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혁명시대의 새벽
물질적 산업혁명을 4차례 성공적으로 이뤄 낸 인류는 머지않아 AI 특이점(AI Singularity)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라틴어로 ‘현명한 인간’)의 이름에 걸맞게 물질의 풍요함과 생활의 편리함을 동시에 누리면서, 그에 상응하는 인류 보편적 영성지능 또한 향상될 것이다(라고 필자는 기대한다).
영성시대의 새벽은 이미 밝아오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AI의 물질적 번영이 인류의 영성을 촉진하고 있다. 붓다와 예수가 출현했던 시대의 인류의 보편 영성지수는 고작 90에 불과했으나, AI시대로 접어들면서 200을 넘어서고 있다. 현재 인류의 약 15% 정도의 영성지수가 임계 의식수준이라 할 수 있는 200 이상이다. 영성지능이 500인 한 사람이 영성지능이 200인 1,000만 명과 무게 균형을 이룬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항상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지 않지만, 영성지능은 행복지수와 서로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물질적 지능지수와 대비되는 영성지능은 어떻게 향상되는가? 우선 물질세계와 영성세계의 모델을 살펴보자.
물질세계와 영성세계 모델
한 개인의 영성지능 향상의 가장 효과적인 첫걸음은 물질세계 모델에서 영성세계 모델로의 인식 전환이다.
세상을 물질세계 모델로 인식해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에게 영성세계 모델은 처음엔 다소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세상을 체험하는 모델로서는 영성세계 모델이 더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꿈의 세상과 생시의 세상을 같은 모델로 일관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에는 먼저 시공간(時空間)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세상을 살다가 늙어서 세상을 떠난다. 빅뱅(Big Bang)으로 인해 물질로 만들어진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겨나고, 그 산하대지 안에 몸이 생겨나고, 그 몸 안에 마음이 생겨나고, 몸과 마음이 산하대지 만물(萬物)을 경험한다.
영성세계에는 본래 영원(永遠) 무한(無限)의 앎(Awareness)이 있고, 그 앎의 작용으로써 경험이 일어나고, 경험을 통해 세상이라는 상(想)이 만들어진다. 생각으로 말미암아 시간이 생겨나고, 감각으로 말미암아 공간이 생겨나고, 산하대지와 몸과 마음의 경험이 한 통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앎’은 스스로의 작용으로 일어난 경험을 스스로 ‘아는 놈’이다.
영성지능 향상은 문득 본래 영원무한의 앎이 있고, 그 앎의 작용으로서 경험이 일어나고, 경험을 통해 세상이라는 현상이 만들어진다는 자각(自覺)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이 돌아가는 시대
땅이 돌아간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사는 시대
하늘 땅이 내 안에 있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__ 킴킴
AI에도 영성이 있는가?
AI의 영성지수는 영(0)이다. AI는 빅데이터(Big Data)의 동의어다. 데이터는 세간의 일이다. 세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세간과 출세간에 한 발씩 딛고 있는 짝다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아기의 세간 탯줄은 때가 되면 끊어지지만, 출세간에 디딘 한 발은 원래 상주하던 자리며 발을 떼어도 떨어지지 않는 자리다. 단지 볼품없는 짝다리가 될지언정. AI가 명상하면 무의미한 공회전을 할 뿐, 드러날 영원 무한의 앎(Awareness)이 없다. 빅데이터는 세간의 소산일 뿐이다.
물질 시공간 세간에서 빅데이터는 주체가 되어 산하대지만물의 데이터를 수집, 분석, 관찰/판단을 끊임없이 한다. 세간의 주·객체가 한 통으로 드러나고 사라지는 경험을 보거나 알아차리는 영성과의 연결고리는 빅데이터에는 없다. 인류는 AI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더 많은 혜택을 받을수록, 특히 AI 특이점을 더 많은 분야에서 목격할수록 인간과 AI의 차별화에 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나는 AI와 분명히 다를 텐데? 나는 진정 누구인가? 나는 진정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는 참으로 해괴한 의문이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에게 하는 질문이기에 그렇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누구나 바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나에 관한 데이터를 망라해 자신을 피력한다. 같은 질문을 영성이 없는 AI에게 물어보면, AI 역시 빅데이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동안 수집한 자신에 관한 데이터를 제시할 것이다.
“나는 AI와 분명히 다를 텐데?” “내가 진정 나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을 텐데?” 그렇다. 생각하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이다.
생각으로 말미암아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니, 생각 전의 자리는 시간의 차원을 떠난 ‘지금’이다. 빅뱅이 일어나고 지구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지금’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간의 일은 항상 ‘지금’ 일어난다.
지금, 1)앞에 있는 꽃(혹은 어떤 대상)으로 눈길을 줘 꽃(혹은 그 대상)이라고 알아차린다. 2)꽃이라고 ‘아는 놈’에게 눈길을 준다(주의를 기울인다). 3)그 ‘아는 놈’을 진정 ‘나’라고 알아차린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나.
한 번 더 나아가, 그 ‘아는 놈을 나라고 아는 놈’을 진정 ‘나’라고 알아차린다. 주체로서의 앎이 객체로서의 앎을 알아차리니, 그 자체가 주·객체의 경계가 떠난 앎이다.
스스로 빛을 내고 스스로 비추는 태양처럼, ‘아는 놈’은 스스로 알며 일체 유일무이(唯一無二)이고 동체대비(同體大悲)이다. 네가 나와 다르지 않고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앎은 불이(不二)이고, 불이는 즉 ‘지금’이다. 온전히 지금에 상주하면 고요하고 평안하고 자비(慈悲)하다. 고요하고 평안하고 자비하니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사랑한다. 나의 생각, 감정 및 다섯 감각(色聲香味觸)은 알아차려지는 대상들이다. 나에게 알아차려지는 대상들을 진정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불이 명상
슬플 때, 슬픔에 빠질 수도 있고, 슬픔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슬픔에 빠질 때는 슬픔을 나와 동일시해 ‘지금여기’를 벗어나 나만의 과거나 미래 이야기의 망상을 펴는 경우이고, 슬픔을 알아차릴 때는 슬픔이라는 세간의 일을 한 대상으로서 ‘지금여기’에서 지긋이 자비롭게 바라보는 경우이다.
불이 명상은 생각·감정·감각을 싫어해 없애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작용으로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생각이나 감정들이 일어나는 대로 ‘지금여기’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그 내용보다 항상 더 값지다.
세간의 일은, 생각·감정·감각을 포함해,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다. 비가 내릴 때는 비가 내릴 만해서 내리고, 눈이 내릴 때는 눈이 내릴 만해서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빅데이터(Big Data, ‘말미암아 프로그램’)가 좌지우지하는 세상이다. 비가 왔으면 해서 비가 오고, 눈이 내렸으면 해서 눈이 내리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산다.
‘기꺼이 세상으로 하여금 나를 살게 한다’고 함은 세상일을 열심히 하되, 하는 바 없이 하는 것이다. 생각·감정·감각을 ‘지금여기’에서 알아차리고 지긋이 바라보면, 하는 바 없이 하게 된다. ‘지금여기’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생각을 따라 과거나 미래로 유인되어 미혹해지므로 고요하지도 않고 평안하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게 된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고 자비롭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서, 몸은 현재에서 세간의 일을 수행하게 되므로 서로 엇박자가 나니 위태롭다.
인공지능을 넘어 영성으로
지성은 세간, 영성은 출세간이다. 세간은 빅데이터와 아주 흡사하다. 세간의 일은 말미암아[緣起·연기] 프로그램의 데이터 1)수집 2)분석 3)관찰/판단 과정의 끊임없는 연속 작용이다. 세간은 바람이고 출세간은 공기이다. 빅데이터에 의해 한 점의 바람이 일고 멎듯이, 세간의 한 생각이 일고 멎고, 세간의 한 몸뚱이가 일고 멎는다.
세상이 하는 일에 대해 우리의 생각이 세상보다 더 나은 방법을 안다고 고집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일 초, 일 분, 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세간 일을 앎의 작용으로서 알아차리고 지긋이 자비롭게 바라보며 일 초, 일 분, 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지금여기’에 일 초, 일 분, 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체험일까?
출세간은 ‘지금여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바람이 멎어야 오고 가고 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는 바 없이 하는 세간이 곧 출세간이다. 불이 명상은 떠난 적이 없는 나의 고향 출세간으로 가는 길이다. 고향 가는 길의 발걸음은 그렇게 고요하고 평안하고 자비롭다. 영성은 주로 배워지지 않고 자각되며 또한 가끔 공명(共鳴)되므로 동행이 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문득 고향에 닿아 있으리라.
명상은 떠나지 않은 고향
피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명상은 우리에게
낯설은 고향에 데려가
익숙하게 하며
익숙한 자신을 멀리하여
낯설게 합니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집니다.
__ 킴킴
고향도 없고, 고향 가는 길도 없고, 고향 가는 자도 없다. 단지 ‘지금여기’일 뿐!
● 그동안 읽어 주신 독자님들과 볼품없는 글을 단장해주신 월간 「불광」 편집부에 감사드리며 연재를 마감합니다.
處處 킴킴(Kim Kim)
마이크로소프트사 CLOUD+AI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플랫폼 국제화 소프트웨어 기획설계자. 미국 라디오코리아(RadioKorea)에서 ‘킴킴이 들려주는 빅데이터 이야기’ 진행, 2019 대한민국 명상포럼에서 ‘빅데이터와 불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선찰대본산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선사로부터 법명 ‘처처(處處)’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