량을 감싸고 나면 철쭉, 영산홍이 핀다. 이곳에 선암매가 있다. 선암사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 돌담길에 20여 그루 매화나무에서 백매와 홍매가 꽃을 피운다.
나이도 적지 않다. 35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켰다. 백미는 원통전 뒤에 천연기념물 백매다. 콕 짚어 말하자면 ‘찐 선암매’다. 선암사에 백매도 홍매도 있는데 고불매만 유일하게 홍매라는 의문을 해소한다. 선암매는 고려 때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바로 옆 와룡송과 함께 600년 전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순천까지 가서 선암매만 보고 발길을 돌리면, 봄은 아직이다. 선암사에서 멀지 않은 금둔사와 송광사에도 특별한 매화가 봄을 전한다. 금둔사 홍매, 납월매와 송광매다. 선암사 칠전선원 지허 스님이 낙안고읍 홍매 씨앗을 얻어 가꿨는데, 그때 얻은 홍매가 금둔사 납월매가 됐다고 한다. 지허 스님이 수계하듯 준 이름이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음력 12월 8일을 기려 한 해 마지막 달을 납월이라 불렀는데, 이때 피어서 이름이 납월매다. 2021년엔 크리스마스 무렵 꽃을 피워 말 그대로 설중매가 됐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포함해 국사(國師, 임금의 사표가 되는 고승에게 내리는 최고 법계) 16명을 배출한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매화도 빼놓을 수 없다. 송광매라 불리는 이 매화는 백매다. 천왕문에 들어서 종고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대웅보전 왼쪽에 고고하게 서 있다. 땅에서 다섯 줄기로 갈라져 뻗어 올랐다. 들매화 계통의 백매로, 수령은 200년 정도로 추정한단다. 3월 중순부터 순천을 찾는다면, 납월매와 선암매 그리고 송광매까지 한 번에 마음에 담을 수 있겠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서 피는 화엄사 흑매는 호남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매화다. 화엄사 흑매는 고불매, 선암매, 광주 전남대 대명매, 담양 지실마을 계당매와 함께 호남오매다. 천연기념물이자 국내 4대 매화는 구층암 인근에 있는 들매화다.
화엄사 흑매는 조선 숙종 때 각황전 중건을 기념하고자 계파 스님이 심었다고 전한다. 그 빛깔이 여느 홍매보다 짙다. 꽃이 검붉어서 흑매라 불리지만, 실은 홍매다. 각황전 역사와 함께 흘러온 흑매는 화엄사의 상징이자 봄의 전령으로 널리 알려져, 지리산국립공원의 자랑이기도 하다. 들매화는 화엄사 구층암에서 약 50m쯤 떨어진 해장죽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야 있다. 수령이 450년을 넘긴 천연기념물이자 지리산 대표 야생매화로 백매다. 작년부터 화엄사는 3월 중순 ‘홍매화·들매화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열고 있다. 휴대폰 하나 들고 봄을 담으러 가도 좋겠다.
‘귀로 향을 듣는 꽃’
매화는 눈보라 속에도 강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운다. 인내, 고결한 마음, 기품, 품격, 미덕, 고결, 결백이 꽃말이다. 그래서일까. 선지(禪旨)가 깃든 생명체로 여기는 사찰 매화는 노스님들이 손수 보살폈다고 한다.
매화는 ‘귀로 향을 듣는 꽃’으로도 불린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마음이 고요해야 진정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동안거 결제를 해제하거나 봄과 매화 키워드에 자주 등장하는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 스님의 말씀을 곱씹어볼 만하다.
“한번 뼛속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不是一番寒徹骨),
어찌 매화 향기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爭得梅花撲鼻香).”
조선 중기의 문장가 신흠(申欽, 1566~1628)은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라고 했다. 맞다. 천년고찰 역사와 같이 흘러온 매화가 부처님 도량을 지켜온 이들의 정신을 가리킨다. 그들이 지켜온 부처님 가르침은 신흠의 시처럼 일생을 추워도 향을 팔지 않고, 천 번 넘게 이지러져도 바탕은 변하지 않고,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유네스코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진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나저나 매화가 봄을 부른다. 매화와 만남도 계절도 봄이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