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열두 번 참회해도 부족하고 백 번을 새롭게 다짐해도 오히려 모자란다. 수좌의 마음속에 안이함이 자리해서는 안 된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는 자긍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수좌의 가슴은 천 개의 칼이요, 만 장의 얼음이어야 한다.
_ 「천 개의 칼, 만 장의 얼음(2000. 7. 2.)」(『수좌 적명』 127쪽)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님’의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명예나 부 같은 세간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아닌, 특별한 무언가를 구하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 그리고 이를 위해서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쉬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한편으로, 우리나라 불교계에 큰스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높아진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적명 스님도 그런 큰스님 가운데 한 분이었습니다. 출가 후 60여 년간 적명 스님은 어떤 자리와 권위도 바라지 않고, 오직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에만 몰두한 분이었습니다. 봉암사에서 선방의 최고 어른인 ‘조실’로 추대되었지만 자신은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하시며 거절하신 일은 이미 유명합니다.
언론 인터뷰를 수락한 일도 거의 없고, 일반 대중을 향한 법석에도 잘 앉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쓰지도 않으셨지요. 하지만 수행과 공부에는 온 마음을 기울이셨습니다. 세계적인 명상 지도자로 유명한 아잔브람 스님이 201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적명 스님을 만나 대담한 후 인품과 수행력에 감복하여 남방불교의 스님으로서는 드물게 삼배의 예를 올려 존경을 표현한 일도 있었습니다. 간화선을 수행하는 스님이었지만 초기불교에도 능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런 스님께서 2019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입적하셨다는 소식은 불교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안타까움과 추모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얼마 전, 봉암사에서는 적명 스님의 1주기를 맞이하여 추모법회와 부도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적명 스님 부도의 기단에는 스님의 일기 중 일부를 발췌하여 새겼습니다. 1988년 9월 4일에 남긴, 수행자로서의 발원이 녹아 있는 글입니다. 스님이 생각하신 참된 수행자상을 알 수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 글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이 일기에 남긴 ‘바람’을 스님은 일생동안 자신의 행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범속한 한 사람의 승려로 대중 속에 묻혀
규율 따라 앉고 서고 먹고 자며
때로는 일하고 때로는 참선하며
간혹 큰스님이 와서 법문을 하면
그가 비록 옛 도반이며 한갓 동생 같은 사람이었을지라도
이제 그가 법에 대해서 설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고 존경하며
그 법문이 유려하고 깊이 있고
도무지 들은 적이 없는 초유의 법문이라고
감격해 마지않은 그런 사람. 그런 순수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늘이나 땅, 그가 처하는 온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질투도 없고, 비교도 없고, 불안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바다 같고 허공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되고 싶은 아무 소원도 없는
바위 같은 그런 중이고 싶다.
_ 「나의 바람(1988. 9. 4)」(『수좌 적명』 89쪽)
『수좌 적명』은 적명 스님께서 남겨놓은 일기 몇 편과 짧은 법문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생전에 출간된 저서가 없었기에, 스님이 ‘쓰신’ 첫 책이자 유고집이기도 합니다. 문장마다 서려 있는 스님의 치열한 구도의 여정은 적명 스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스님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스님의 공부와 가르침을 곁에 두고 새길 수 있도록 해주고, 그리고 적명 스님을 이제 알게 된 사람에게는 스님의 진면목을 알려줄 것입니다.
적명 지음 | 232쪽 | 값 14,000원 (큰글자책 26,000원 | 전자책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