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종종 단하(丹霞) 천연(天然) 선사의 일화를 먼저 학생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안주하는 것, 또는 통념이라고 생각한 것을 과감히 깨라는 뜻에서다. 시만큼 창의적 생각이 중요한 귀물(鬼物)이 또 있을까. 그러면 단하 선사는 일찍이 무슨 행각을 펼쳤던 것인가.
혹심한 한파가 기습한 겨울날이었다. 그것도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나절이었다. 혜림사라는 조그만 절에 운수행각의 객승이 한 사람 찾아들었다. 그는 하루저녁 쥔을 붙이자고 원주(院主)에게 부탁을 했다. 막 저무는 산중의 저녁나절이라 별수 없이 원주는 승낙했다.
그날 밤 자정께는 되어서였다.
원주는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듣고 깨었다. 어라, 이게 뭔 일인가. 객승이 제 방에 군불을 때고 있었다. 그것도 법당에 모신 부처님을 들어다 때고 있었다. 대경실색을 한 원주는 펄펄 뛰며 고함을 질렀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그러나 객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궁이 속 불만 이리저리 헤집었다.
“아니 지금은 또 뭣 하는 거요?”
“예, 부처님을 태웠으니 사리를 찾고 있소.”
원주는 더 기가 막혀 소리를 꽥 질렀다.
“목불인데 무슨 놈의 사리가 나온단 거요.”
“어, 나무부처였구먼 그럼 법당의 나머지 부처도 땝시다.”
같은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어느 관점에서 접근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나 값은 영 달라진다. 나는 시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먼저 하나를 들라면 이 같은 점을 든다. 통념과 다른 시각에 의해 시인이 발견한 대상의 새로운 모습 내지 의미 읽기를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몰랐던 것을 아는 즐거움이자 만족인 것이다.
내가 즐겨하는 담론 가운데 이런 것도 있다. 너무 잘 알려진 말이어서 사람들은 정신줄이 확 풀릴지도 모르겠다. 흔히 우리가 물 반 컵을 앞에 두고 나누는 얘기가 그것이다. 곧, 물 반 컵을 두고 어느 누구는 “허, 고작 반 컵 밖에 안 남았네.” 하고, 어느 누구는 “아이고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았네.”라고 탄성을 발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반응은 같은 물 반 컵을 두고도 영 딴판인 것이다. 여기서 새삼 ‘고작’과 ‘아직도’의 거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설명함은 부질없다. 물 반 컵 대신 그것을 삶이나 세상이란 말로 바꿔 놓고 보면 그 차이가 너무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뒷날 어느 스님이 단하 선사의 이 소불(燒佛) 건을 진각(眞覺) 대사에게 전하며 물었다.
“펄펄 뛴 그 절 원주는 그렇다 치고 단하는 목불을 태웠으니 허물이 크지 않았습니까?”
이에 진각 대사가 대답했다.
“단하는 나무토막만을 태웠고 원주는 부처님만을 보았던 게지.”
그렇다. 그동안 우리도 생활 속에서 과연 무엇을 태우고 보았는지 한번 곰곰 생각할 일이다.
홍신선
시인. 1944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시전문지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홍신선 시전집』, 『우연을 점 찍다』등이 있다.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서 예술대학장 겸 문예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정년 후 시작에 전념하고 있다.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