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 인도서 백제에 율 전한 구법승, 겸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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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 인도서 백제에 율 전한 구법승, 겸익
  • 심경순
  • 승인 2021.06.2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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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드높고 은미한 이름 백제 불교 | 율장 찾아 파도를 건너다
인도에서 법을 구한 겸익 스님은 나란타사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청된다. 나란타사는 인도를 넘어 세계 최대 규모와 수준을 자랑하는 사찰이자 교육기관(나란다대학)이었다. 

목숨 걸고 인도서 법을 구하다

4세기경 우리나라에 수용된 불교는 곧 국교로 자리 잡았고, 삼국은 자국의 불교문화를 발전시키고자 많은 스님을 해외로 보내 선진적인 불교 문물을 들여왔다. 당시 불교의 선진 지역인 인도와 중국에서 활동한 스님들을 구법승(求法僧)이라고 한다. 백제는 6세기 무렵부터 자국의 스님들을 파견했고, 기록상 삼국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구법 활동을 떠난 스님은 고구려의 승랑이다. 승랑은 476년 중국으로 건너가 양 무제에게 발탁되어 당시 고승들에게 삼론학을 가르쳤고, 중국에서 활동하다 입적했다.

삼국은 중국뿐만 아니라 불교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인도에도 많은 스님을 파견했는데, 인도에서 구법 활동을 한 스님들을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의 혜초도 입축구법승이다. 국내외 기록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입축구법승은 14명이고, 그중 신라 출신이 12명이다. 입축구법승 대부분은 7, 8세기에 인도로 법을 구하러 떠났다. 당시 목숨을 걸고 인도로 떠났던 구법승들은 험난한 여정과 현지의 선진적인 불교를 향한 열의로 자의든 타의든 귀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언급한 인도로 간 14명의 스님 중 무사히 국내로 귀국한 인물은 3명에 불과했다. 

이는 곧 인도 현지에서 구법 활동을 하는 게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구법 활동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 구법 초창기인 6세기 초 삼국 스님 중 인도에 가서 법을 구하고, 본국으로 귀국한 인물이 백제 입축구법승 겸익이다. 기록에 따르면 겸익은 율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바다를 건너 인도로 떠났다. 중인도에 도착한 이후에는 이 지역의 상가나대율사라는 곳에 머물면서 수년간 인도의 말과 글을 익히고, 계율을 연구했으며, 더불어 계체를 닦으며 수행을 계속했다. 

이후 인도에서 율을 구하고자 한 구법 목적을 달성한 겸익은 526년(성왕 4) 계율에 관한 가르침을 기록한 율장과 그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 논장을 가지고 인도 스님 배달다삼장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겸익은 성왕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흥륜사에 주석하면서 국내 고승들과 함께 역경 사업을 진행했으며, 귀국 시 가지고 온 범본 율서들을 72권으로 번역했고, 성왕은 이 책의 서문을 짓고 태요전에 보관했다. 

위와 같은 겸익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1918년 이능화가 저술한 『조선불교통사』의 「미륵불광사사적」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이후 1920년대 들어서 『저역총보』(금명보정, 1920)와 『부여지』(1929, 부여군청)의 「대조사미륵실기」에도 겸익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저술 이외에도 무능거사라는 필명으로 잡지 「불교」 7호(1925)에 겸익에 관한 글을 게재했고, 31호(1927)에서도 겸익의 구법 활동을 언급했다.

“「미륵불광사사적」에 이르기를, 백제 성왕 4년 병오년 사문 겸익은 계율을 구하기로 맹세하고 바다를 건너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에 이르렀고, 범문을 배운지 5년 만에 천축(인도)의 말에 환히 통하였으며, 율부를 깊이 전공하여 계의 본체를 장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도 승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본 아비담장과 5부 율문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__   『조선불교통사』 상편 불화시처1 「미륵불광사사적」 

사실 겸익에 관한 내용을 담은 문헌이 근대에 들어서야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겸익의 인도 구법 활동 또한 믿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조선불교통사』의 발문을 쓴 장지연은 저자인 이능화가 ‘유자(儒者)이면서도 불교를 좋아하고, 내전과 외전에 모두 박식’하다고 평가했고, 저자인 이능화는 오랜 기간 방대한 자료 수집과 고증에 공을 들여 이 책을 발간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부여지』에 실려 있는 「대조사미륵실기」는 「미륵불광사사적」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와 함께 겸익이 역경 사업 이후 관음의 현신을 만나 대조사를 창건, 율장을 안치하고 미륵을 조성했다는 그의 귀국 후 행적도 서술하고 있다. 

겸익 스님은 나란타사에서 10여년 동안 공부하고 526년 범본 율서를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왜 하필 중국 아닌 머나먼 인도였을까

겸익은 왜 율을 구하기 위해 중국이 아닌 인도로 구법을 떠났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중국 남조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남조에는 사대광율이 번역됐고, 그중 『십송율』이 유행하고 있었다. 양 무제는 치세 초기부터 승단을 통제하고자 했고, 당시 스님들이 경전을 독송하거나 학습하지 않고,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승단은 문벌 사족 출신의 스님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황권에 맞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으며, 무제의 교단 장악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한편 백제는 남조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백제로 도망쳐 온 고구려의 스님 도림이 내정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수도 한성 함락에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이전하게 됐고, 교단 운영의 재검토 및 스님들의 엄격한 계율 준수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남조 역시 교단 통제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고, 백제는 국내 불교 교단의 재정비를 위해 중국이 아닌 불교의 본류인 인도에서 율을 가져오기로 했다. 이에 겸익은 율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구법 활동을 떠나게 되었다.

「미륵불광사사적」에 따르면 겸익은 인도에서 5년 이상을 머물며 구법 활동을 하였고, 526년 귀국했다. 그렇다면 겸익이 인도로 출발한 것은 무령왕대로 볼 수 있다. 당시 삼국의 스님들이 중국을 오고 갈 때는 사신들의 배를 이용했듯이 겸익도 중국으로 가는 사신선을 이용했다면, 그는 512년(무령왕 12) 백제 사절단의 배를 이용해 중국으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겸익은 중국에서 해로로 중인도에 도착했고, 10여 년을 상가나대율사에 머물면서 인도의 말과 글을 배우고, 계율을 연구하고 수행했다. 상가나대율사라는 사명은 다른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 사찰에 관해 율학 중심 사찰, 대승 사찰 등의 견해가 있지만, 겸익이 이곳에서 인도의 말과 글을 습득하고, 이후 율장 연구, 취경, 계체수행 등 종합적인 구법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상가나대율사는 대승, 또는 소승계 단일 사찰보다는 종합대학의 성격을 지닌 나란타사로 추정된다. 나란타사는 쿠마라굽타 1세(415~454) 때 창건된 사찰로, 7세기 초 현장이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 이곳은 불교의 중심지였다. 정관 연간(627~649) 신라승 아리야발마도 이곳에서 율과 논을 익히고 불경을 옮겨 적었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나란타사에서는 스님의 수가 만 명이 되었고 모두 대승, 소승 등의 책과 함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었다. 매일 100여 곳에서 강좌가 열렸다고 한다. 

현장이 나란타사에 왔을 때 이미 나란타사는 인도를 넘어 세계 최대 규모와 수준을 자랑하는 사찰이자 교육기관(나란다대학)이었다. 이곳에서 겸익은 1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정진했고, 526년 범본 율서들을 가지고 인도의 스님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율서 번역과 역경, 백제계율 확립 

겸익은 귀국 후 흥륜사에서 인도로부터 가지고 온 범본 율서들을 번역했다. 번역한 비담과 신율은 총 72권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논장과 율장으로 추정되며, 특정 논장이나 율장으로 한정하기보다는 다수의 논장과 율장을 모은 것으로 생각된다. 역경 이후 활동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부여지』의 「대조사미륵실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겸익은 흥륜사에서 역경을 마치고 나서 관음보살이 큰 새로 변하여 가림성 앞에 내려앉는 꿈을 꾸었다. 이후 잠에서 깨어난 겸익은 새가 내려와 앉은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관음불을 만났다. 이후 이곳에 절을 조성했고, 대조사라 이름했으며, 율장을 안치하고 불상을 조성했다. 백제는 삼국 최초의 입축구법승이자 역경승이었던 겸익의 입축구법 활동으로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백제계율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교단을 정비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 많은 구법승이 중국과 인도로 떠났지만 여러 이유로 귀국하지 못하고 구법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겸익을 포함하여 문헌에 기록된 백제 구법승들은 모두 예외 없이 백제로 귀국했다. 그 결과 백제 구법승은 고구려, 신라 구법승들보다 국내 불교 발전에 상대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고, 이들의 활약으로 백제 불교는 다양하고 균형 잡힌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 겸익에 의해 확립된 백제계율 불교는 이후 일본으로 파견된 백제 전법승들의 활동을 통해 일본 불교 발전 및 교단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심경순
전북연구원 연구원. 2022년 발간을 목표로 전라도 천년사 편찬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전라북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가 참여한 전라도 천년사 편찬은 전라도의 역사와 문화를 전 33권으로 발간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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