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개론] 불교의 업설業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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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개론] 불교의 업설業說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02.08 09: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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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항상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

| 다양성과 유연성 — 불교의 저력

불교가 탄생하기 전, 이미 인도에는 7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바라문교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정통 바라문교와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 진 수많은 출가 사문들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불교가 오늘날 세계 3 대 종교 중의 하나로 성장한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저력 중의 대표적인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불교의 다양성과 유연성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며 적응해 가는 이 생명력은 앞의 연재에서 밝힌 대 로 석가모니가 설한 불교 교리 자체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기독교의 『신약성서』는 397년에 정경(正經, 공인된 경전)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기독교에도 당연히 정경 이외의 경이 있었지만, 정경이 확정되면서 이 경들은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통과 이단 사이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슬람교의 『꾸란(=코란)』이 현재의 내용으로 확정된 것은 651년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Uthmān, 644~656년 재위)에 의해서이다. 그는 『꾸란』의 서로 다 른 이본異本이 지역마다 나타나자 이를 소각하고 정본을 확정 지었다. 이 정 본만이 천사 가브리엘이 전달한 신의 말씀으로 인정되어 현재에 이르기까 지 한 자의 첨삭도 없이 보존되어 온다. 이슬람교에서는 정본의 훼손을 막기 위해, 『꾸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조차 『꾸란』이 아닌 ‘『꾸란』의 해설’로 본다.

불교에는 ‘팔만사천 법문’이라 일컬어지는 다양한 내용의 수많은 성전이 있지만, 『신약성서』나 『꾸란』과 같은 정경 내지 정본은 없다. 불교의 역사에서 특정 부파나 종파가 자신들의 견해에 가장 적합한 경전 등을 불설(佛說, buddha vacana, 붓다의 말씀・교설) 또는 소의경전으로 삼은 일은 많다. 그러나 불교계 전체 회의 등을 통하여 특정 경전을 정통으로 규정하고 나머지는 이단으로 배제한 적은 없다.

불설佛說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대 그룹이 전승하 고 있는 경전이나 사상을 불설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일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경전이나 사상이 배척이나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며, 상대 도 동일한 불교도로서 인정되었다. 때문에 불교에는 다양한 내용을 가진 수 많은 성전이 전승되어 왔으며, 거기에는 개별 상황과 분야, 심도에 맞는 무수 한 지혜가 농축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서로 다른 교리의 병존을 허용하며, 그런 만큼 교리와 이에 근거한 실천・수행법은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불교가 갖는 특성이며,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가 성장한 요인과는 정 반대되는 성장 요인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불교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불교 교리를 소승과 대승, 정통 과 비정통 등으로 구분하여 어느 쪽에 우위를 두고 한쪽을 내치는 태도로 접 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에 빠질 수 있으 며, 그러한 틀에 사로잡혀 번뇌를 소멸하는 다양한 지혜를 외면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교 정신에 맞지 않으며, 도그마에 기반한 타 종교적 태도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다양성 속에서도 시대를 관통하여 그 기본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되는 불교 사상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불교의 교리와 실천・수행, 그리고 신앙과 생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불교의 업과 윤회설, 그리고 바라문교・자이나교와의 차이점

새로운 사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사상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려 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종교나 사상의 용어를 사용 하되, 그 용어의 의미를 새로운 사상에 맞게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석가모니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설하기도 했는데, 그 대 표적인 경우가 ‘업(業, karman)’에 대한 가르침이다.

업은 불교가 출현하기 전부터 바라문교에서 사용한 용어다. 업에는 기 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행위’고, 또 하나는 그 행위의 결과로 남게 되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힘’이다. 이 두 의미 중 어느 것을 뜻하는가는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하지만, 두 의미가 함께 결합된 상태 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이 업이란 용어에는 행위는 그에 합당한 과보를 가져온다는 인 식이 들어 있다.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는 말 그대로, 선업(선한 행위)은 즐거움을 초래하고 악업(악한 행위)은 괴로움을 초래한다. 이 업에 의해 윤회도 있게 된다. 윤회 또한 불교 출현 이전 바라문교에서 창출한 용어다.

윤회輪廻란 태어남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윤회의 와중에 서 다음 생에 어떤 몸을 받을까도 이전 생에서의 업이 선이냐 악이냐에 의해 결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6가지 몸을 받을 수 있다. 천상에 거주하는 신神, 인 간, 아수라(신들의 적인 마신魔神), 축생, 아귀(굶주린 망자), 지옥 중생이 그것이다. 윤 회는 고통이자 속박이며, 여기서 영원히 해방되는 것이 해탈解脫이다.

바라문교에서 형성된 ‘업에 의한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세계 관은 그 후의 불교나 자이나교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떤 업에 의해 무슨 원리로 윤회가 이루어지고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각 종 교마다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그 내용은 완전히 달랐지만, ‘업에 의한 윤회 와 그로부터의 해탈’이라는 틀 자체는 공유하고 있었다. 업과 윤회에 대한 바라문교와 불교의 시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을까?

주류 바라문교에서 업은 ‘제사를 거행하는 성스러운 행위’를 뜻했다. 그리고 이 업에 따라 어떤 형태의 윤회를 하느냐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본인의 행・불행과 사후의 생존 형태는 제사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제사를 적법하게 잘 거행해야 본인은 행복도 얻고 사후에 좋은 세계에도 태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불교는 업의 의미를 새롭게 바꿈으로써 독자적인 새로운 윤회관 을 형성했다. 업을 ‘제사 행위’가 아닌 ‘의사意思’・‘의도’라고 정의한 것이다. ‘의사 ’・‘의도’ 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와 빨리어 원어는 ‘ 쩨따나 cetanā ’ 로 보통 한역 불전에서는 ‘생각할 사思’자로 번역된다.

몸을 움직이거나 말을 하거나 어떤 생각을 이어갈 때 그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사 내지 의도가 원동력이 되어 그것들은 일어난다. 이러한 의도가 바로 업의 본질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나아가 어떤 행위가 선이냐 악이냐를 결 정하는 것도 그 행위의 ‘의도’라고 통찰했다. 의도가 선하면 그 행위도 선이 되고, 의도가 악하면 그 행위도 악이 된다.

이렇게 되면 제사가 아니라 모든 행위의 의도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본 인의 행・불행과 윤회 형태는 정해진다. 결과적으로 종전의 바라문교의 그것 과는 전혀 다른 업과 윤회설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업은 제사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행하는 온갖 행위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다.

또한 불교는 ‘자발적인 의사’, 즉 ‘의도의 자발성’을 인정했다. 자유롭게 의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유롭게 의도할 수 있다면, 과거에 행한 행위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행동이 가져오는 과보로 인해 자신의 삶도 바뀔 수 있다.

똑같은 씨앗이라도 밭이 어떠하냐에 따라 열매는 달라진다. 씨앗이 과거에 행한 업이고, 밭이 지금부터 행할 업이라고 하자. 열매는 이 업들이 가져올 과보에 해당한다. 의도의 자유에 의해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업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밭의 질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고, 그 결과 열매, 즉 과보도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삶은 항상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의도는 실행으로 옮겨지는 것에 의해 습관이 된다. 처음에는 하기 힘든 선업도 용기를 내어 한 번 하고 두 번 하다 보면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고, 그 만큼 자신의 삶도 점점 밝아지게 된다. 악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속담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행위의 씨를 뿌려 습관을 수확한다. 습관의 씨를 뿌려 성격을 수확한다. 성격의 씨를 뿌려 운명을 수확한다.” 같은 행위를 거듭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뿌리내리면 성격이 되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도 변한다.

의도의 자유성으로 인해 과거의 제약에서 벗어난 행위가 가능하고, 이 새로운 행위가 가져 오는 과보에 의해 미래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불교 업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전생에서 행해진 업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므로 이미 그렇게 되도록 다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부정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는 신의론 神意論과 ‘모든 것은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히 일어나므로 힘들게 선업을 행 할 필요도 없고 본인 편한 대로 살면 된다’는 우연론도 부정한다.

어떤 사람이 행한 죄가 불가항력적 운명이나 신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면 그에게 책임을 물어 과보에 해당하는 벌을 부과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 까? 그 죄의 원인이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 사람을 통해 죄가 실행되었을 뿐이라도 벌을 부과하는 것이 정당할까? 어느 쪽도 정당하다 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업을 행한 자에게 그 과보가 부과되는 것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 업의 책임이 업을 행한 당사자에게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윤리는 성립한다. 업의 책임이 당사자에게 없는데도 그 업에 따른 상이나 벌이 그에게 주 어지는 순간, 윤리는 붕괴되고 만다. ‘의도의 자유’가 있을 때 업의 책임은 온 전히 그 업을 행한 당사자에게로 돌아간다.

 ‘의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 의도에 타의나 외압은 물론, 본인의 과 거업의 절대적 영향도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도의 자유’하에서 어떤 업을 행하였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그 업을 행한 당사자에게 있고, 그 업에 대한 과보를 당사자가 받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불교는 의도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본인이 행한 업의 과보는 본인이 받는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불교의 업과 윤회설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석가모니 당시에 막강한 교단을 형성했던 자이나교의 업과 윤회설과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 이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영혼(jīva)은 순수 생명이며 정신 작용을 본질로 한다. 질량은 없고 위로 올라가는 상승성을 갖는다. 반면에 물질은 생명이 없고, 질 량과 아래로 내려가는 하강성을 가진다.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 행위 를 하면,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이 외부에서 흘러 들어와 영혼에 부착하여 영혼을 속박한다. 영혼에 부착된 이 물질을 자이나교에서는 업이라 한다. 영혼에 부착된 이 물질(=업) 때문에 윤회하게 된다. 영혼이 아무런 방해 없이 상 승해야 해탈하는데, 업인 물질의 하강성에 의해 상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속박의 강약은 번뇌의 강약에 따른다. 다시 말해 번뇌가 강한 행위일 수록 강한 속박의 물질이 영혼에 부착한다. ‘영혼에 부착된 물질’, 즉 업의 강약과 많고 적음에 따라 영혼은 천상・인간・축생・지옥의  4영역을 오간다 . 이것이 윤회다.

영혼이 물질에서 완전히 분리될 때, 영혼은 아무런 방해 없이 그 상승성 을 실현하여 세계의 정상에 있는 ‘해탈자의 세계’에 한순간에 도달하고 거기서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 이것이 해탈이다.

업의 성질에 의해 본인의 행・불행과 윤회 형태가 결정된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불교와 자이나교 사이에 차이점은 없다. 그런데 무엇이 업의 성질을 결정짓는가에 대한 안목은 각기 다르다. 불교는 업의 성질(=선・악・무기)을 가르 는 것은 그 업을 일으키는 의도라고 파악한다. 반면에, 자이나교는 업은 단식 과 같은 신체적 고행에 의해 정화된다는 의식이 강하다.

따라서 불교는 의도나 동기 등 내면적 마음의 정화를 중시하지만, 자이나교는 신체적 고행・불살생・무소유 등 눈에 보이는 신체적 수행을 중시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극단적 고행은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 양 종교의 차이를 전하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업(身業, 신체적 행위)을 중시하여 고행을 장려하는 니간타 나따뿟따(=자이나교의 창시자)의 제자가 의업(意業, 생각)의 중요성을 설하는 석가모니를 만나자 마음을 바꾸어 제자가 되었다. 그가 옛날의 스승 앞에서 석가모니를 향한 경의를 표명하자 니간타 나따뿟따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고 한다.
 

| 불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불행이 본인에게 닥쳐왔을 때, 불교의 업설은 이것에 어떻게 대처하라고 가 르칠까? 자기 인생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자신을 일깨울 수 있는 존재도 자신뿐이다. 불행의 씨앗을 언젠가 본인이 뿌렸다 해도 그 후에 어떤 업을 행하였느냐에 따라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 본인에게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원인은 본인에게 있었으 므로 남 탓은 그만두고 그것을 자신이 만든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 탓은 하면 할수록 증오와 원망만 커져서 그 과보로 더 불행해질 뿐이다. 하지만 이 불행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부터 행하는 업으로 얼마든 지 극복할 수 있다. 사찰에 나가 신행 생활을 하는 것도 극복에 도움이 된다.

우리 마음은 항상 같은 길로만 다닌다. 사람과 사물을 늘 고정된 자신의 좁은 시각으로만 보고, 자기 본위로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 길에서 벗어나 진리의 풍경을 보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은 평생을 같은 길로만 다니다가 생 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닌 것에서 이 길을 벗어나 진실을 보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계기는 지나가 는 평범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고, 평소에 늘 보던 마당의 꽃 한 송이일 수도 있다. 익숙한 경전 한 구절이 온 영혼을 울릴 수도 있다.

한편 불행이 자신으로 하여금 고정된 길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 기회는 행복할 때보다는 불행할 때 오히려 더 자주 찾아 온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야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환골탈 태하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을 계기로 과거와 다 른 진실한 사람이 되었다면, 이때의 불행은 불행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불행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거나 암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그야말로 불 행이다.

불행이라 불리는 것에 불행을 반드시 가져오는 고정된 뭔가가 있다면 모든 경우에 그것은 항상 불행을 초래해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 럼 불행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불행이 아닌 경우도 있다. 따라서 불행이 라 불리는 것에는 고정된 불행이란 것이 없다. 나중에 설명할 대승불교 교리에서는 이것을 “불행은 공空이다”라고 표현한다.

불행은 공이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불행이 될 수도 있고, 도약의 계기도 될 수 있다.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은 선업이다. 불행이라는 생각과 명칭없이 그냥 그것과 직면하는 것, 그 것은 더 차원 놓은 선업이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일본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화엄사상으로석사・박사학위를받고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걷는자,너는누구냐』(공저),『무문관참구』(공저) 등이있다.

장휘옥ᆞ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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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엽 2019-05-14 18: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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