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어서 맛있는 밥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밥은 한국인에게 ‘소울푸드’다. 하지만 늘 밥상머리에 오르는 당연한 존재여서일까. 밥을 매일 먹으면서도 정작 밥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쌀은 어떤 품종인지, 어떤 방법으로 지었는지, 밥맛은 어떤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반찬과 함께 곁들이는 음식 정도로 여기며 습관처럼 밥을 먹는다. 이러나저러나 먹는 밥, 아무래도 좋은 밥이다. 한식당이나 백반집에서 식사할 때도 밥맛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메인으로 나오는 반찬이나 찌개가 맛있으면 밥맛이 조금 떨어져도 불평하지 않는다.
지미무미(至味無味). 청대(清代) 차(茶) 명인이 서호용정차(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녹차)를 찬미하며 한 말로, “맛이 없으나 그 맛이 일품”이라는 뜻이다. 밥은 ‘맛이 없어서 맛있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특별한 맛을 내지는 않지만 바로 그 심심한 맛 때문에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 갓 지은 밥은 구수한 풍미와 은은한 단맛, 차진 식감을 내며 ‘최고의 맛은 아무 맛 없는 맛’이라는 말을 더욱 실감케 한다. 식당에서 파는 천 원짜리 공깃밥 맛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갓 지은 밥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리 대량으로 쪄서 온장고에 저장한 밥은 시간이 지나고 수분이 증발하면서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밥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밥맛을 온전히 느껴봐야 한다. 먹다 남은 찬밥이나 즉석밥으로 시작해도 좋다. 반찬 없이 밥에만 온전히 집중해서 먹다 보면 그간 모르고 지나쳤던 밥맛이 느껴지고 각 밥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밥맛에 관심이 생기면 직접 밥 짓기도 시도해보자. 냄비로든 압력밥솥으로든 전기밥솥으로든 직접 밥을 지어 먹음으로써 갓 지은 밥의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천덕꾸러기 취급 억울한 쌀밥 예찬
쌀밥은 그 자체로 맛이 훌륭해서 여러 반찬이 필요 없다. 갓 지은 쌀밥에 김치만 올려 먹어도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다. 쌀밥은 다른 반찬들과 궁합도 좋다. 마치 색을 입히는 대로 왜곡 없이 담아내는 흰 도화지처럼, 반찬 본연의 맛을 완벽하게 살린다. 그런 쌀밥이 당뇨와 비만의 주범으로 꼽히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혈당을 빨리 올린다는 이유다. 반면 잡곡은 쌀밥과 정반대 이유로 ‘좋은 음식’ 대접을 받는 분위기다. 하지만 좋은 음식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내 몸의 부족함을 채우는 음식을 좋은 음식이라고 한다면, 누가 어떤 방법으로 먹느냐에 쌀밥이 좋은 음식이 될 수도, 잡곡이 나쁜 음식이 될 수도 있다.
잡곡은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다소 분별없이 소비되고 있다. 하지만 잡곡도 철에 따라 각자의 체질에 따라 가려 먹는 지혜가 필요하다. 당뇨나 혈관 청소에 좋다고 알려진 보리도 사시사철 먹을 필요는 없다. 당뇨 환자에게 보리는 1년 내내 보약이지만, 건강한 사람에게 보리는 여름이 제철인 음식 중 하나다. 블랙 푸드 대표주자인 서리태 역시 겨울에 먹기는 좋지만, 여름에는 몸을 무겁게 만드는 성질이 있어 자제하는 편이 좋다. 쌀밥은 정제 탄수화물이란 이유로 저평가되고 소비량도 줄고 있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다양한 반찬과 함께 섭취하거나 먹는 양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걱정 없이 즐길 수 있다.
연근밥 만들기? 9할이 ‘밥 짓기’!
이번에 소개할 연근밥의 주인공은 단연 쌀밥이다. 주연만큼 빛나는 조연은? ‘진흙 속 보물’로 불리는 연근이다. 연근은 비타민 C가 풍부해서 피로 회복에 좋고, 진정 작용을 해서 사람의 심신을 안정시킨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감기에 걸리기 쉬운 이맘때에 안성맞춤인 제철 식재료다.
쌀과 연근, 식초, 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준비한다. 연근은 될 수 있으면 가늘고 긴 숫연근보다 짧고 통통한 암연근을 구매한다. 암연근이 숫연근보다 맛있다. 연근 외에 다른 재료를 추가하고 싶다면 연근과 궁합이 좋은 우엉이나 제철을 맞은 당근, 밤을 추천한다.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추가해 연근우엉밥, 연근당근밥, 연근밤밥 등으로 무궁무진하게 변주할 수 있다.
연근밥 만들기는 밥 짓는 공력이 9할 이상이다. 냄비로 짓는 냄비밥은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으로 짓는 밥보다 맛있지만, 냄비 바닥에 밥이 눌어붙기 쉬워 만들기는 다소 까다롭다. 성공 여부는 물과 불 조절에 달려 있다. 먼저 쌀을 씻고 밥물을 잡아 냄비에 안친다. 쌀 씻는 방법은 쌀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도정한 지 오래되지 않은 햅쌀은 오래 씻을 필요 없지만, 묵은쌀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대여섯 번 씻어줘야 묵은내를 뺄 수 있다. 밥물은 압력밥솥에 지을 때보다 조금 더 많이 잡아야 한다. 쌀 1/2컵 기준으로 밥물은 1컵에서 1 1/2컵 정도가 적당하다. 연근은 껍질을 벗기고 숟가락으로 퍼먹기 좋을 만큼 잘게 썰어 쌀 위에 올린다. 연근 특유의 비린내를 잡기 위해 식초와 간장도 조금 첨가한다. 이제 대망의 밥 짓기다. 먼저 센 불로 8~10분간 끓인 후 약불로 3~5분 정도 뜸들인다. 시간은 불 세기나 물과 재료 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밥을 여러 번 짓다 보면 물양, 불 세기, 조리 시간에 대한 감이 잡힐 것이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같은 비율로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밥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중간중간 밥을 저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완성된 연근밥은 그대로 먹어도 되고 미리 만들어둔 양념장을 넣고 비벼 먹어도 된다. 양념장 없이 먹으면 쌀밥 본연의 구수한 향과 달곰한 맛, 연근의 아삭아삭한 식감을 좀 더 즐길 수 있다.
재료 쌀 1/2컵, 물 1컵, 중간크기 연근 1/3개, 식초 1/2작은술, 간장 1/2 작은술
양념 간장 1큰술, 참기름 1큰술, 깨소금 1큰술
1. 쌀을 씻은 후 밥물을 잡아 냄비에 안친다.
2. 잘게 썬 연근을 쌀 위에 올리고 식초, 간장을 넣어 밥을 짓는다.
3. 양념 재료를 모두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4. 밥과 양념을 함께 낸다.
사진. 유동영
법송 스님
대전 영선사 주지. 세계 3대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런던캠퍼스 정규 교육과정 최초로 사찰음식 강의를 진행했다. 저서로 『바다를 담은 밥상』(2021, 도서출판 자자), 『법송 스님의 자연을 담은 밥상』(2015, 서울문화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