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法)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상윳따 니까야』 22.87)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알릴 뿐이다.”
(『맛지마 니까야』 22)”
| 석가모니를 만나는 두 가지 길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20세기 전반기에 세계 지성계의 스타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대 최고의 석학들만 교단에 서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였으며,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 있던 그는 나치가 제공하는 특권을 거부하고 청빈한 생활을 이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석가모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은 석가모니를 따랐을까? 그는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지만, 수중에는 이미 다 얻고 있다.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다. 그가 존재해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다. 그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곧 설법인 석가모니. 그를 만날 수는 없을까? 길은 있다. 하나는 전해 오는 그의 전기나 말씀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온몸으로 직접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간접적으로 석가모니를 만나는 데서 그친다. 이 만남에서는 석가모니는 석가모니이고, 나는 나다. 내 입장에서 석가모니를 만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가계나 시대 상황, 가르침 등을 읽고 자기의 기준에서 석가모니를 판단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를 만나는 또 하나의 길은 직접 만남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고인이 된 분을 무슨 수로 만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형체 있는 뭔가를 면전에서 마주하는 것만이 ‘직접 만남’일까?
당나라 때 무착無着 스님이 중국 산서성山西省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았다는 게송이 있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부처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변함이 없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내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해 진실하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음과 욕망, 집착과 망상이 종적을 감춘 마음이 바로 석가모니의 마음이다. 내가 그 마음이 되었을 때 나는 석가모니가 본 세계를 직접 내 몸으로 똑같이 본다. 힘들어하는 눈앞의 사람들, 저 멀리 들리는 뻐꾸기 소리도 마음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이고 들린다. 석가모니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같은 세계를 볼 때, 그때 석가모니와 나는 다른 사람일까? 내가 곧 석가모니고 석가모니가 곧 나다.
이렇게 석가모니와 나 사이의 구분이 붕괴되었을 때를, 불교, 그중에서도 특히 선禪에서는 ‘석가모니를 온몸으로 직접 만난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석가모니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석가모니가 아닌 내가 저기에 있는 석가모니를 직접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석가모니 재세 당시 ‘왁깔리Vakkali’라고 불리는 수행승이 있었다. 중병에 걸린 그는 간병하는 주위의 스님들을 석가모니께 보내어 자신을 한번 찾아와 주실 것을 청했다. 석가모니가 청을 허락하시고 왁깔리의 거처로 오셨다. 왁깔리는 석가모니가 오시는 것을 보고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왁깔리에게 말했다. “왁깔리여, 일어나지 마라. 이곳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에 내가 앉겠다.”
자리에 앉으신 석가모니는 병의 차도 등을 물었다. 왁깔리는 오랫동안 석가모니를 뵈러 가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의 기력이 없었던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왁깔리여, 그만두어라. 썩어 갈 이 몸을 보아서 무엇 하겠느냐? 진리(法)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진리를 보는 자는 석가모니를 보는 자이고, 석가모니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는 자라고 했다. 석가모니를 본다는 것은 석가모니를 직접 만난다는 것이다. 어리석음과 욕망이 소멸되었을 때 진리를 본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욕망이 저절로 소멸되는 일은 없다. 진리를 보려면 끝없는 열정과 직관적 통찰력이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석가모니를 직접 만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전해 오는 그의 전기나 가르침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고자 한다. 언젠가 이것이 직접 만남의 발판이 되지 않을까.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종이에 그려진 곡선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수천 개의 잉크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들 하나하나에만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살펴볼수록 곡선은 직선에 가깝게 된다. 진정한 속성이나 의도를 파악하려면 뒤로 물러나 전체상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곡선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전체상을 아는 데는 여러 난점이 기다리고 있다. 인도는 역사가 없는 나라라고 언급되듯이, 불교와 관련된 자료도 연대가 확실한 경우는 거의 없다. 석가모니의 전기와 관련해서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한 학계의 정설에 의거하여, 우선 불교의 굵직한 특색 몇 가지와 불교 발생 이전의 인도 사상계, 석가모니의 생애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현미경으로 보듯이 정밀하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풍광을 한번에 쓰윽 그린 풍경화처럼 서술할 것이다.
먼저 불교의 특색에 대해 살펴보자.
| 불교는 종교일까, 철학일까?
불교는 2,500여 년에 걸친 역사에서 창조신이나 유일신을 인정한 적이 없다. 불교의 핵심 교리는 연기緣起다. 연기란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그 조건이 소멸하면 함께 소멸한다’를 그 내용으로 한다. 원인 없는 결과, 원인 없는 존재란 없다는 것이다.
창조신이나 유일신은 그 존재의 원인이 없는 존재다. 쉽게 말해 그 부모님이나 자연 환경이 없어도 존재한다. 아니, 그런 것들이 있기 전 아득한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했으며 세상만물을 창조한 분이다. 연기에 의하면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는 창조신이나 유일신을 주장하는 종교를 비방하거나, 정복해서 불교도로 개종시키려고 한 적이 없다.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하나님(=창조신ㆍ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무엇을 종교라 하기에 그렇게 말할까? 과연 불교는 종교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교’라는 말이 만들어진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종교라는 용어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 그대로,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라는 말이 오늘날의 의미를 담게 된 것은 약 150년 전인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서, 영어의 ‘릴리전religion’에 해당하는 말을 한자로 ‘종교宗敎’라고 번역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서양의 문물이 동양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번역 용어들이 생겨났고, 이 번역어들이 널리 보급되고 정착되면서 종교는 오늘날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실은, 종교라는 용어는 릴리전의 번역어로 채택되기 1,000여 년 전부터 불교에서 이미 사용하던 말이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불교의 특정 사상을 선양하고 연구하는 여러 종파宗派가 생겨났다. 예를 들면 화엄종ㆍ천태종 등이다. 불교에서 ‘종교’란 이러한 각 ‘종파의 핵심宗을 설하는 교설敎’을 뜻했다.
그렇다면 종교라고 번역된 릴리전religion이라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릴리전은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에서 파생되었다. 이 라틴어의 어원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두 가지 설이 있었고, 어원이 다르다 보니 릴리전이 의미하는 뜻도 각기 달랐다.
첫 번째는 기원전 1세기경의 로마 철학자 키케로(Cicero, BC 106~43)의 설이다. 그에 따르면 릴리전은 ‘반복 음미하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엄숙히 행해지는 근행(勤行, 정진하는 행위)이나 의례儀禮’를 뜻했다. 두 번째는 3~4세기 무렵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 락탄티우스(Lactantius, 240~320)의 설인데, 릴리전은 ‘재결합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며 ‘신(하나님)과 인간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릴리전의 어원에 관한 위의 두 설은 이미 언어학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판정이 났다. 릴리전의 모태가 되는 라틴어 렐리기오의 용례를 조사한 결과, 이 말은 애초에 어떤 불가사의한 사물에 접했을 때 일어나는 경외감이나 의혹의 감정을 지칭했다. 2세기에 이르면 당시 로마에 성립되어 있던 몇 개의 종교 계통을 모두 다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고, 중세 때는 수도원 생활과 같은 세속을 초월한 행위를 뜻했다.
따라서 적어도 중세 때까지는 락탄티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릴리전이 ‘하나님과의 재결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 언제부턴가 기독교인들은 락탄티우스의 설을 따라 ‘하나님과 인간을 재결합시키는 것’만이 종교라고 이해한 듯하다. 나아가 기독교의 유명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그랬듯이,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다시 하나님에 결합시킨 분이 예수이고, 따라서 참된 릴리전은 바로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재결합만을 종교라고 고집하는 사람에게 종교로서의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의미한 일이다. 말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한다. 세계가 한집안처럼 소통되는 지금, 세계 대부분 사람들은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불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라는 용어를 ‘하나님과의 재결합’이라는 뜻으로 국한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사실 종교학계에서는 종교의 정의에 관한 한 종교학자의 수만큼이나 많고 다양하다고 한다.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ㆍ힌두교 등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들 종교의 공통분모를 생각해 보았을 때, 유력한 종교에는 다음과 같은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각 종교에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성전이 있다. 이들 종교는 자신의 성전이 말하는 것은 모두 옳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경전,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교의 꾸란(코란) 등이 이러한 성전에 해당한다.
종교의 이런 면은 철학과는 완전히 대립된다. 철학은 그러한 권위적인 것을 모두 배제하고 자신의 이성에 의해 자유로운 사색을 치밀하게 진행시켜 나간다. 서양에서 이러한 종교와 철학은 구분되어 서로 다른 영역에 속했고,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의 구분이나 대립은 거의 없었다. 양자는 일체를 이루어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인도의 모든 사상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불교는 당연히 종교다. 그런데 맹목적 믿음보다 심오한 철학적 통찰과 예지를 근간으로 한, 매우 철학적인 종교다.”
이러한 성격의 불교는 자신의 성전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종교’로 전개되어 갔다. 처음부터 석가모니는 ‘열린 종교’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이단자를 가려내어 박해ㆍ처형하는 종교재판의 역사가 없는 대단히 민주적인 종교다. 다채로운 교리가 출현하는, 2,500여 년에 걸친 불교 교리의 역사는 불교가 ‘열린 종교’임을 잘 보여 준다.
| 불교 교리는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다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서로 다를까? ‘종교에 심취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서로 다르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과학적 진리는 참인 반면,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뭔가 허구와 미신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사실적 진리’다. 그러면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종교마다 다를 수 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단지 진리라는 용어만 같이 사용할 뿐 그 내용과 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부딪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전혀 부딪치지 않는다. 불교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의 원리’를 진리로 보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에는 “여래(=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진리는 확립되어 있다. 여래는 이 진리를 몸소 깨달아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다”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부처가 진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이가 부처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원한 진리란 앞에서 언급한 연기緣起를 말한다. 연기는 만물에 통용되는 우주적 원리라 할 수 있으며 과학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불교는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듣기만 하면 납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현대 과학은 눈부실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내놓고 있다. 그 놀라운 성과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2,500여 년 전부터 불교가 설해 온 내용을 현대 과학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특히 대승불교 교리와 현대 과학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현대물리학을 대변하는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은 공空사상과 화엄華嚴사상, 그리고 유식唯識사상의 과학적 전개라고 볼 만한 요소가 매우 많다. 뇌 과학에서 말하는 ‘시냅스가 곧 나다’라는 명제는 유식사상의 신경생물학적 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세기에 유식은 같은 내용을 식전변이라는 체계를 통해 이미 다 밝혀 놓고 있다.
불교가 과학과 다른 점은 과학이 물질세계의 원리 규명과 응용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불교는 ‘괴로움과 그 초탈’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알릴 뿐이다(『맛지마 니까야』 22)”고 했다.
과학에서는 앎과 일치된 생활을 요구하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과학과 불교의 이러한 차이점은 그대로 철학과 불교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고苦의 원인에 대해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에 의거한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고의 소멸, 즉 열반은 없다. 건강 수칙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처럼.
그래서 불교에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다양한 교리와 수행 체계가 있다. 대표적 수행 체계로는 염불ㆍ진언ㆍ위빠사나ㆍ선禪 등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삶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불교는 한쪽 날개를 잃은 새와 같다. 창공은 무한히 열려 있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