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추가 있고, 그것을 둘로 나누어 하나를 택하려고 할까요. 왜 추를 버리고 미를 취해야만 할까요. 왜 미가 찬양되고 추가 저주 될까요. 왜 특별한 것만이 아름답게 되고 나머지는 추하게 될까요. 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까요. (…중략…) 누구나 아름답게 되려고 이리저리 애를 씁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걸까요. (…중략…)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둘에 있으면서 하나에 이르는 길은 없을까요.”
- 야나기 무네요시 『미의 법문』 中
| 상투적인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필자는 전통 장인들의 ‘예술’을 ‘전시’하는 일을 했다. 늘 뒷덜미를 붙잡는 불편감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 장인이 만들어내는 사물과 필자가 예술이라고 간주해왔던 사물 간의 괴리에서 생겨났다. 이것은 분명 내가 아는 ‘예술’이 아닌데, 그래도 일을 하려면 ‘예술’이라 불러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가 생각해왔던, 보아왔던 ‘예술’은 작가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사물들이었다. 과거에 계속해왔던 것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만들어낸다면 ‘예술’이 아니었다. 예술은 오로지 감상을 위한 것이기에, 불상이나 소반처럼 ‘쓰임’이 있는 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공예’였다.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 산물이 예술이라면, 전통 장인들의 작품들은 예술이라 불리기에는 너무도 ‘상투적’이었다.
김혜리 작가는 세상에서 제일 상투적인 것들로 작품을 만든다. 그가 ‘빌려오는’ 그림들은 캐나다의 눈 덮인 산이나 열대 지방의 해변을 담은 풍경화, 용맹하게 울부짖는 호랑이나 민화투의 잉어와 연꽃, 어느 유럽의 시골을 연상시키는 매우 도식화된 해바라기밭과 같은, 누가 봐도 전혀 새롭지 않은 상투적 그림들이다. 몹시 상투화되어 보는 이에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대중목욕탕 냉탕 벽면에 부조로 조각된 로마 귀족의 호화로운 목욕 장면이나 시골의 어느 백반집 벽면의 곰팡이를 가리기 위해 붙여 놓은 허름한 액자들이 떠오르는 정체 모를 이미지들, 그림보다는 벽지에 가까운, 이른바 ‘이발소 그림’들이다. 몇 년씩 ‘이발소 그림 전문 화가’에게 직접 스킬을 배워가며 고집스럽고도 정성스럽게 이 상투성을 재생산해내는 작업이 바로 그의 ‘예술’이다.
상투성은 매번 했던 말을 반복하는 목사님의 설교처럼 진부하고, 당연한 말만 하는 도덕 교과서처럼 성가신 것을 뜻한다. 상투성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대개 그것에 저항하거나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뿐이다. 상투성은 장마철 방구석에 꽉 찬 습기처럼 짜증을 유발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게 만들어버리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감각이다. 그래서 상투성은 질문받지 않는다. 김혜리 작가는 이 교묘한 상투성을 정면으로 부딪친다. 다시 본다. 그리고 가장 상투적인 질문을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 피카소 그림과 이발소 그림이 동등한 세상
좋은 예술은 특별한 예술이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타고난 천재들이 탄생시킨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진품’이다. 우리는 왜 예술을 이렇게 생각하는가? 먼저 예술, ‘Art’라는 용어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Art’는 기술을 뜻하는 라틴어 ‘ars’에서 왔다. 예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배워야 할 ‘기술’, 혹은 ‘기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예술과 예술가의 지위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미의 ‘예술’은 1746년 아베 바퇴(Abbe Batteux)가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순수예술』에서 음악과 시, 그림, 조각, 무용을 ‘순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일상 기술과 분리하면서 생겨났다. 근대에 탄생한 ‘미학(Aesthetics)’이라는 철학의 분과는 이러한 예술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학문으로서 천재적인 예술가 신화를 보급해왔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인테리어 했던 미켈란젤로는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었고, 다산을 빌기 위한 일종의 예배 용품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인류 최초의 ‘예술’이 되었다.
이제는 예술 앞에 ‘순수’라는 단어도 굳이 붙이지 않는다. ‘예술’은 이미 그 자체로 존재의 당위성을 보증할 수 있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무언가로 군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예술’ 개념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 처음 접했던 우리나라는 이후 전 지구적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러한 미술 개념에 적응해나갔다. 이렇게 ‘미술은 공예보다 우월하며, 천재성을 타고난 예술가가 만든 특별한 그림은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는 의식은 어느새 우리 안에 ‘상투화’되었다.
1988년 『문화의 곤경(The Predicament of Culture)』에서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예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많은 창작물을 체계적으로 배제해왔는지 탐구했다. 독창적이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은 미술관이나 미술 시장에 자리한다. 이들은 ‘진품’, ‘명작’, ‘오리지널’로 불리며 완벽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된 공간에서 영위를 누린다. 그 외 다른 창작물들-이발소 그림, 장식품, (전통) 공예품, 공산품 등-은 잘해야 민속 박물관, 관광 상품관에 놓인다. 예술, 문화, 비예술, 비문화, 진품, 짝퉁, 걸작, 공산품 등으로 분류되거나 그 분류들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세상의 온갖 사물들은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순수) 예술’을 기준으로 하위 정렬된다. 예술에 있어서 천재들이 사는 세상과 범재들이 사는 세상은 미술관의 하얀 갤러리와 관광 상품관의 잡스러운 매대의 차이만큼이나 철저히 분리되어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미의 문제에 있어 천재와 범재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다. 상하, 귀천, 선악, 미추, 예술가의 진품과 이발소 그림 전문 화가의 장식품 등 반대 성향을 지닌 모든 것을 떠나는 게 그의 소망이다. 그는 불교사상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대립항을 떠난 ‘하나’에 대한 열망은 도달해야 할 곳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는 곳이다. 괴로움은 구원을 향하는 길목이 아닌, 이미 달성된 구원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그는 반케이 선사(盤珪, 1622~1693)의 삿갓에 쓰여 있는 글귀를 이렇게 바꾼다. “본래 미추가 없는데/어디에 선악이 있는가/미망이기에 삼계는 성(性)이고/깨달았기에 시방은 공(空)이다.” 수천억에 달하는 피카소 작품도, 몇만 원짜리 이발소 그림도, 미추의 분별 이전의 무상(無上)한 나라에서는 모두 같다.
| 내가 너를 예술로 임명하노니
김혜리 작가의 상투적 그림들은 예술의 신화를 조롱하고 전복을 꿈꾼다. 그가 사용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탈-맥락화’와 ‘재-신성화’. 2015년 작 ‘세잔의 우유병과 사과들’로 시작하는 엄청나게 긴 제목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제목에 친절하게 명시되어 있듯, 이 작품은 세잔, 피터르 클레즈, 샤르뎅, 도상봉 등 ‘유명 화가’의 작품들에서 일부분을 차용·재조합해 만든 정물화다. 작가는 마치 칼로 도려내듯 각 ‘명작’의 부분들을 이전의 맥락과 단절시킨다. 원작이 탄생한 1890년대 말 엑상프로방스 세잔의 아틀리에와 1950년대 대학로 근처 도상봉 화실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은 상당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워진다. 대신, 각 정물은 작가가 설정한 시공간에 재배치된다. 그리스 신전에서 분리되어 루브르 박물관에 놓인 ‘조각’들처럼, 탈-맥락화된 ‘위대한 예술’들은 김혜리 뮤지엄의 소장품으로 자랑스럽게 전시된다.
작가는 이발소 그림들의 테두리에 액자를 그려 넣는다. 보통 액자는 그림의 완성단계에서 전시를 위해 덧씌워 짐으로써 ‘이것이 예술 작품임’을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비예술로 여겨지는 이발소 그림에 액자를 새겨 넣는 행위는 그래서 이발소 그림의 지위를 되묻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2016~2017년에 그려진 <서른 개의 풍경>과 같은 작업은 그림보다 액자를 더 강조하여 액자의 상징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9년부터 작가는 더 이상한 시도를 하기 시작한다. <부유하는 이미지의 세계_02>의 액자 위로 겹쳐 그려진 전나무의 꼭대기처럼 액자가 사실은 ‘그려진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들키는 방식을 택하면서부터다. 이전 작업이 액자의 상징성을 이용해 비예술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미추의 분별 기준을 비틀고자 했다면, 2019년부터는 예술 체계의 허위성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가 하면, 가장 최근작인 <Illusion_01>에서는 ‘명화 난장판’을 만들어낸다. 모나리자 얼굴을 여러 겹 겹쳐 놓거나, 절단된 액자 프레임 사이에서 달력 그림에 있을 법한 열대수가 빼꼼 삐져나오게 하는 등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뒤틀고 복제하며 장난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제 체계로서의 예술은 그에게 놀잇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이 환장하는 잡종의 예술을 보며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전통 장인과 일하면서 느꼈던 불편감과 ‘예술’이라는 단어에 덕지덕지 붙은 권위로 인한 체증이 싹 가시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맨날 듣던 엄마의 ‘상투적’ 잔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깨달음으로 오듯, 가장 상투적인 것들이야말로 유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혜리 작가의 상투적 유토피아는 위대한 ‘예술’의 지위와 그것이 당연해지기까지 은폐해온 수많은 차별과 억압이 모두 해소된, 또다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을 빌자면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이 성취된 정토의 풍경일 것만 같다.
이달의 볼 만한 전시
고요한 관찰: 장욱진×OMA SPACE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 양주
2020.07.28~2020.09.27 | 031)8082-4245
무상한 현상계를 심안에 비추어 본다는 ‘정관(靜觀)’을 키워드로, 공(空) 사상을 ‘파동’으로 표현하는 컨템포러리 아트&디자인 스튜디오 OMA Space와 장욱진 화백이 만났다.
오민: 초청자, 참석자, 부재자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 서울
2020.07.31~2020.09.27 | 02)6929-4470
움직임은 공기를 진동시키고 우리는 진동을
소리로 인지하기에, 오민 작가에게 소리란 ‘움직임의 결과’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을 실험한다.
나 자신의 노래
사비나미술관 | 서울
2020.07.29~2020.09.20 | 02)736-4371
개별성, 유일성, 불변성을 지닌 자아 정체성이라는 관념을 깬다. 전체성, 복합성, 유동성을 지닌 자아 정체성을 탐구하는 전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시장이 휴관했거나 예약제로 운영 중일 수 있습니다. 방문 전 꼭 확인하세요.
글.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사진. 김혜리 작가 제공
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8년째 기획·운영하고 있다. 최근에 오픈한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마인드리추얼),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일상여백)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우리다운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