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준초이
백제 미술의 실체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1,000여 년 동안 비장되어 오다가 처음 공개되면서 관련 기록도 함께 알려졌다. 백제에서 건너온 불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의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분명한 기록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당시 역사적 조건이나 조각 양식으로 미루어, 백제에서 만들었거나 그 영향 아래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백제관음의 예술적 평가는 매우 높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안드레 에카르트는 동아시아 불교조각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백제관음을 꼽았다. 일본 고류지(廣隆寺)의 미륵반가사유상과 한국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또한 백제관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작이다. 이 두 불상의 제작국을 신라로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일부 있지만, 당시 백제와 신라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고려한다면 백제가 아니고서는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백제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뛰어난 걸작들을 생산해 낼 수 있었을까?
한국 역사에서 백제는 오랫동안 저평가됐다.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사실들이 철저히 감춰지고 왜곡되었다. 20세기 이후 한국 최대의 발굴이라고 평가받는 무령왕릉 발굴에서 막대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백제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무령왕릉 유물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南朝)의 그것과 같은 성격인데, 상당수 유물이 남조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중국 역사서에도 공주 천도 이후 무령왕 때에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했다.
성왕 때에 백제 역사와 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무령왕릉도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조성했는데, 기존 석실(石室) 무덤과는 완전 다른 벽돌무덤이다. 가장 보수적인 묘제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의 혁신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불교와 유교를 진흥했고, 선진 문화국가를 지향했다. 일본에 많은 문물을 전해주었는데, 특히 성왕이 최초로 전해 준 불교는 일본 고대와 중세 정신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불교학자들은 불교가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불교 발전도상에서 가장 발달한 모습을 일본 중세 불교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하니 그 단초를 열었던 백제 성왕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성왕이 사신을 보내 당시 최고 명필이었던 소자운(蕭子雲)의 글씨를 수만 금을 들여 사 갔다고 했다. 이런 열정과 관심이 백제를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기틀이 됐다. 백제문화는 성왕(聖王, 523~554)이 마련한 기반 위에서 무왕(武王, 600~641)이 그 꽃을 피웠다.
고대 동아시아 속 백제 미술
백제시대에 해당하는 중국 남북조시대는 수백 년간 분열되어 무수한 국가들이 명멸했다. 이 시기는 기존의 질서와 관념이 무너진 대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불교가 들어와 유교, 도교와 더불어 발전해 사상적으로는 풍부해졌다. 문학에서 도연명의 시, 문학 비평에서 유협의 『문심조룡』, 회화 비평에서 사혁의 육품론, 서예에서 왕희지가 출현했다. 산수화가 탄생하고, 실용음악에서 순수음악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중국 문화예술의 근간이 이 시대에 모두 형성되고 이후 전범을 이루었다. 남북조시대는 한위(漢魏)와 수당(隋唐) 가운데에 낀 중간 시대다. 미술사에서의 남북조는 한위 미술과 수당 미술의 전환기로서, 활기 넘친 예술의 시대였다. 기술에서 예술의 시대로 대전환이 남북조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 뒤를 이은 수, 당, 송, 원, 명, 청의 예술이란 남북조 예술을 풀이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백제는 이러한 중국 남북조 문물에 예민한 촉각을 세우고, 실시간으로 수입해서 소화했다. 수나라는 남북조를 통일했으나 짧은 기간 존속했다. 당나라가 들어섰지만, 아직 자기의 고유문화를 형성하지 못했을 때였다. 이때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자기화하고 발전시켜 그 극점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백제금동대향로, 백제문양전, 미륵사석탑 등과 일본에 있는 백제관음과 같은 백제계 유물들이다. 이렇게 백제는 시대를 초월해 동아시아 미술사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루었다. 백제 미술은 동아시아 미술사라는 큰 틀에서 조망하면 그 위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 예술적으로 정교한 향로들이 무수히 제작되었지만, 그 어느 향로도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없었다. 단연 독보적이다. 이 백제금동대향로 한 점으로 백제 미술의 전체적인 수준을 가늠케 한다. 백제문화의 전체적인 수준을 떠나서 백제금동대향로 홀로 탄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백제 미술에 나타난 아름다움과 정신
백제 미술품에는 따뜻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지나치지 않으며 포용적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대외관계를 중시했고 개방적이었다. 나라의 인적 구성도 다양했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는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등이 섞여 있는데, 중국인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개방성과 유연성이 미술 작품에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표현되었다.
온아함은 백제 미술의 특성이다. 와당의 연화문은 넓고 도톰하며, 부드러운 가운데 후덕하고, 넉넉한 가운데 은근한 멋을 풍긴다.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과 포용성있고 풍만한 몸체를 이룬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옥개석은 모서리각이 삭제되고 완만한 비탈의 기울기로 매우 온아한 평탄면을 이루는 가운데, 처마는 수평으로 뻗어 나가다 그 끝나는 곳에 근소한 반전을 통해 근골의 굳셈을 표현했다. 부드러움과 장중함이 혼합되어 안으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매우 온아하게 드러난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후덕함과 미소, 넉넉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함이 넘쳐흐른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용과 봉황의 힘과 기백이 전체적인 긴장을 조성하는 가운데, 조형적 선의 운율이 주는 유려함이 조화를 이루면서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백제 미술에는 불교에서 비롯된 미적 특성이 주류를 이룬다. 불교가 표방하는 초월적 신성(神聖)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절대적인 존재로서 숭고함을 지닌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다. 거기에는 사유의 정밀(靜謐)한 순간적 표현이 있다. 또 은미하고 신비한 미소가 결합하면서 인간 정신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숭고함의 경지를 연출한 것이다. 거기에는 극도의 세련된 인체 표현과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한 것이기에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 반가사유상에는 숭고함 외에 또 다른 면모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입가에 머금은 불가사의한 미소 때문이다. 이 자비심의 미소는 인간적 따뜻함과 온아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반가사유상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초월적 존재이면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친근한 인간적 존재로서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숭고함과 우아함이 서로 만나 접점을 이룬다. ‘백제의 미소를 띤 불상은 비종교적인 종교 조각이라고 할 만큼 인간적’이라고 평가한 고고미술학계의 원로 김원룡의 지적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백제 미술과 법화신앙
때론 역사적 사실보다 신화와 전설이 더 많은 역사적 진실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고대인의 심성과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장인을 불러 황룡사 9층탑을 건설했다는 이야기다. 이때 백제는 이미 목탑을 넘어 석탑의 시대였다. 미륵사에 30m가 넘는 2기의 석탑과 그 중앙에 더 높은 목탑을 세웠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석탑은커녕 목탑을 세울 기술조차 없었다. 두 나라의 기술과 문화의 격차를 보여주는 전설이다.
백제 후기 문화를 집약시킨 미륵사 설화 속에는 백제인의 심성과 정신 그리고 사상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다. 우선 석탑 속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선화공주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미륵사의 주불(主佛)은 법화신앙에서 주불로 삼는 석가모니불이라는 사실이다. 서동설화에서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에서 솟아올랐다는 설정은 『법화경』의 전형적인 이야기 방식이다. 서동설화는 미천한 과부의 아들 서동이 절세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라 미륵사를 창건하는 성공 드라마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신비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천한 서동이 왕위에 오른다는 설정은 악인과 여성까지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법화경』의 핵심 정신을 이야기로 풀이한 것이다.
대승불교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법화경』의 핵심은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승묘법(一乘妙法)의 추구였다. 그 일승묘법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이런 신앙이 백제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법화경』은 특별한 교리나 사상을 주창하기보다는 신앙을 특별히 강조한다. 따라서 백제 불교는 개인의 이지적인 역량이나 고도의 철학적인 교리를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송(讀誦)이나 조탑공덕(造塔功德)에 의한 구원을 희구하는 지극히 타력적인 신앙이었다. 그러한 간절한 신앙심이 백제 미술에 담겨 오늘날까지 찬란한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법화경』의 골수이자 혼이라 할 수 있는 「여래수량품」 ‘자아게’의 석가모니불 설법 속에 그런 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중생들은 나의 멸도(滅度)를 보고 널리 사리를 공양하여 모두 연모의 정을 품어 그리운 마음을 다시 낼 것이다. 중생들이 모두 믿고 그 뜻이 부드러우며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심으로 부처 뵙기를 원하면, 그때 나는 중승(衆僧)과 함께 영취산(靈鷲山)에 나오리라.”
이내옥
미술사학자. 진주·청주·부여·대구·춘천 국립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 및 아시아부장 등 34년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아시아파운데이션 아시아미술 펠로십을 수상했다. 저서로 『문화재 다루기』, 『백제미의 발견』, 『안목의 성장』 등이 있고, 주요 기획서로 『사찰꽃살문』(한국의 아름다운 책 100), 『백제』(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그래픽 대상), 『부처님의 손』(서울인쇄문화대상 수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