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조정권 ‘같이 살고 싶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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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조정권 ‘같이 살고 싶은 길’
  • 동명 스님
  • 승인 2021.11.1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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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누구나 인생길이 있다. 사진은 주왕산국립공원 탐방로의 가을 모습.
누구나 인생길이 있다. 사진은 주왕산국립공원 탐방로의 가을 모습.

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 본 외길
땅에 흘러 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늘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 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조정권 시집, ‘떠도는 몸들’, 창비 2005)

가야산 해인사 소리길, 땅에 흘러 다니는 단풍잎들.
가야산 해인사 소리길, 땅에 흘러 다니는 단풍잎들.
북한산 중흥사.
북한산 중흥사.

[감상]
정말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또는 꼭 기억하고 싶은, 또는 자주 가보고 싶은 길이 있지요. 시인은 이 시에서 그 길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①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은 길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단풍이)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빛 지워지는(혹은 지워버리는) 길”
바로 이 모습을 빗속에서 우리는 정말 앓음다이 봤습니다.

② 늘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은 길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 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만 사람들에게 보이는 길이랍니다. 이 길이 곧 ①번의 그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①번은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은 길이고 ②번의 길은 늘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은 길로 구분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③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
“흰 눈이 내리면 마을도 길도 나무도 언 강도 낙엽 쌓인 숲도 지우는데
구형 승용차 비큇자국과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
그 길은 시인도 지우지 못한 길이랍니다. 왠지 ①, ②, ③이 같은 길일 듯싶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마음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길, 너무 아까워서 더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 길이 있을 성도 싶습니다.

저도 인생의 길 몇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 세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① 북한산 중성문 오르기 10여m 전쯤에서 산영루까지
제 눈에 익숙한 나무들 또는 익숙했던 나무들이 있던 길입니다. 두 그루의 귀룽나무가 누워서 저를 반겼던 곳입니다. 그 귀룽나무 두 그루는 어느 날 큰비에 쓸려가서 뿌리만 죽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중성문을 지나 노적교 바로 앞에는 줄기의 끝에서 뿌리까지 난 상처로 줄기에 물길처럼 길이 나 있는 나무가 있고, 진국교에는 아름드리 귀룽나무, 다리 너머에는 불두화가 아슴아슴합니다. 더 올라가면 북한산에서 단풍과 설경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나옵니다.

② 곡성에서 구례로 가는 17번 국도
찻길(사람길)과 기찻길과 강물의 길이 세 박자로 나란히 흘러가는 곳입니다.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강물 따라 바다까지 갈 것 같은 느낌이지요. 눈감으면 가끔 아련하게 떠오르는 길입니다.

③ 의상봉에서 문수봉까지 이어지는 능선길
세 번째 길은 선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외에도 아름다웠던 길이 참으로 많았으니까요. 의상봉길은 제법 험준한 능선길입니다.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야 하는 곳도 있고, 한쪽은 절벽이요 한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인 곳도 있습니다. 줄곧 북한산의 세 봉우리, 백운대와 인수봉과 만경대 그리고 볼 때마다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노적봉, 노적봉이 만들어낸 천혜의 절터 중흥사를 바라보면서 걷는 이 길은, 마치 천상으로 가는 길인 듯 아름답습니다.

인생길을 적어 보았습니다. 이 세 길보다 객관적으로 보면 더 아름다운 길도 많습니다. 그냥 마음속에서 먼저 떠오르는 세 길을 적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길을 떠올려보면서, 하루하루가 넉넉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우시길….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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