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 오늘을 사는 보살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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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 오늘을 사는 보살정신
  • 석암 스님
  • 승인 2009.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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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달음과 행동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우리가 자기 성품을 깨달을 때 인생의 근본이 무엇인가 알게 되고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가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불교는 아는 것으로 그치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다. 진리대로의 행동이 불교인 것이다. 진리대로 살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불교다. 그러므로 무엇이 보살정신이냐 물을 때 고원한 말보다 보현 보살의 십종대원(什種大願)을 들고 싶다. 보현 보살 십종대원을 떠나서 보살도는 없다는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이다.
 오늘날 혹 「보현행원」에 대하여 시대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십종대원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오늘날 노도 같이 밀려든 서구문명 앞에 우리의 것은 모두가 빛을 잃은 것 같아도 이 행원만은 영원히 강렬한 광채를 우리에게 뿌리고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 주체성 상실에서 가치 전도는 온다.

 현대 과학문명이 우리의 모두를 압도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로는 일체 과학이 불법을 떠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체 만물 만법이 불법을 떠날 수 없다.
 존재적 그 모두는 불법 밖에 설 수 없고 일체 유심(唯心)의 법 밖에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불법의 입장을 모른 데에서 현대 과학문명은 방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주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생활이 풍부하고 편리하게 되었더라도 인간이 그 주체적 자기 위치를 상실하였을 때 인간은 주체에서 객체의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공허해질 수 밖에 없다. 참다운 행복이 없다. 오늘날의 정신적 방황은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불법을 알 때 인간이 제 위치에 선다. 생활이 충실해진다.
 「법망경」에 말씀 하시기를 「치산 생산업이 모두가 원종무심(圓宗無心)경계에 든다.」고 하였다. 불법을 떠나서 세간법이 없다. 참으로 불법에서 비로소 세간법은 그 빛을 얻게 되고 인간 생활에는 인간적인 윤택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 보현행원이 역사의 좌표다.

 보현보살 십종대원을 대할 때 우리의 정신이 새로워 진다. 그 광대무변하고 곡진하신 대자비 앞에 서면 필자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보현행원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구원한 좌표며 국가를 안녕과 평화 위에 안립(安立)할 국민 정신이다. 행원 정신으로 우리의 국민 우리의 청년이 무장하고 실천할 때 이것이 참으로 애국 애족이며 불국토의 건설이다. 이보다 더 큰 포교도 보살도도 없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 안락의 기반이며 민족 번영의 틀이다. 종교가 중생을 구호하고 이 땅의 평화 번영을 기원한다면 결코 국가 수호에 등한해서는 안되겠다. 국가가 없는 곳에 질서도 개인도 생명도 재산도 보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는 부단히 국민 정신을 정법으로 계도하고 국가를 수호할 것에 등한해서는 안되겠다.
 오늘의 우리나라 사정은 심히 어수선하다. 앞서는 「민비 시해사건」이 우리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판에 이번에는 또 일본산 청년이 8.15사건을 저질렀다. 여기서 이유를 묻고 대책을 따지고 책임을 묻고 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정신 자세를 통일해야 한다. 보현의 십종대원으로 오늘의 우리 국민 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보현정신이야말로 주체적 인간정신의 골격이며 우리의 민족정신을 흐르는 저류(低流)이며 전통정신의 확고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법에 의하여 국민정신을 통일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하겠다.

 󰡐 진리는 행동을 요구한다.

 보현행원품은 보현의 행원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은 우리가 한량없는 대자비 대지혜 대공덕을 성취하려면 십종행원을 닦으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보현행원을 닦으면 부처님의 대위신력을 성취하고 진리 본연의 평화, 번영, 국토, 즉 정토가 이룩된다는 뜻이다.
 결국 행동을 요청한다. 행원의 행을 요청한다. 행동으로서만 진리의 성취도 국토의 완성도 있게 됨을 거듭 천명한 것을 알 수 있다.

 󰡐 인간을 존경하자.

 행원품은 예경을 첫째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 같이, 부모와도 같이, 예배하고 공경하라고 하셨다. 부처님께 아무리 예경하더라도 일체 중생에게 예경하지 않는다면 이는 예경이 될 수 없다. 일체 중생을 존경하라는 이 말씀에는 아무리 말하여도 다 말 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잠겨 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인간을 공경하고 인간이 지니는 가치를 소중히 하며 그의 능력을 개발하고 그의 자유와 행복을 존중히 여기는 이 인간존경의 가르침은 만고 불멸의 큰 진리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사람 값어치 몰라주는 풍조가 휩쓸고 모래알사회 같이 인간성이 흐려진 삭막한 시대에는 이 가르침만큼 따뜻함을 주는 감로약(甘露藥)은 없다. 불교의 사회적 가르침은 이 인간존중 생명 존엄이 그 골격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만행(萬行)이 행원(行願)에서 완성된다.

 불자의 행위 규범으로 계(戒)가 있다. 출가인의 계와 재가불자의 계가 있다. 이 계를 잘 지키면 자연히 부처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사회에는 평화가 있고 개인에게는 안락이 있게 되어 있다. 그만큼 계는 중요하고 지키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계에 대하여 현대적 의미를 논의하는 것도 보게 된다. 그러나 보현행원을 행하면 그 속에 계가 다 있는 것이다.
 예를 십종행원의 하나인 「항상 중생을 수순하라.」 항순중생(恒順衆生)에 든다면 경에는 「모든 중생을 부모와 같이, 스승과 같이, 아라한과 같이, 내지 부처님과 같이 받들고 섬기고 수순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수순하는데 거기에 어찌 악행이 있을 것이며 잔인한 일이 있을 것이며 부도덕이 있을 것인가. 살생이 있을 리 없고, 도적질이 있을 리 없고, 거짓이 있을 리 없고, 탐심이나 성내는 마음이나 게으름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중생을 수순하라는 것에는 일체 세간법과 불법이 그 속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따로 계행을 닦으려 하지 않아도 구족하게 되고 따로 계의 정신이 어쩌니 하고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 자비의 적극성를 배우자.

 오늘날의 우리들 불자는 부처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겠다. 부처님 마음은 바로 자비심이고 보살도의 근본 정신도 자비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팔천 번을 이땅에 출입하셨다. 그 사이 베푸신 자비와 지혜 방편은 한량이 없다. 부처님도 많으시고 명호도 많다. 그러나 실로는 두 부처가 없는 것이다.(無二佛). 부처님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르다. 중생을 위하여 나투시는 때와 국토와 이름이 다른 것이다.
 경의 말씀과 같이 「부처님은 대자비로 체를 삼으시고…」국토와 중생을 교화하신다. 부처님의 각가지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고 오종가풍(五宗家風) 역대 조사도 부처님 자비의 나툼이며 내지 교화 방편에도 신장, 남자, 여자, 나투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부처님은 실로는 중생을 위한 자비의 나툼인 응신(應身)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할 때 혹자는 말하기를 「자비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비가 가지는 적극적 의미를 모르는 데서 그런 말을 한다.
 자비에는 진실로 중생을 위하고 저 사람의 참된 완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깊은 지혜와 넓은 헤아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라고 하여 저 사람에게 타락이나 고통 불행을 불러 일으키는 일을 하거나 그런 집단에 무조건 항복하는 것이 자비는 될 수 없다. 6.25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무방비 무저항은 바로 호랑이 입에 생명을 바치는 것이 되지 않았겠는가. 자비는 진실로 중생을 위한 뜨거운 열과 진실과 지혜가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 청년이여 슬기로와라.

 끝으로 청년에게 한 말 하겠다.
 대개 청년은 국가 민족의 동맥이다. 민족의 동맥인 청년이 기가 푹 죽어서 나이가 70이나 80쯤 된 늙은이 같이 숨도 못 쉬고 주저앉아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 나라 그 민족은 끝장이다. 마땅히 소리칠 때는 소리치고 일어서야 한다.
 이와 같이 청년의 젊음과 혈기는 소중하다. 이것이 정법에서 표현될 때 국가와 사회의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젊음과 혈기에 못지 않게 소중한 것은 지혜다. 슬기로와야 한다. 십중대계(什重大戒)의 결말도 지혜에 두었고 육바라밀도 그 맺음은 반야로 되어 있다. 지혜스러워야 그 행동이 빛이 나는 것이다. 발전도 희망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청년은 모름지기 내가 나라의 동력이며 동맥인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슬기를 연마하여 참으로 나라 사랑하는 길에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지혜가 없을 때 청순한 젊음은 엉뚱한 결과를 부르기도 하고 남에게 끌려 다니게 된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는 불법을 만난 경행심(慶幸心)을 잊지 말아야겠다. 부처님 법이 우리의 생명에 빛을 준다.
 부처님 법이 없는 곳에는 인간은 죽음과 고난의 속박을 수레바퀴처럼 돌고 반복하여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부처님 법에 의하여 비로소 이러한 고뇌의 멍에를 벗고 우리는 생명의 빛을 얻는 것이다.
 여러분은 젊음이 넘치는 이 때 법을 만났다. 영영 고뇌의 쇠사슬을 끊고 대자유 해탈을 실현할 결정적 시기다. 경행심으로 기쁨과 용기를 내자. 그리고 보현의 십대행원이 우리의 생명발전의 원리임을 굳게 믿고 大行을 전개하자.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하신 위신력을 받고 쓰며 또한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다. 보현 대행에서 영원히 젊은 생명은 비로소 제자리를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민족의 동맥인 청년이 기가 푹죽어서 늙은이 같이 주저않아 있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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