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정세훈 ‘단풍 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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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정세훈 ‘단풍 들 때’
  • 동명 스님
  • 승인 2021.11.0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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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무주 적상산에 물든 단풍.
무주 적상산에 물든 단풍.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즐거운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
단풍 들 때 동맥 끊듯 끊어지거라
행여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이었든
혹여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이든
차마 하지 못하고, 못 할 사랑
엉겁결에 저질러놓고
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 행복 단풍 들 때
가을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
천상의 고통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지상의 고통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그리하여 머지않아 발가벗겨질 온 천지가
울긋불긋 울긋불긋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단풍 들 때 마른 지상에 물 번지듯 지워지거라

(정세훈 시집 ‘동면’, 도서출반b 2021)

무주 적상산 안국사에 물든 단풍.
무주 적상산 안국사에 물든 단풍.

[감상]
단풍은 거의 모든 시인들이 시로써 형상화한 시의 단골 소재입니다. 김영랑 시인은 “오매 단풍 들것네”(‘오매 단풍 들것네’)라며 감탄했고, 도종환 시인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단풍 드는 날’)이라고 노래했고, 나태주 시인은 “숲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가는 목숨들이/밝혀놓는 등불”(‘단풍’)이라고 노래했으며, 저도 단풍을 보며 “이 마음 焚身[분신]할 수 있을까요 죽으면 나도 당신처럼”(졸시, ‘죽으면 나도 단풍처럼-발자국 6’)이라고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정세훈 시인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정세훈 시인도 푸르렀던 나뭇잎이 생애를 마치면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세상에 봉사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하듯이 그렇게 생을 마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이 시에서 ‘나의 생’은 곧 단풍의 생이며, 단풍의 생은 내 생애의 은유입니다. 시인은 나의 생이 즐겁다면, 그것은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의 결과이고,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의 예고라고 봅니다. 만약 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러기에 그 행복에 미련 갖지 말고, 그 행복 단풍 들 때 과감히 “가을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라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단풍의 즐거움은 곧 이번 생에 쌓은 ‘업(業)’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보기에 단풍은, 단풍의 생은 “천상의 고통이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며, “지상의 고통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나무가 아무리 열심히 단풍 빛깔로 채색해도 결국엔 발가벗겨지듯이, 우리의 생애도 그렇게 알몸이 되어 다음 생애의 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의 생이여 아름다운가?”
스스로 대답합니다.
“예, 아름답습니다. 마치 단풍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단풍이 지상에 물 번지듯 물들었던 것처럼, 그 빛깔이 또 물 번지듯 지워졌던 것처럼, 그렇게 지워지거라!”

‘지우거라’가 아님에 주의해야 합니다. 저절로 지워지는 것이지, 스스로 지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워지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인의 ‘바람’이 들어 있는 말로, ‘지워지기를…’과 같은 말입니다. 2행의 ‘끊어지거라’도 ‘끊어지기를’, 8행의 ‘잘라지거라’도 ‘잘라지기를’과 같이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생이여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단풍 들 때 마른 지상에 물 번지듯 지워지기를”

올가을엔 단풍을 보며, 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시를 느껴보겠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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