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처관은 유일한 해탈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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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관은 유일한 해탈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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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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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설법 | 아짠 마하 부와의 수행법문-열 번째 법회(2)

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열 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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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답: 위빠사나의 핵심인 사념처관(四念處觀)은 몸〔身〕·감각〔受〕·마음〔心〕·법〔法〕의 사념처에 마음집중(mindfulness, sati)을 확고히 구축하여, 몸은 부정(不淨)하며, 감각은 고통〔苦〕, 마음은 무상(無常), 법은 무아(無我)임을 명백히 통찰하는 수행입니다.
붓다께서도 사념처관은 중생의 번뇌를 완벽하게 정화시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4가지 대상들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內在)되어 있으며 삶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들의 근원이므로,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여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념처관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감각·마음·법에 마음을 집중시켜 순간순간의 잠정적 선정(禪定)을 계발하면 번뇌를 뿌리 뽑을 수 있으며, 오온(五蘊)의 무상한 본성을 밝혀내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념처의 본거지는 물(物)의 집합인 ‘색온(色蘊)’으로 동일하므로, 사념처 중 한 곳에 대한 마음집중은 나머지 세 곳에의 마음집중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념처는 각기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관은 몸에 대한 마음집중 수련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몸에 대한 마음집중(身念處)
몸에 대한 마음집중은 몸의 상태와 움직임, 몸의 요소 등에 대한 관찰입니다. 몸의 상태에 대한 관찰에는 호흡에 대한 마음집중 수행인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隋息觀)가 효과적입니다. 호흡은 몸의 유지를 위한 필수적 자양분이자 조건인자로, 몸을 다스리고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다스리는 힘을 배양하기 위해 호흡을 활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몸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호흡의 특성과 기능들을 알아차리면서 매순간 빈틈없이 마음집중을 이어나가면, 선정이 깊어지면서 통찰력(지혜)으로 이어져 삼법인(無常·苦·無我)를 깨우치게 됩니다.
몸의 자세와 움직임은 사대(四大: 물질을 구성하는 4가지 원소인 地·水·火·風)와 연계시켜 관찰해야 합니다. 이 방법으로 빈틈없이 마음집중을 이어나가면 망상이 끼어들 수 없으며, 몸의 움직임들은 정신적 의도가 4대를 움직여 야기되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되어 ‘나’라는 인격체가 실재한다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무명(無明)과 욕망, 집착, 업 등의 요소들을 조건인자로 삼아 일어나며, 이 조건들이 소멸될 때 몸도 사라져버림을 통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아와 세계에 대한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감각에 대한 마음집중(受念處)
세상만물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각입니다. 삶의 온갖 고통들은 감각과 마음간의 갈등에서 양산됩니다. 감각은 마음을 조건짓는 요소로, 감각이 일으킨 욕망에 의해 마음이 작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감각이 어떻게 색온(色蘊)에서 일어나 마음의 조건으로 군림하게 되는지를 마음집중으로 세밀히 관찰해야 하며, 모든 고통의 원인인 감각을 다스릴 수 있어야 마음도 지배할 수 있음을 직접 체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감각 속에서 감각과 연계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감각을 관통할 수 있게 되면, 감각이 소멸되면서 욕망과 아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음에 대한 마음집중(心念處)
감각에서 벗어나 마음이 청정하고 확고부동해지면,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마음은 직접 감지할 수 없지만 생각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다양한 사념들의 흐름을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면밀히 지켜보십시오.
탐·진·치가 일어날 때 그것들에 빈틈없이 마음집중하면, 연이어 새로운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과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탐·진·치를 일으키는 대상과 맞닥뜨리게 될 때 그 대상에 마음집중을 하여 탐·진·치를 차단시키는 것은, 원인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대상이 육근(六根)과 접촉하게 되면 마음에 육체적 감각이 일어납니다. 이 감각들을 관찰하는 것이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이 수많은 요소들의 집합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연속적인 과정을 직시하게 되면, 고정된 실체나 자아에 대한 확신이 와해되면서 오온(五蘊)의 무상(無常)과 공(空)을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마음집중(法念處)
법의 관찰은 마음의 관찰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때문에 법을 관찰하려면 감각에 대한 마음집중에 숙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법은 삼라만상의 본성이자 궁극적 진리로, 모든 법에는 일어남의 원인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에 끊임없이 마음집중하여 ‘내적(內的)인 법’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통찰은 먼저 삼법인(三法印)과 공(空), 진여(眞如)를 통찰할 수 있어야 가능해집니다.
무상·고·무아·공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진여로 귀결됩니다. 법은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 ‘여기, 있는 그대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는 확고부동한 개아(個我)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을 ‘내 것’으로 약탈함으로써 집착의 고통을 초래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법의 관찰의 핵심은, 무아(無我)를 통찰함으로써 삼라만상을 그 자체에게 있는 그대로 되돌려주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념처관은 사념처에 대한 알아차림을 마음집중으로 보호하여 사념(思念)을 가둬버림으로써,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사념에 의해 변질됨이 없이 그 본성 자체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지혜수행입니다. 사념처관이 완벽한 단계에 이르면, 7각지(七覺支)도 완전히 계발되어 저절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니, 불퇴전의 정진력으로 오직 사념처에 빈틈없는 마음집중을 이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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